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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중심 주자학 비판 양명학 절충 엄격성 유지
탄허 스님 교육이념 의의 학술세미나 지상중계-1
2018년 10월 25일 (목) 14:39:47 불교저널 budjn2009@gmail.com




근세 동아시아 유학으로 본 탄허의 학술과 회통론
이원석(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조교수)


2012년 탄허대종사 탄신 99주년과 그 이듬해에는 ‘오대산 화엄의 특징과 탄허의 원융사상’과 ‘탄허대종사의 인재양성과 교육이념의 시대정신’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 결과는 모두 2013년, 『되돌아본 100년, 탄허』와 『미래를 향한 100년, 탄허』로 모아졌다. 이상에는 1984년에 창설된 탄허불교문화재단의 발전과 1990년대 초 이래 오대산 월정사의 안정이 중요 배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허의 연구는 여전히 많은 난관과 과제가 남아있다. 우선, 탄허는 자신의 학술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개진한 문집이나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선사로서 난서부화(亂書付火)를 경계하여 저술보다 사색, 특히 좌망(坐忘)에 노력하였고 다언과 번문(繁文)을 사자(士子)와 도가의 ‘병해’로 규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현전하는 탄허의 글은 대부분 대담과 법문이 아니면 자신의 견해마저 잘 드러내지 않은 불경 등의 번역문이다. 특히 대담과 법문은 체계적 사고와 논리보다 그 대상에 따라 같은 내용도 다양하게 언급되는 한계를 지닌다. 제자들의 회고 기록도 오랜 시일과 단편적 기억에 따른 한계도 있다. 이는 탄허의 학술과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적지 않은 장애요소가 된다. 그리고 탄허의 다양한 면모를 어떻게 종합하여 통일적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과제가 있다. 탄허는, 대강백·대종사·선사·고승으로, 또는 대학자·철학자·사상가·삼교회통론자로, 혹은 도인·철인·예지자로, 역경가와 교육가로도 장기간 활동하였다.
탄허는 불교와 선학의 관점에서 심론(心論)을 개진하였다. 그에 의하면, 마음 밖에 불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心外無法]. 그러므로 佛法도 마음법이고, 그 마음은 바로 부처님이다[卽心是佛]. 우주만법과 인생전체도 자신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능엄경』에서 언급된 25원통의 우주 만법도 모두 자기 마음의 밖에 있는 것이 없다. 이는 참선의 최상승으로 규정된 견실심으로, 일체 생각의 생멸이 끊어진 불생불멸의 본마음, 무념의 진여자심,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탄허의 심관에는 일심론도 보인다. 『원각경』에서 일심은 허망심이 없는 것이자 삼덕의 작용과 서로 상거상통하는 본체적 개념이다. 이를 정각하는 것이 바로 원각이다.
탄허는 성론도 적지 않게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性)이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면목, 즉 출생 이전이나 우주 미분 이전에 시공이 끊어지거나, 선악·시비·주객의 분별이 끊어진 본래의 마음자리이다. 따라서 性은 언어나 문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부처님 마음자리에 갖추어진 4덕(眞常 眞樂 眞我 眞淨)으로 설명되거나, 주자학의 인의예지로 비유된다.
심지어 탄허는 중생뿐만 아니라 일체의 동물도 동일한 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탄허의 성론은 18세기 후반 노론 내부에서 경기와 호서의 권력의 분화와 함께 학술상에서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에서 인물의 동성과 성범의 동심을 주장한 경기 락론계(洛論系)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흡사하다.
탄허의 심성론은 유교와 도교와 회통되었다. 심성은 『중용』의 ‘중화’와 연결되고 ‘체용’과 결합되었다.
이상에서 탄허의 심성론은 대개 본래의 마음과 그 작용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마음의 본체로서의 성과 그 작용으로서의 심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송의 장재(張載)가 제창한 심통성정설(心統性情說)을 수용하여 성과 정을 대비적으로 설명하였다.
