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불서 언해·사기(私記)와 탄허 현토역해 비교

이상하(한국고전번역연구원 교수)

한국 불교에는 강원의 소위 이력과정이란 것이 있다. 이 교육과정은 사집, 사교, 대교의 세 과가 있고, 각 과마다 교재들이 있어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우리나라의 수행 전통을 떠받쳐왔다. 이 교재들이 한국 불교가 공인해온 기본서로서 오랜 세월 한국 불교의 수행 지침이 되고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교재들에는 각각 사기(私記, 자기가 개인적으로 기록한 주석이란 말로 일종의 謙辭로 쓴 말)가 딸려 있고, 일부는 언해가 있다. 사기와 언해는 우리나라 학승들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경에는 대개 소·초(疏·鈔)가 붙어 있다. 이러한 소·초와 사기를 함께 읽지 않으면 불서의 깊은 뜻을 알기 어렵다.
근래 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유가 경서를 역주하는 사업을 진행하여 과거의 국정교과서라 할 주희(朱熹)의 <<사서집주>>, <<시집전>>, <<서전>>, <<주역전의대전>> 뿐만 아니라 <<근사록>>, <<심경>> 등 성리서들에 이르기까지 경문과 주석을 다 번역하여 이미 출간하였다. 이러한 전적들에는 정주를 비롯한 중국 학자들의 학설은 이미 본부(本注)로 실려 있거니와 퇴율(退栗) 등 우리나라 학자들의 현토와 학설도 참고하고 반영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사서오경을 넘어서 유가 십삼경을 한당 학자들이 주석한 <<십삼경주소>>를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유가 전적들의 번역에는 상세한 주석을 달아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요한 전적은 단순히 한글로 쉽게만 번역해서는 그 깊은 곡절과 함의를 제대로 드러내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근래 탄허 댁성(1913~1983)은 일찍이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언해와 같은 방식으로 많은 불서들을 현토하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탄허의 번역서들은 안타깝게도 한글전용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그 가치가 매몰되어 가고 있다.
신라 때 설총이 유가 경서에 토를 달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 이미 불서도 토를 달아서 읽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구두를 떼어 읽는 것을 넘어 우리말로 풀이를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 등의 승려들이 불경을 언해했다고 하는 것도 불경에 토를 단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불경 고서에는 단순한 토를 넘어서 자행의 좌우에 한문을 우리말의 어순에 맞게 읽을 수 있게 구결을 달아놓은 것들이 보인다. 이를 석독구결(釋讀口訣)이라 한다.
이 석독구결을 이어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 나온 것이 언해이다. 불서 언해는 신미, 학열, 학조 등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한 매우 수준 높은 번역이다. 먼저 <<금강경삼가해언해>>를 <<탄허현토역해금강경>>와 비교하면 그 특징을 잘 나타난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많은 불서가 언해되었다. 그 이후 한동안 언해본의 간행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용성(1864∼1940), 운허(1892~1980) 등이 역경을 시작한 이후로 많은 불서 번역들이 나왔는데, 이 불서들의 번역은 대다수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어 쉬운 한글을 쓰는 데 주력하였다. 용성과 운허는 스스로 이미 쉬운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창했거니와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로서 자주의식이 강하여 우리말인 한글에 애정이 많았다. 그래서 한문 불서의 원의를 손상해 가면서도 되도록이면 한자 어휘를 쓰지 않고 한글로 번역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탄허는 이러한 시대의 변천을 역행하여 언해와 같은 직역투(直譯套)로 불서를 번역하였으며, 오히려 언해보다 더 직역하여 한자를 노출하고 원만한 한자 어휘는 풀이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탄허는 출가하기 이전에 유서를 많이 읽었거니와 그의 부친이 민족종교인 보천교의 핵심간부라 젊은 시절부터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그래서 그는 보천교의 영향을 받아 유·불·선 삼교를 회통하는 사상을 일찍부터 가져왔는데, 특히 <<주역>>을 좋아하여 유가사상에 심취하였다.
게다가 탄허는 강원에서 오래 공부하여 강맥을 이어받은 강백이 아니라 선승이면서 학승이며, 오직 한암 문하에서만 수학하였고 다른 강원에는 간 적이 없다. 한암도 출가 이전에 유서를 많이 읽었다고 알려져 있거니와 그가 금강경 삼가해본에 토를 달아 1937년에 간행한 <<금강반약파라밀경>>의 토는 탄허의 토와 거의 일치한다. 한암의 지시로 탄허가 토를 달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도 있다.
언해의 현토는 우리말로 알기 쉽게 표현하는 쪽을 중시했는데, 한암과 탄허 현토는 정확한 문리를 전달하는 데 치중했다. 이 점이 탄허 현토역해가 다른 불서 토석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이다.
