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6월 22일 서울지방법원 민사 3부(재판장 김찬걸) 판결문 맨 뒷페이지 캡쳐.

만해 한용운 선사와 ‘선학원’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확인됐다. 이 자료는 1921년도 최초 건립된 ‘선학원’ 건물이 “이판계의 수장인 만해 스님이 출옥하게 되자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사판계에 대응하기 위한 이판계의 수도원으로 창립됐다”는 사실을 기록한 대한민국헌법기관인 법원의 공식 판결문이어서 매우 신뢰도가 높다. 이 판결문(1심 2심 대법원 판결문 전체)대로면 선학원의 설립 초기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김광식 교수는 선학원미래포럼이라는 단체가 ‘선학원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연 ‘2018워크숍’에서 ‘선학원 정체성의 재인식;만공과 한용운, 계승의 문제’ 주제발표를 통해 “만해 한용운 선사는 선학원 설립의 주역이 아니며,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어서 1921년 선학원 건물 공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며 “한용운은 선학원 창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한용운을 선학원 설립 ‘조사’에 포함시킨 것은 명백한 역사적 오류이자 억지의 역사인식”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김광식 교수의 발표는 선학원 설립의 핵심 주역은 만공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 선사는 선학원과 ‘연관된 인물’일뿐 ‘직접적인 연관은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또 만해 선사는 당시 거주처인 선학원의 선을 중흥하는 노선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민족운동, 불교활동, 계몽활동, 문학 활동 등을 치열하게 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선학원은 만해 한용운 선사와 만공 스님 모두 설립 조사로 모시고 있다.

만해 선사가 선학원 설립에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스님이 옥고를 치르고 있어 선학원 건물의 공사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에 기초한다. 만해 스님은 3·1 기미독립선언으로 일경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제 하 법원에서 3년형의 유죄판결을 받은 게 1919년 8월 9일이다. 만해 선사는 1921년 12월 22일 감형 출소했다.

한용운 선사는 선학원과 어떤 관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1921년 11월 30일 준공한 ‘선학원 건물’은 만해 한용운이 옥고를 마치고 출소할 때를 대비하고, 이판계 수좌들이 친일세력인 사판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 1954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2부(재판장 이성욱) 판결문 일부.



최근 <불교닷컴>이 확인한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강도봉(석왕사포교당 포교사), 김남전·김석○(김석두로 추정, 범어사포교당 포교사) 등은 기미독립운동 당시 ‘33인 중의 1인’이며, ‘이판계(理判系)의 선종의 지도자인 한용운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단기 4254년도(1921)에 출옥하게 되자 동인(同人, 만해 선사)을 중심으로 한,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을)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崔昌勳) 외 다수인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서울특별시 안국동 40번지 대지 190평을 매입한 후 동 대지상에 목조기와집을 건축, 그 당시 범어사에서 인사동포교동(범어사포교당)을 폐지 철거하고 옛 목재와 기와 약간을 (선학원) 건축에 기증”하면서 설립됐다.

판결문은 일제강점기에 이판인 수좌스님들이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이판계의 수장’으로 모셨고, 그의 출옥에 대비하면서 수좌들이 그를 중심으로 친일 사판계에 대응하는 총본부를 건립하려던 꿈이 단편적으로 나마 기록된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판결문에는 1921년 ‘선학원 건물 설립’하고 몇 해 되지 않아 겪은 ‘재정의 어려움’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과중하게 부과한 세금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선학원을 창립하고 한용운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이 강렬한 승(僧) 급(及, 및) 신도(信徒)가 집합하여 선의 수행을 정진해 오던 차 당시 조선총독(1919년 9월 2일 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로 추정)은 이를 탄압하고 중세(重稅)를 과(課)“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선학원은 조선총독부의 과한 세금 부과로 어려움을 겪자 1922년 11월 27일 범어사로 선학원 건물을 명의 신탁했다. 당시 명의신탁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졌을까. 이 역시 판결문에 나온다.