탄허의 심성론에 보이는 인간관은 인간평등의 불교적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체 중생은 물론이고 동물마저 부처님이나 성인이 될 수 있다. 후술하듯이, 인간은 상중하의 근기로 나누어지지만, 본래 마음(一心·性·普光明智)를 수행하여 깨달으면 모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관건은 어떠한 수행을 통하여 본래의 마음(一心·性·普光明智)를 깨달아 부처님=성인이 되어 우주의 주인이 되느냐는 것이다. 탄허는 예·법·정에 따라 사는 사람을 극선질·평민·극악질로 대별하며 상중하의 근기로 구분하고 다른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논리는 참선의 수행법에도 보인다. 탄허에 의하면, 근기에 따라 공안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조사선[간화선]과 그렇지 않는 묵조선으로 나누었지만 깨달음에 이름에는 차별이 없다. 또한 화의돈(化儀頓)과 축기돈(逐機頓)으로도 구분된다.
화의돈은 교화의 방법을 활용하여 점진적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점법(漸法)이고, 축기돈은 근기가 특출하여 한 마디 말씀에 모든 진리를 깨닫는 돈법(頓法)이다. 특히, 탄허가 오후 보임(保任)을 강조하거나 “『화엄론』은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된다.”는 한암의 견해에 따라 선과 화엄의 결합도 주장하였다.
이상, 탄허의 수행론은 심성론과 화엄중시론과 함께 살펴보면 보조국사 지눌이나 18세기 후반 연담(蓮潭) 유일(有一)의 경우와 흡사하다. 일하는 측면에서 심성을 통합한 것이다. 이는 대담이나 법문의 대상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혜 종고처럼 마음과 성의 엄격한 구분보다 성이 마음이고 마음이 성이라는 선가의 관점과 관련된다.
탄허의 학술과 관련하여 가장 특색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교회통(三敎會通)이다. 그의 삼교회통은 종지와 근본, 근원과 귀일을 중심으로 한다. 우선 경전의 올바른 이해나 공부와 관련하여 강조된 것은 종지(宗旨)이다. 종요(宗要)라고도 하는 종지는 경론 등에서 그 교설의 중심요소가 되는 교의이다.
경전의 차원을 넘어 학술과 사상, 종교의 핵심을 의미하는 종지는 더욱 중요하다. 탄허는 종지와 관련하여 동양의 학문을 대표하는 불학이 기술이나 삶의 방편을 제공하는 세속의 학문보다 우월하다고 언급하면서 종지가 없는 학문을 삼가라고 주장하였다. 세속의 일반 학문이 그 정해진 대상만 알고 다른 분야에 어둡지만, 불교는 자신과 그 대상의 합일로 앎이 무소불주(無所不周)하여 구경의 진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지란 인생의 근본인 우주관과 인간관이다. 이에 따르면 수행자가 공부할 바는 불교나 선학에 다름 아니고, 그 종지는 우주와 인간의 본래 마음자리, 성자리에서 나온 도이기도 하다.
탄허의 삼교회통도 불교, 특히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점이 특색이다. 그에 의하면, 유교 도교의 사상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도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삼교회통은 불가피하였다. 8할이 세간적인 치세의 유학, 8할이 출세간적인 치신의 도학, 너무 출세간적인 치심의 불학을 회통한 것이다. 유불선의 최고봉은 『주역』, 『노장』, 『화엄경』이고, 그 최극치는 도교의 물아양망(物我兩忘), 불교의 아공법공(我空法空) 등으로 대동하다. 그러나 체계화라는 측면에서 나와 우주 만유, 나의 마음과 전체가 총진리화된 『화엄경』이 최고였다. 화엄에서 가장 중요한 회통론은 바로 ‘귀일’과 함께 ‘무애’이다.