탄허는 전문 학인을 위한 교재를 만들고, 나아가 전 국민들이 읽을 수 있는 교재를 만들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익히 공부했고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유가 토로 불서에 토를 달았으며, 사기의 주석도 꼭 필요한 곳에만 채택하여 간약하게 주로 달고, 자기 견해를 주로 달기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과거 <<십지경론>>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책은 <<화엄경>> <십지품>에 대한 논서이기에 <<화엄경>> 번역본을 참고하고자 찾아보았더니, 용성, 운허, 탄허의 번역서들이 있었다. 용성과 운허의 번역은 대중화를 위해 쉬운 한글로 번역한 것이었고 탄허의 번역은 구결을 달고 언해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용성과 운허의 번역은 도무지 읽어서 문맥을 파악할 수 없고 한문을 쉬운 한글로 바꾸려 애썼다는 것은 알 수 있겠으나 중요한 어휘들은 자의적으로 풀어써놓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웠다. 글이 아니라 숫제 말이 되어버렸고 정작 불서를 읽고 연구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거의 쓸모없는 번역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탄허의 번역은 오히려 문맥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한자 지식이 조금 있는 사람이면 사전을 참고해 가며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연구자에게 꼭 맞는 번역을 한 것이다. 한문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에 이르러 탄허 역해는 과거와 현대를 잇는 튼튼한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능화(李能和)는 강원에서 사기가 없으면 불서를 읽을 수 없다고 개탄하였고 명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이지(李贄)는 “<<대혜서장>>은 가장 읽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보조 지눌 이후 선문에서 가장 중시해온 <<대혜서장>>의 언해가 없는 것은 그 글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불서 뿐 아니라 불서가 인용된 한문은 오역이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었다. 이제 사교입선하여 敎·禪을 아울러 공부하던 우리 전통의 우수한 불교는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의 책임이니, 이제라도 서둘러 기본 불서들부터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게 정리 번역할 일이 시급한 과제이다.
한문 불서 번역은 외국 서적을 번역하는 것과 다르니, 한문고전과 불서를 섭렵하여 축적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현대의 언어로 한문을 적당히 환치하여 당장에 읽기만 쉽도록 번역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한문에 비해 현재 사용하는 우리 국어의 어휘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우리말과 한문은 문법과 어순이 서로 달라 직역과 의역이 매우 다른 형태의 글이 될 수 있으므로 뜻만 전달하는 의역만으로는 한문에 일정한 소양을 갖춘 연구자 내지 지식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과거 우리나라 강원에서 사용된 교재 및 주요 불서들을 선정하여 전통문화연회의 유서역주 체례를 참고하되, 직역에 의역을 가미하고 언해와 사기를 참고하여 충실한 주석을 달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언해를 정리하고 많은 종의 사기 중에서 선본을 선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개 탄허의 번역과 같은 직역은 초벌 단계의 쉬운 번역이고, 말과 문맥을 바꾸어 알기 쉽도록 의역하는 것이 더 발전한 번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단어가 어려울 경우에는 독자가 사전을 찾거나 자료를 검색하면 힘은 들겠지만 알 수는 있지만, 번역문의 문맥과 어휘가 정확하지 못하면 알래야 알 길이 없게 되고 만다.
우리의 문화재를 잃으면 우리 후손의 책임이듯이 불서의 언해와 사기 같은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을 잘 전승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우리의 죄가 된다. 세계화 시대에서 문화강국이 되려면 먼저 동양고전 연구가 중국과 일본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 불서는 중요한 동양고전이며, 또한 우리 고전이다.
지금 한문고전 대중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렇지만 대중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글로 써서 쉽게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 글뜻까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대화가 우리보다 훨씬 빠른 일본이 아직도 옛날 방식인 훈점과 훈독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그러한 방법으로 고전을 정리 번역하는 것이 비록 대중화에는 미흡할지 몰라 한문의 문리와 깊은 함의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 오독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언해 및 탄허의 현토역해가 지향한 목적도 바로 이와 같은 데 있는 것이다.
일본은 훈점과 훈독이라는 직접적이고 간결한 수단으로 한문고전을 정리하여 <<신수대장경>>, <<한문대계>> 등 방대한 전적을 체계적으로 정리 내지 번역할 수 있었고, 그 바탕 위에서 <<대한화사전>>, <<망월대사전>>, <<선학대사전>>과 같은 방대하고 정확한 사전을 편찬하여 일찌감치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서 동아시아 학술을 주도할 수 있었다.




