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선학원은 1953년 안국동 40번지 건물(현 선학원 건물)과 안국동 41번지 대지를 되찾아 오기 위해 당시 범어사를 상대로 ‘부동산소유권리이전등기절차이행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일제의 경제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범어사에 명의신탁했던 재산을 1934년 재단법인 선학원은 범어사에 환원을 요구했지만 범어사는 “내부 일부의 반대”를 이유로 신탁한 재산을 돌려주지 않고, 범어사가 어느 때 선학원의 중앙선원 건물과 대지를 ‘재단법인 덕성학원(현 덕성여중고)’에게 넘겨 소유권이 이전되자 이를 되찾기 위해 당시 선학원 이사장 김적음 스님을 원고로 범어사 주지 김동기(金桐琦)를 피고로 소송을 제기했다.

범어사로부터 안국동 40번지 건물과 41번지 대지를 넘겨받은 덕성학원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주장하면서 참가인으로 이 소송에 참여했다. 1심 재판부의 판결(1953년 6월 22일 서울지방법원 민사 3부, 재판장 김?치걸金?致傑)은 “선학원이 신탁한 건물과 대지는 범어사가 부동산 목록만 대여했다”는 잘못된 주장을 받아 들여 재단법인 선학원이 패소했다. 이에 불복한 선학원은 항소해 1954년 9월 27일 고법(서울고등법원 민사 3부 재판장 이성욱李成郁)에서 승소했고, 이에 불복한 범어사가 대법원(1955년 7월 28일, 대법원 민사1부, 대법관 김두일)에 상고했지만 기각되면서 현재의 선학원 재산을 환수하게 됐다.

1심부터 대법원 판결문의 ‘판결사실과 이유’에는 선학원의 최초 설립이 “이판계(理判系)의 선종의 지도자인 한용운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단기 4254년도(1921)에 출옥하게 되자 동인(同人, 만해 선사)을 중심으로 한,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을) 창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적시하고 있다. 

또 1심부터 대법원까지 재판부는 “1953년 원심(1심) 당시부터 증인인 장창석(張昌奭), 강정일(姜正一), 그리고 1954년 항소심 당시 증인인 김경봉(金鏡峯), 강정일(姜正一), 김상호(김상호, 만해의 제자), 최응산(崔應山) 등의 각 증언에 의하여···”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64년 항소심 당시)증인 최응산(崔應山)·최창석(崔昌奭)·김경주(金敬注 등의 각 증언, 그리고 선학원의 대표자 김적음 본인 심문의 결과, 이에 당사자 간의 변론의 모든 취지(全趣旨)를 종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판결문에서 선학원 건립에 기부한 대표적인 신도로 나온 최창훈(崔昌勳)과 증인으로 나선 장창석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증인들은 선학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당시 선학원의 실무를 맡아 어느 누구보다 선학원의 사정에 밝았을 인사들이어서 판결문에 기록된 내용의 신뢰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김경봉은 1941년 유교법회를 개최하고, 그 직후 제2회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를 개최하고, 3월 16일에는 이사회와 평의회를 개최해 임원진을 개편할 당시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선학원 제4대 이사장이기도 하다. 김광식 교수의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만당 (卍黨)’(<한국학보>21권 3호, 일지사, 1995, 218쪽) 논문에 따르면 “김상호는 3·1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만해 선사의 ‘조선독립의 감상’을 이춘성 스님으로부터 전달받아 <독립신문>에 게재하게 했던 인물이다.

최응산은 1937년 3월5일 개최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의 제3회 정기이사회 당시 서기(書記)이다. 1939년 3월부터 1941년 2월 사이에 기록된 조선불교선종 중앙종무원 서무부의 경과보고서에는 ‘보통회원학력조사’ ‘국방헌금’ ‘선원별 안거’ 등이 기록돼 있어, 일제강점기 말의 불교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무부 경과보고’에는 “1940년 12월23일 상임이사 기석호(奇西湖)씨가 입적으로 하고 최응산(崔應山)씨가 ‘취임대행(就任代行)”한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상임이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주(金敬注)는 1931년 김적음 선사가 선학원을 인수 후 만해·남전·만공스님등과 함께 일반 대중들에게 설법·강설(講話) 등의 행사를 거행한 인물이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만해 한용운 선사는 당시 불교계에서 ‘이판계의 수장’격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때문에 만공 스님이 선학원 설립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라고 해서 만해 한용운 선사가 선학원의 설립 주역이 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려워 보인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친절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광식 교수는 “한용운은 성격이 과격하고, 직선적이고, 다혈질이었다. 선학원 시절에도 대중 승려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체질이 아니어서 혼자 지냈다. 승려들에게 ‘중놈’이라고 욕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고 말한다. 파계사 고송 스님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성질이 대쪽” 같았다는 것이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로, 옥살이 하고 출옥 후 건물이 완공되자 만해 선사는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질이 대쪽 같고 대중과 어울리지 못하던 그가 어떻게 출소 후에 선학원에 거처를 둘 수 있었을까. 불교계를 대표해 기미독립선언의 독립 삼장을 작성하고, 옥살까지 하고 나와서도 일경의 감시에 쫓기던 만해 한용운 선사에게 당시 불교계, 사판 스님들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매일 쫓기는 만해 선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경우 그들이 일경에게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진 않았을까. 왜 선학원의 중요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들이 그를 ‘이판계의 선종의 지도자’로 지칭했을지 깊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당시 만해 스님을 “이판계의 선종의 지도자”로 적시한 법원의 판결은 학계는 물론 선학원이 만해 선사를 설립조사 중 1인으로 받들고 추모행사를 가지는 데 불편해 했던 이들의 시각도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만해 스님은 ‘대처’라는 이유와 자료 부족으로 승려로서의 삶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부족했다. 판결문에 따라 김광식 교수가 지난 10월 25일 선학원 미래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의 주요 내용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김광식 교수 발표문에 논평한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선학원 건립이 한용운의 출옥을 대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에 “아무 근거 없는 역사 왜곡의 단적인 사례”로 지목했다. 이 역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만해 한용운 선사가 “수감 중이었는데 어떻게 선학원 건물의 공사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 역시 ‘이판계의 선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수도원을 창립하려 했다는 판결문의 내용으로 볼 때 적절한 반박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판결문이 나온 소송은 선학원 건물과 땅을 덕성학원으로 팔아넘긴 범어사를 상대로 이루어졌고, 덕성학원은 참가인으로 참여했다. 1944년 7월에는 덕성학원이 선학원 부인회관 점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재단법인 선학원이 소송까지 해서야 건물과 토지를 찾아 올 수밖에 없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왜 범어사는 선학원의 핵심 건물과 토지를 팔아먹었을까. 이 역시 궁금증을 더하는 대목이어서 연구가 시급하다.

재단법인 선학원 관계자는 “법원 판결문이 60년이 더 된 것이어서 원문을 판독하기 어려웠지만 만해 한용운 선사와 선학원 설립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어서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며 “빠른 시일 내 판결문의 내용 연구를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하고 이를 조명하는 세미나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업무제휴에 의해 불교닷컴이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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