그의 삼교회통은 치심을 근본으로 삼고 불교를 중심으로 삼았으므로, 불교를 떠난 유불선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에 이르면 사사무애의 화엄적 회통론은 이제 보천교에서 비롯된 삼교회통을 불교 중심의 삼교회통으로 전환된다. 탄허가 종종 언급한 “유교는 뿌리를 심고, 도교는 북돋아주고, 불교는 뿌리를 뽑는다[儒植根 道培根 釋拔根]”는 뿌리론은 모두 일법이지만, 뿌리마저 제거하는 불교가 최상이었다.
동아시아적인 시각에서 보면, 유교적 회통론은 청대 건가(乾嘉) 연간 왕중(汪中), 능정감(淩廷堪), 초순(焦循) 등 양주학인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고거학의 발전으로 인한 한송학의 충돌과 각종 전문 학술의 제고는 학술상의 대립을 불러왔다. 회통론은 이러한 대립과 충돌을 지양하고 문호를 배제하면서 다양한 우량학술을 실사구시로 융회관통하는 방법이다. 회통은 ‘多’의 현상[器]을 관통하는 관념적인 ‘一’의 이치[理]를 추상하기보다는 ‘多’를 정밀한 학문대상으로 관용하고 경학의 도와 현실의 시의에 따라 각각의 부분적 진실이나 학설들의 장점을 자신의 유교적 이론체계로 통합하는 것이다.
양주학인들은 다양한 회통론을 기반으로 ‘통학’과 ‘통유’를 학술과 유자의 이상으로 삼았다. 양주학인은 소학에 근거한 고경 연구와 금고의 종통을 통하여 고학을 연구하여 실학에 의리가 담긴 학술을 이상적인 학술로 상정하였다.
이러한 회통론과 고거학의 유입은 19세기 전반에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의 학계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물론 선왕의 의리를 강조하는 주자학을 중시하는 토대에서 청조의 한학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이상의 회통론과 통학은 근세 유학의 측면이지만, 이미 제자학의 회통과 복원은 왕중(汪中) 등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탄허의 회통론은 유가적 회통론과 달리 만력삼대사(萬曆三大師)의 삼교합일론과 보다 밀접하지만, 회통의 덕목으로 일·원·본·근·약·합( 一·源·本·根·約·合)이 중시되는 점은 탄허의 회통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또한, 탄허의 「천부경」 이해는 귀일적 종통(歸一的 縱通)으로 한국의 학술을 ‘국학’으로 통합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확인된다. 비교사적 관점에서 탄허의 회통론은 18세기 중반 이래 중국의 유가적 회통론보다 불교 중심의 삼교합일을 주장하면서도 재야적 민족적 관점이 반영된 점에서 유의되어야 한다.
탄허의 학술은 불교적 심성론에 근거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는 반면에 양지설과 지행합일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성향이 강하였다. 특히, 왕기(王畿) 왕간(王艮) 이지(李贄)와 같은 양명학 좌파의 핵심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은 주목된다. 또한 고립된 지리적 영향과 근현대의 격동으로 인하여 청대의 학술은 례대천리설(禮代天理說)과 소학적 접근법, 자득의 강조와 주소의 중시, 유가적 장자 연구의 수용 정도에 머물렀다. 탄허의 삼교회통론은 보천교에서 비롯되었다가 점차 불교, 특히 화엄을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그 논리는 종지·뿌리·근원·귀일·무애 등이 있지만, “천하무이도 성인무양심(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이나 소옹의 마음 중시와 명말의 삼교합일이라는 중국의 영향도 보인다. 그 결과 탄허 학술은 ‘불도’나 ‘도’로의 지향성이 결정되었다. 탄허의 학술성과는 실로 부단한 노력과 자득으로 이룩한 점에서, 나아가 중국 지식인과의 학술교류가 확인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흐름의 회통적 학술이 전개된 점에서 보다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반적으로 탄허의 학술은 불교의 화엄을 중심으로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절충하면서도 고거적 접근으로 학술적 엄격성을 담보하려 것이다. 이는 불교와 선학을 중심으로 전통학술을 비판하고 현대적으로 변용하면서도 불교의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탄허의 학술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불교의 청산과 불교정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더 크게는 스스로 국사 왕사의 역할을 기대하는 한편 남북통일과 분단의 극복, 이상적 현실 정치를 뒷받침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탄허의 미래 예언과 밀접하고, 특히 한국 불교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견해도 중요하다. 