유천(만해의 속명)이 처음부터 승려가 되기 위하여 가출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출병하여 국토가 외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시국을 지켜보면서, 유천은 삶에 대해 회의하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던 유천은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의지만 가지고 한양을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한양을 향해 가던 중 나라를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회의에 빠졌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발길을 돌렸다.

출가 후 선진문물 배워 토지측량술 전파

월정사에 도착했지만, 그가 만나고자 했던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다시 백담사로 갔다. 그 때 유천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백담사의 주지 연곡 스님을 만나, 유천은 나이 26세 되던 1904년에 불문에 귀의했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 스님을 수계사로 모시고 수계를 받았다.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法名)이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였다.

이렇게 만해 스님은 시국에 대한 의협심으로 집을 나섰고,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출가자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한 한학은 스님의 경전 공부에 큰 힘이 되었다. 불도에 정진하며 학암 스님을 모시고《기신론》, 《능엄경》,《 원각경》등을 배웠다. 또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처음으로 선(禪) 수업을 하고, 1908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월화 스님을 모시고《화엄경》을, 건봉사에서 학암 스님으로부터《반야경》과《화엄경》을 공부했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경전 공부와 선 수업을 겸하면서 장경각에 쌓여 있던 각종 경전을 탐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백담사 연곡 스님이 건네준 두 권의 책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에 눈을 뜨게 하였다. 그 두 권의 서적 가운데 한 권은 청조 말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대학자 양계초가 쓴 계몽서적이자 혁명서적인《음빙실문집(飮빙室文集)》이었고, 또 다른 책은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지리서《영환지략(瀛環之略)》이었다. 이를 계기로 산중에 묻혀 경전만 읽었던 만해 스님은 칸트, 루소, 베이컨 등 서양철학까지 접하게 되었고,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넓은 세계를 직접 알아보아야겠다고 작심하게 되었다.

스님은 원산 항구에서 배를 타고 소련(러시아)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신항구에 도착하였다. 낯선 이국땅에 도착하자마자 삭발한 머리와 이상한 옷차림 때문에 스님은 뜻하지 않는 봉변을 당하게 된다. 한인 동포들이 스님의 이상한 겉모습을 보고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하여 다짜고짜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일진회는 을사늑약을 지지하면서 일본에 빌붙어 매국행위를 일삼던 무리였다.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진회 회원들은 한인이 많이 사는 블라디보스톡에도 나타나 갖은 행패를 일삼았다. 그런 까닭으로 한인 동포들은 수상한 조선 사람만 보면 무조건 일진회로 알고 죽이려 들던 때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만행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님은 세계여행을 포기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과 넓은 세상에 대한 스님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스님은 서양의 각종 문물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본행을 결심하고, 1908년 4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6개 58월여 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선진문물을 접하였고, 일본인 아사다 교수의 도움으로 동경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할 수 있었다.

또 유학 중이던 최린, 고원훈, 채기두 등을 만나 교우하였다. 최린과는 뒷날 3·1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인연이 되었다. 스님은 일본에서 측량술을 배우고 측량기계를 사들고 귀국했다. 그리고 서울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여 측량기술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최첨단 기술인 측량술을 공부한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와서 토지를 측량해주겠다고 해 놓고 3000평 땅을 2500평으로 기록해 놓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들은 2~3년 후쯤 다시 와서 국가의 땅을 500평 더 경작해 왔으니 세금을 내라는 식으로 토지를 수탈하였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부족했던 우리 민족은 눈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해 스님은 토지개념이 희박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측량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1910년 한일병탄 이후,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연합맹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사찰을 전부 일본 조동종에 예속하려 했다. 만해 스님은 이에 대항하여 1911년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장금봉 스님들과 함께 송광사, 범어사 등지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1913년 박한영, 장금봉 스님과 함께 불교종무원을 창설하였고,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의 문제, 포교의 문제, 경전의 해석 등 불교개혁의 의지를《조선불교유신론》에 담아 발행하였다. 또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고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은 최초의 책《불교대전》을 편찬하였다. 이 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발행하였다.

만해 스님은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설리도화편편홍(雪裏桃花片片紅)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몇 사람이나 오래도록 나그네로 지냈는가
한 소리로 온 우주를 갈파하니
눈 속에 복숭아꽃 하늘하늘 붉어라

스님은 선의 묘리를 꿰뚫은 선사였고, 방대한 경전을 주제별로 정리한 교학자였으며, 죽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또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교양잡지《유심》과《불교》를 발행한 언론인으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

1919년 1월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최린, 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의논하였다. 이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손병희를 추대하였고 최남선이 작성한〈독립선언서〉에‘공약 3장’을 첨가하였다.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거사 후에 일본경찰에게 잡혀갔다.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년 6개월 만인 1921년 12월 22일에 풀려났다.

만해스님이 옥고를 마치고 출소할 때를 대비하여 이판계 수좌들이 친일세력인 사판계에 대응하기 위해 1921년 11월 30일‘선학원 건물’을 준공하 다. 이는 1953년 6월 22일 서울지방법원 민사3부, 1954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 민사2부, 1955년 7월 28일 대법원 민사2부 판결문에 적시돼 있는 내용이다.

스님은 출소 후 이판계의 수장으로서 선학원에 머물며, 선리참구, 민족운동, 불교활동, 계몽활동, 문학활동 등을 치열하게 했다. 1932년 2월에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우리 경제의 힘을 기를 것을 주장하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주도하기도 하였다.

1933년, 만해 스님을 위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조선일보사 사장이던 방응모, 박광 등 몇 사람이 성금을 내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마련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에서 스님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그 당시 조선 땅 어디라도 일본인의 발 아래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심우장 만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면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에 대항하여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조선인 학병 출정을 반대하였다.

민족불교의 수호자이고, 불교개혁의 선두주자였으며, 구국의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투사이자 근대 문학인이었던 만해 스님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세납 66세, 법랍 39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스님 법체는 망우리 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가난한 만해 스님의 장례는 지인 150여 명의 도움과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이 낸 거액의 부조로 치를 수 있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민족의 미래를 제시했던 만해 용운(卍海 龍雲, 1879~1944) 스님. 비록 난세에 머물렀지만 걸림 없이 산 대자유인이었다.

※ 참고 문헌 
전보삼편저,《 푸른산빛을깨치고》, (서울: 민족사, 1992).
김삼웅,《 만해한용운평전》, (서울: 시대의창, 2006).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