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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만해 한용운의 생애 ①
국내외 정세 설명해준 선친, 만해 시대정신에 큰 영향
2018년 11월 08일 (목) 15:31:27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들어가는 글

근대 한국불교는 제국주의 일본의 강압 통치라는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을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려는 정책에 따라 전통성을 잃어버리고 친일화, 왜색화 되었다. 이렇게 한국불교의 미래에 짙은 안개가 내려졌을 때, 정체성을 올바르게 회복하려 했던 시도로 대표적인 것이 선학원의 창건과 선종 재흥 운동이다.1)

선학원 설립 100주년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이며, 선학원의 설립조사 가운데 한 분이신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

이번 특별기획에서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먼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일생을 시작으로 스님의 불교개혁사상, 독립사상, 문학사상, 불교대중화운동 등을 현재 발표된 연구논문과 기사, 단행본을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선학원 설립의 배경과 활동, 그리고 그 의미를 중심으로 만해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2)

만해 스님이 출생할 당시(1879년)인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안으로는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흥선대원군이 왕의 생부라는 지위로 국정 전반을 다스렸다. 왕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閔氏) 일가는 대원군의 독주에 맞서서 치열하고 처참한 권세 다툼을 되풀이 하였다. 이에 따라 왕정은 날로 부패하고 쇠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어지러운 국내 상황을 틈타 밖으로는 외세가 한반도에 마수를 뻗쳐오기 시작했다. 쇄국정치의 장본인인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키운 열강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간섭이 제일 심했다. 조선을 침략하려는 욕망을 드러낸 일본은 무력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고종 13년(1876)에 체결된 내자수호제약(內子修好條約)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가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한민족의 피땀을 착취하기 위한 근저를 하나둘 마련해 갔다.

대원군 하야 이후, 민 씨 세력이 정권을 잡자 정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구사상, 구세력을 타파하고 신문명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조선에도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에 이어 2년 후 갑신정변이 터졌다.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하며 일으킨 정변이다. 갑신정변은 비록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대대적인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박영효가 봉건적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근대적 법치국가를 확립해 자주독립과 부국강병하자는 <건백서>를 올리는 등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었지만 국내 정세는 어지러워지고, 국운은 쇠퇴하였다.

조정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가 대립하는 것은 물론, 친일파와 친청파, 친러파의 3각 권력 다툼이 극에 달하였다. 혼란을 틈타 열강의 개입이 노골화되었고, 한반도는 일본, 청,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초들의 거센 공격에 당황한 조정은 청나라에게 군대를 요청하였고, 일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결과 한반도는 청일전쟁의 무대가 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국내외 정세는 더욱 악화돼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은 그 위세를 몰아 강압적으로 한일협정을 체결하였고, 을사년(1905년)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다. 을사년 이후 일제의 침략 행위는 날로 극심해서 우리 민족을 식민지 백성으로 삼고 조정의 모든 행정을 통제하는 한편,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고종을 퇴위시키는 만행까지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의분을 참지 못한 민중이 각처에서 봉기도 하며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에 맞섰지만,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이와 같이 국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다. 나날이 거세어지며 조선 민중에게 불어닥친 풍파는, 스님이 66세라는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행보에 유의미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출생에서 훈장이 되기까지3)

스님은 조선왕조 말(末) 국운이 한 참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 땅(현재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에서 청주 한공(韓公) 응준(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 씨(方氏)이다. 스님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 자(字)4)는 정옥(貞玉)이었다. 스님이 출생할 당시에는 가산이 풍부하여 그 지방 토호5)급(土豪級)에 속하였지만, 부모가 돌아간 뒤부터는 재산이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보잘 것 없는 일개 빈가(貧家)로 떨어졌다고 한다.6)

어린 유천은 6세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이 되던 해에 《서상기(西廂記)》와 《통감(通鑑)》을 독파하고 《서경(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이 조용한 두메산골에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갑신정변으로 국운이 쇠퇴하였을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에게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선친의 가정교육은 만해가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온 결과 유천은 16세가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이 되고,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평범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주) -----
1) 이재헌, <한용운 스님과 선학원>, 선리연구원 ‘제8차 월례발표회’ (서울: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09), pp. 47~48.
2) 임장묵,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석사학위 논문 (서울: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1980), pp. 1~6.
3) 전보삼 편저, 《푸른 산빛을 깨치고》(서울: 민족사, 1992). pp. 17~18.
4) 사람의 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
5) 어떤 지방에서 양반을 떠세할 만큼 세력이거나 어떤 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던 호족.
6) 임장묵, 위의 논문,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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