탄허의 제자들이 탄허의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도 “스승은 세상을 바꾸길 염원하였다.”는 혜거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화엄론이 변혁성과 함께 보수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한계도 유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대의 통학도 기본적으로 학정일치·통경치용·경명행수(學政一致·通經致用·經明行修)의 이념에 따라 경세론을 뒷받침하고, 대승적 보살행도 지행합일과 함께 현실참여로 나아간다. 탄허가 불교를 체로 유학과 선을 용으로 활용하였다는 평가나, 대승적 보살행으로 현실 정치에 관심이 지대하였듯이, 기본적으로 탄허의 삼교합일론도 현실 경세와 밀접하다. 우선 그의 삼교회통론은 도덕적 이상사회의 구현을 뒷받침한다. 삼교회통은 통치자가 민중의 통치에 유용하여 정치, 문화, 사회 등의 질서를 유지하여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모두 부패한다. 또한, 삼교의 회통사상은 도의적 인재를 육성하여 남북통일의 주역으로 양성하고, 통일 이후 민족의 이질성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고 화합하는 기반이었다. 세계사의 흐름과 관련하여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힘을 정의로 삼은 영국이나 마르크스의적 평등이론의 러시아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동양학의 역학과 불교의 화엄학 등과 삼교합일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후일을 기약하지만, 여기에는 용을 중심으로 체를 통합한 통학과 차별성도 유의되어야 한다.
탄허의 학술에서 회통체제의 완결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성현의 학술은 ‘심성’일뿐이라고 하면서도 ‘심학’일뿐이라고 규정하거나 하나의 실체를 다양하게 서술한 경우도 있다. 또한,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과 회통은 독창적인 학술의 수립과 밀접하게 관련되지만, 탄허의 학술에는 독창적인 견해가 많지 않은 듯하다. 탄허의 학술에 보이는 양명학과 그 좌파의 사상은 대부분 재론에 머물렀다. 이는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탄허가 체계적인 논지를 전개한 논문이 존재하지 않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고, 일제 치하에서 1970년대까지의 격동적 역사와 불교정화운동의 파고는 탄허가 학문 연구에 매진할 수 없는 배경과도 관련된다.
덧붙여, 탄허의 정치·학술·종교의 합일론이나 윤리도덕의 강조와 도의적 인재양성론도 동아시아의 근세 유학과 밀접하지만 분량의 문제로 후일로 미룬다. 그리고 탄허의 양명학적 근원도 해명되어야 할 숙제이다. 덧붙여 탄허의 삼교회통과 명말의 만력삼대사인 자백달관·운서주굉·감산덕청(紫柏達觀·雲棲袾宏·憨山德淸)의 삼교합일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특히 탄허의 제자들이 제안한 탄허와 감산덕청(憨山德淸)의 비교 연구는 우선적 과제이다.








삼현학 전적 통해 불교로 동양학 완성, 한국불교 재정립 추구


한암과 탄허의 승가 교육이념과 실천양상
자현스님(중앙승가대 교수)




한암과 탄허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화엄학의 대가이다. 이들은 불교교육과 관련해서, 각각 삼본사수련소와 오대산수도원을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보인다.
경허의 제자이자 선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종정 한암이, 선원에 삼본사수련소를 설치하고 직접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한암의 승려교육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한암의 교육관을 인지해 볼 수 있는 측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렇게 확인되는 한암의 교육관은, 1차적으로는 선 수행을 중심으로 교학과 계율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리고 2차로는 이의 확장으로 염불과 종교의식의 학습 및 가람을 수호하여 포교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까지 넓어진다. 이는 승려가 수행자를 넘어서, 시대를 계몽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올바른 종교인이 되어야 함을 천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탄허는 삼본사수련소의 조교를 하면서 한암의 교육관에 영향을 입는다. 해방 후 일본불교의 잔재를 일소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교육의 필연성을 제기해 오대산수도원을 개설한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 영은사수도원으로 연결된다.