판결문에 따르면 “조선총독은 이를 탄압하고 중세를 과하므로 선학원은 신탁(信託)의 취지로서 선학원 건축(안국동 40번지 대지 190평)을 단기 4255(1922)년 11월 27일 범어사 명의로 그 소유권보존등기를 경우하고, 동 대지(안국동 41번지 30평)는 단기 4257(1924)년 9월 15일 범어사 명의로 그 소유권 이전등기를 경유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기록은 1921년 선학원이 아닌 1934년 조선총독부가 설립인가 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의 창립 이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대지를 범어사로 이전등기 후) 그 후 사판계에서 태고사(현 조계사)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총무원을 설립하였으므로 이판계인 선학원도 이에 대응하여 단기 4266(1933)년 8월경 원고(선학원) 재단을 설립코자 수덕사 주지 송만공 외 15명으로부터 전답 약 15만을 기부 받는 동시에 범어사에 대한 전시신탁(前時信託)을 해제하고, 본건 부동산(40번지 건물과 41번지 대지)을 반환받는 의미 하에 당시 피고사(범어사)의 주지였던 오리산으로부터 전답 4만평을 같이 기부 받아 단기 4267(1934)년 12월 5일 원고(선학원) 재단설립허가를 받게 된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 1955년 7월 28일 대법원 민사 2부(대법관 김두일) 판결문 일부.


선학원은 1920년대 중반 재정의 어려움으로 침체됐다. 선학원 건물을 범어사에 명의신탁한 후 1923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선학원에서는 선종의 부활과 자립 활로를 위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 총회개최를 갖는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선우공제회의 사단법인 설립을 허가하지 않아 어려움은 가중됐다. 선우공제회 사단법인 설립이 어렵던 시기인 1926년 6월 9일 선학원에서 불교활동과 민족활동 등을 하던 만해 한용운 선사는 6·10 만세 운동 사전 검속으로 선학원에서 체포되어 종로서에 수감됐다.

당시 선학원은 과중한 세금 부과로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선학원은 일경에게 감시의 대상이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禪學院(선학원)도 搜索(수색) 門前(문전)에서 韓某檢擧(한모-만해 선사-검거)’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당시 선학원이 상시적으로 감시당하고, 그 주된 감시 대상이 만해 한용운 선사였음을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발각된 모 중대사건으로 인하야 시내 종로 경찰서(警察署)에서는 경긔도(경기도) 경찰부(道警察部)의 지휘를 바더(받아) 재작일 아츰(아침)부터도 활동을 게속하야(계속하여) 북촌일대에서 유력한 련루자(연루자)로 인뎡(인정)하는 사람을 검거하여 들이는데 재작 칠일 아츰(침) 여덜(덟)시경에는 (또)다시 사오명의 형사대가 시내 안국동(安國洞) 사십번디(지) 동래 범어사(東萊 梵魚寺)에서 경영하는 선학원(禪學院)을 에워싸고 수개월전부터 그곳에서 류숙(유숙)하고 잇든(있던) 강원도 린뎨군(인제군) 백담사(江原道 麟蹄郡 百潭寺) 승려로 이전 삼십삼인(기미독립선언 33인) 중에 한사람인 한모(韓某, 만해 한용운 선사)가 맛츰(마침) 문밧그로(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돌연히 검거하는 동시에 그가 잇던(있던) 방까지 엄밀히 수색하엿(였)다더라”고 전한다.

이때의 어려움은 1950년대 중반까지 선학원을 곤경에 빠뜨렸다. 판결문에 따르면 선학원 건물이 어느 순간 학교재단의 소유로 넘어간 것이 확인된 것이다. 선학원의 중심터전이 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 판결문이 나온 배경이 안국동 40번지 건물과 41번지 대지가 덕성학원 소유로 넘어가 이를 되찾기 위해 소송이 이루어지면서다.

* 이 기사는 업무제휴에 의해 불교닷컴이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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