탄허는 교육과정에서 교재의 필연성을 절감하고, 한국불교의 전통교육 교재 전체와 선불교의 문헌 및 『주역』·『장자』·『노자』에 대한 현토번역을 감행한다. 이러한 결과가 입적 때까지 이어지는 18종 78권이라는 방대한 역경이다.
탄허의 교육관은 불교의 화엄학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학 전체의 융합이다. 이는 동양전통의 완성을 통해 동아시아의 재정립과 비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암은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경허의 제자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총 4차례나 종정(敎正)에 추대되는 근현대 선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다. 그럼에도 한암은 같은 경허의 제자인 수월·혜월·월면(만공)이 선만을 강조한 것과 달리, 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겸전(禪敎兼全)의 관점을 견지한다. 이러한 한암의 특징은 탄허가 한암의 문하로 출가하게 되는 배경인 동시에, 강원도의 삼본사수련소가 상원사에 설치되는 원인이 된다.
상원사의 삼본사수련소 설치는 일제의 심전개발(心田開發) 운동의 일환으로 제기된다. 한암은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이를 수용해서 선원 안에서의 불교교육이라는 특이한 방식을 만들어낸다. 즉 일제의 의도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방식 안에서 재구성해, 한국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로 삼은 것이다. 이와 같은 한암의 행동은 이후 탄허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탄허의 교육적인 측면은 삼본사수련소에서의 한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는 탄허의 최대 현토번역인 『신화엄경합논』이 삼본사수련소의 수업 과정과, 한암의 부촉에 의해서 대두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삼본사수련소는 이것이 비록 식민지지배 및 교육과 연결된다 하더라도, 한국불교 전통의 소규모 강원교육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삼본사수련소가 일제의 필연성에 의해 제기됨으로 인하여, 강원도 삼본사의 연합에 따른 규모와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삼본사수련소 개소식에 도지사와 평창군수·정선군수 및 강원도 삼본사 주지가 참석한 것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즉 일제의 필요에 의해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불교의 체계적인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는 삼본사수련소의 추진은 총독부와 강원도지만, 삼본사수련소의 운영과 관리는 당시 宗正이던 한암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삼본사수련소가 한암의 재가를 통해 상원사에 설치되었다는 부분에서 필연적이다. 즉 삼본사수련소의 운영과 관련해서 한암의 불교교육 이념을 확인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와 관련해서 심전(心田)에 대한 내용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1934년 3월 5일부터 본사 주지들로 구성된 재단법인 교무원 평의원회에서이다. 이후 1935년 8월 27일 본사 주지 회의의 안건으로 심전개발사업 및 대표기관 설치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일단락된다.
강원도의 심전개발은 도지사의 주관하에 유점사·건봉사·월정사의 강원도 삼본사 주지가 참석한 1935년 7월 4일의 강원도 심전개발추진위원회에서 구체화된다. 이는 8월의 본사 주지 회의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각 도의 상황에 따른 내부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최종적인 본사 주지 회의가 개최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때 강원도 도지사가 강조한 내용은 사찰의 정화와 승려의 수행이었다. 이후 1936년 1월 16일 실무담당자인 참여관 홍종국이 상원사의 한암을 방문해서 협조를 요청한다. 이에 따르면 삼본사에서 信·願·行이 정당한 승려 각 10인을 보내어 교육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한암의 선교겸전의 관점은 제자인 탄허를 지도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한암은 탄허에게 “도가 문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일단 경을 봐야 한다.”라고 글공부를 강조하셨다. 그러자 탄허는 “스님께서 책을 펴주시면 하고, 다른 스님에게는 배우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나, 한암의 계속된 권유로 결국 탄허는 당시의 최고 강백인 개운사의 박한영과 화엄사의 진진응 그리고 중앙학림의 백초월에게 배우려는 구체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원사에 삼본사수련소가 개설되면서, 탄허는 한암에 의해 강사가 되어 한암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 즉 한암의 교육관인 선교겸전은 삼본사수련소와 탄허의 지도를 통해서 일관되는 양상으로, 이는 당시의 선승으로는 매우 특징적인 측면이다.
오대산 삼본사수련소와 관련해서 한암 외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단연 탄허이다. 탄허는 한암과 여러 통의 서신 교류를 통해서 뜻이 계합한 뒤, 1934년 음력 9월 5일 청의보발(靑衣寶髮)을 한 모습으로 오대산으로 입산한다. 이후 1934년 음력 10월 15일 下元에 사미계를 수지한다. 1936년 6월에 삼본사수련소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탄허는 출가 후 불과 1년 8개월 만에 삼본사를 아우르는 삼본사수련소의 조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와 관련해서 탄허는 출가 전의 한문 실력에 의해서 삼본사수련소의 조교가 되고 있다.
당시 삼본사수련소의 수업방식은 한암이 배석한 상태에서 탄허가 경전의 내용을 새겨나가면, 수련생들은 이를 듣고 질문하면서 논강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문에 능한 탄허와 불교의 내용 중심적인 한암 간에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탄허가 불교 경전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과 한문 실력은 한암을 능가할 정도였다는 점을 잘 나타내준다. 실제로 한암은 1949년 8월 15일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에게서 편지를 통해 통도사 해동수도원의 조실로 와 주실 것을 요청받고, 다음과 같은 답글로 대신 탄허를 추천한다.
탄허는 정화의 완성은 교육에 있다고 판단했다. 어떤 의미에서 탄허는 교육이야말로 물질적인 정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또 탄허는 1966년 12월 26일 용주사의 동국역경원 개원식에서, 역장장에 임명되며 행한 법문에서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스님들의 공부를 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취지를 설파했다.
탄허가 번역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삼본사수련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3년째가 되는 1939년 대중들의 요청으로 80권 『화엄경』과 이통현의 40권 『화엄론』의 총 120권을 하루도 빠짐없이 11개월 동안 완독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한암은 탄허에게 120권을 현토를 달아 출간했으면 좋겠다는 언급을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로써는 진행될 수 없었다.
탄허는 스스로 『신화엄경합론』의 번역 동기를 1956년 오대산수도원 시절에 최종교과의 교재로 화엄학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탄허는 1976년 7월부터 한국불교 전통의 강원 교재들을 순차적으로 현토번역하여 간행한다. 강원 2년 과정 교재인 사집과의 『서장』 1권·『도서』 1권·『절요』 1권·『선요』 1권이 이때 처음으로 출판되고, 1981년 12월 20일에는 강원 3년 과정 교재인 사교과의 『능엄경』 5권·『대승기신론』 3권·『금강경』 3권·『원각경』 3권이 발간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2월 20일에 강원 1년 과정 교재인 사미의 『초발심자경문』 1권과 『치문』 2권을 출간한다.
강원의 교육교재에 대한 현토번역과 출판이 일단락된 뒤에도, 탄허는 1982년 5월 31일에는 『주역선해』 3권을 출간한다. 그리고 1983년 양력 6월 5일 입적하신 직인 7월 30일에 『도덕경선주』 2권이 간행된다. 이외에도 2001년에는 유교인 『영가집』 1권과 『발심·삼론』 1권이 발행되며, 마지막으로 2004년 4월 10일 『장자 남화경』 1권이 발행된다. 이렇게 해서 화엄과 선을 필두로 하는 불교 전적들을 번역한 후 삼현학까지 완성하게 되는데, 이는 전체 총 18종 78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특히 『도덕경 선주』를 교정함에는 임종이 멀지 않은 시기임에도 병상에서 교정하며 다듬었는데, 이는 번역 및 교육과 관련된 투철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현학은 탄허가 출가하기 전에 심취했던 분야이다. 이런 점에서 탄허는 삼현학과 불교의 조화와 융회를 통한 동양학의 정립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의 핵심은 단연 불교이다. 이는 탄허가 동양학의 공부 기간과 관련된 언급에서, ‘불교는 수재는 30년 둔재는 300년, 도교는 20년, 유교는 10년’이라고 언급한 것을 통해 분명해진다. 즉 삼현학 전적을 통해서 탄허는 불교를 통한 동양학의 완성까지도 추구했던 것이다.
탄허는 불교정화와 이후의 혼란기 속에서 교육을 통한 한국불교의 재정립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신이 몰락하는 그의 유년기 이후의 현실 문제와 관련해서, 불교 중심의 동양학의 회통과 부활까지도 모색했던 것이다. 이는 탄허의 시대적 요청과 문제의식을 뛰어넘는 온고지신적 교육관에 따른 해법이라고 하겠다.






승가교육 필수 경론, 한국불교 사상 바탕인 선어록에 집중


탄허 현토 역해본 의의와 가치


윤창화 (민족사 대표)



탄허는 1960년 현토역해 『육조단경』 간행(1960)을 시작으로 입적(1983, 70세)할 때까지 약 23년 동안 『신화엄경합론』 등 한국불교 소의경전(所依經典)과 『육조단경』 등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선어록을 현토, 역해했다.
그가 현토 역해한 경론은 모두 14종, 70책으로서 『신화엄경합론』(47권, 1975년), 『능엄경』(5권, 1981년), 『대승기신론』(3권, 1981), 『금강경』(3권, 1981), 『원각경』(3권, 1981), 『육조단경』(1권, 1960년), 『보조법어』(1권, 1963년), 『영가집』(1권), 『서장』(1권, 1976), 『도서』(1권, 1976), 『절요』(1권, 1976), 『선요』(1권, 1976), 『치문』(1권, 1982)과 『초발심자경문』(1권, 1982년) 등이다. 그 밖에 불교경전은 아니지만 유불도 융합 차원에서 현토 역해한 『주역선해』(3권)와 『노자도덕경』(3권), 『장자』(1권)까지 합하면 총 17종 76책이 된다.
필자는 탄허가 한 사람의 힘과 정신으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량의 경론을 현토 역해할 수 있을까? 이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경론, 한국불교 소의경전들을 현토, 완역한 것인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했다. 방대한 작업은 분명한 동기와 목적의식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그가 현토 역해(譯解)한 경론 14종의 서문과 일러두기, 현토역해문, 기고문, 인터뷰 기사, 그의 법어집 『방산굴어록』 등을 검토했다. 이와 동시에 그가 현토 역해한 경론의 저본과 역경(譯經, 번역)의 문체, 특징, 현토역해의 관점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했다.
탄허가 23년 동안 전통강원의 텍스트이자 한국불교 소의경전 등 14종, 70책을 현토, 역해한 것은 후학양성, 인재 양성 등 교육적인 목적 아래 교재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향후 한국불교와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인재, 전문 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자료용이었다. 도의(道義)와 도덕, 인격을 갖춘 인문학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인 수 있었다.
또 탄허가 현토 역해한 경론들을 조사해 보면 한국불교 소의경전, 전통강원의 텍스트로서, 필수적인 경론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교육)를 알 수 있었다.
번역문체로 볼 때, 탄허 현토 역해본의 번역 문체는 한결 같이 축자역인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일러두기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전문 학자들을 위한 교재용이기 때문이었고, 하나는 의역을 할 경우 번역자의 사견(私見)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오역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고, 전문적인 학자 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축자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해서의 저본(주석서)은 전체적인 뜻을 잘 드러낸 주석서, 선(禪)의 관점에서 해석한 주석서를 택하고 있고, 우리나라 고승들의 주석서(원각경 함허득통 주석, 대승기신론 원효 주석서인 원효소별기)를 택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탄허의 현토역해에 대한 관점, 문체는 직역이요, 축자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토 역해에 대한 그의 원칙론이자 입장이기도 한데, 이는 그가 현토 역해한 『신화엄경합론』,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 역해서들의 서문이나 일러두기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의역을 하게 되면 역자의 견해 즉 사견(私見)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데, 부처님 말씀에 사견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역자의 견해가 들어갈 경우 본뜻을 잘못 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축자역을 택한 것이고, 또 전문적인 인재 양성을 위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문학자들과 경학(經學)을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인들을 위해서는 축자역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탄허의 현토 역해서(譯解書) 가운데 최초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단경』(1960) 서문과 『보조법어』(1963) 小言(일러두기), 그리고 그가 가장 심혈을 쏟은 대표 역해서인 『신화엄경합론』에 서문과 일러두기 등에서 목적이 잘 나온다.
이와 같이 탄허가 자신의 생애에 걸쳐서 상당 기간(44세부터 70세에 열반할 때까지) 『신화엄경합론』 등 전통강원의 교과서와 선어록 등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경론들을 현토 역해한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목적의식이 있었다.
1. 탄허는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훈육에 매진했던 점을 높이 흠모했다. 그는 공자의 제자 교육을 평하여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이라고 했는데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이란 ‘세(世, 1세 30년)’의 개념으로는 적용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사업이라는 뜻이다. 또 탄허는 석존이 성도 후 평생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교화한 점에 대해서도 흠모했다. 탄허는 이 두 선각자의 삶을 귀감으로 삼아서 승려 교육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을 위한 인재 교육에도 매진했다. 그가 『신화엄경합론』, 『능엄경』 등 전통강원의 교과서와 『육조단경』 등 선어록을 현토 역해하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계기 또한 교육적인 목적의 일환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 탄허의 대표적 역해서라고 할 수 있는 현토 역해 『신화엄경합론』은 스승 한암의 유촉이 초기 동기 부여가 되었다. ‘화엄경과 화엄론은 어려운 책이므로 현토라도 해서 간행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한 한암 선사의 말씀이 동기가 되긴 하였으나 탄허가 이 책을 현토의 단계를 뛰어넘어 번역하고 간행한 것은 탄허 자신의 교육적 의지, 역할, 사명감 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능엄경』 등 강원의 교재인 사교와 사집을 현토 역해, 간행한 점을 보아도 탄허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3. 또 탄허는 장래 한국불교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 양성에 큰 뜻이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인재상은 도덕과 인격을 갖춘 군자이자 지혜와 자비로써 삶을 통찰하며 세상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실천궁행적(實踐躬行的)인 리더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동양 3교의 최고봉인 경서에 주목했다. 불교의 『화엄경』과 도가의 『노자도덕경』과 『장자』, 그리고 유가의 『주역(周易, 周易禪解)』 등 도(道, 진리)를 밝힌 경서(經書)를 바탕으로 교육을 해야만 도덕과 인격을 겸비한 동량, 즉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교육 목표를 도덕적 인격 형성과 자비 실천을 통한 사회 계도, 인격적인 면과 아울러 자비로써 사회를 바람직하게 이끌어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4. 탄허가 현토 역해한 불서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경론과 선어록, 전통강원의 교과서에 한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승가 교육적으로 필수적인 경론, 한국불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있는 경론과 선어록 외에는 단 한 권도 손대지 않았다. (『장자』, 『노자』, 『주역선해』는유불도 회통관점에서 현토역해 함). 이상적 인간상인 도의적 인재(승속)들이 배워야할 기본적인 교재라고 판단한 것만 현토역해 했다고 보여진다.
5. 탄허는 국가나 종단의 도움 없이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방대한 경전들을 현토 역해는 물론, 간행까지 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의 현토 역해가 갖는 의의(意義)와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교육과 인재 양성, 경전 현토 역해와 간행으로 회향했는데, 이는 십우도의 마지막 장면인 입전수수(立廛垂手, 중생교화)의 한 양상(樣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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