언어 지시기능 극대화 대중 이해 돕고 현토 언해 계승 발전




불교 서적 구결·현토의 역사와 탄허 현토

심경호(고려대학교 교수)


중국 경학의 역사는 한국 내의 불전과 유가 경전의 해석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내전과 외전의 이해는 한문의 문맥의 이해에서 출발하며, 한문 문맥의 이해는 단구와 구독에서부터 시작한다. 한국의 경우 단구(斷句)는 이미 목간(木簡)의 서사에도 나타났다. 고려시대의 불경에는 각필(角筆)에 의한 석독구결(釋讀口訣) 부호들이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주해󰡕 권3 「예전」에서 정의하였듯이, 글을 이루고 말이 끊기는 곳을 구라 하고 말이 끝나는 곳에 점을 찍어 구분하여 글을 읽거나 외우는 데 편하게 하는 것을 독라 한다. 구두를 기호로 표시하는 것이 현토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맥을 자국의 언어로 환치하는 것을 언해라고 하였다.
한문의 구독(句讀)와 언해는 한문 문맥을 온전하게 파악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문 문맥의 온전한 파악은 한문 시문의 제 형식에 통달해 있을 때 가능하다. 현대에 있어서도 한문의 내전과 외전을 단구하고 번역하려면 역시 그러한 조건이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탄허 스님은 21세에 오대산에 입산한지 5년만인 1939년 중추 하순, 26세의 나이에 「사자산법흥사법당중건상량문(獅子山法興寺法堂重建上梁文)」을 지었다. 변려문(騈儷文)과 육위송(六偉頌)으로 구성된 상량문을 짓는 일은 한문 제술이 한 인물의 공부를 드러내는 지표였던 조선시대에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탄허 스님의 한문은 입산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에서는 구결을 사용하여 한문을 독해하는 방식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이미 전통을 이루었다. 불경은 처음에 각자의 구결을 이용하여 석독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자료는 1973년 12월에 충남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복장물인 󰡔구역인왕경󰡕(1346년 이전 인쇄, 낙장 5매)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2000년 7월 초에는 일본 학자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씨가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초조대장경(11세기 초) 󰡔유가사지론󰡕 권8의 500행 가량에서 각필 점토구결(부호구결) 자료를 확인하였다. 점토구결은 점과 선의 위치에 따라 우리말 형태소와 대응한다. 일본에 있는 󰡔화엄문의요결문답󰡕 등에는 통일신라(계통)의 점토구결로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시대의 구결은 음독구결, 석독구결, 점토구결(符號口訣)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점토구결이지만 붓으로 음독구결을 표시한 자료도 발견되었다.
한국의 음독구결과 석독구결은 正史나 일반 서적에 구두를 표기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서 󰡔일본서기󰡕 관련의 훈점 자료가 상당수 남아 있는 것과 사정이 다르다. 또한 각필구결은 화엄경 계통과 유가사지론 계통의 두 가지 점토로 나뉜다. 이 두 계통은 점토의 개수나 위치, 형태가 아주 다르다. 또 각 계통 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고려말 이래로 여러 학자들은 유가 서적에 현토를 시도하였다. 1398년(태조 7) 10월 태조가 사서를 열람하려고 하자, 지경연사 하륜과 겸대사헌 조박이 사서를 점절하여 진헌하였다고 한다. 점절(點節)은 단구(斷句)를 뜻하는 듯하지만 곧 점토구결을 뜻할 수도 있다.
훈민정음 전후로 한문 독해는 불경과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이루지면서 독해 방법은 다양해졌다. 한문 원전을 언해하거나, 한문 원전에 현토하며, 혹은 토석하는 방법으로 한문을 독해하였다. 현토는 한글 창제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경연이나 서연에서 강독하는 서적에 대부분 붓으로 현토하였다. 오늘날 󰡔육선공주의󰡕의 갑신자본(戊申字本 1732년, 英祖 8년)과 임진자본(정조 연간)에 현토가 붓으로 적혀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 초에는 한문을 번역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직해’를 시도하였다. ‘직해’의 방법과 관련된 문헌으로 󰡔대명률직해󰡕와 󰡔직해소학󰡕이 있다. 이 두 문헌의 ‘직해’는 방식은 서로 조금 다르지만, 문언어법의 한문을 알기 쉽게 풀어쓰려고 시도한 점은 같다.
15세기 중반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한자음과 한문의 정음 번역이 활발하게 되었다. 1449년(세종 31)에는 왕명으로 󰡔홍무정운역훈󰡕이 이루어졌다. 역훈이란 한자에 대해 우리말 발음을 표시하는 것을 뜻하였다. 한편 언해란 말은 1510년대 문헌에 처음 나타나고 1588년의 󰡔소학언해󰡕에서 처음으로 서명에 등장하였다. 언해는 석 혹은 번역이라고도 하였다. 이때 석은 한문의 훈독을 의미한다. 단, 󰡔경민편언해󰡕의 예에서 나타나듯, 이두로 구결만 단 것도 포함한다. 언해본은 대개 한글 현토의 한문 본문을 앞세운 후 한글 번역문을 싣는 체제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연산군 때에 이르는 50여 년간 간행된 정음 문헌은 40여 건이 전하는데, 그 가운데는 불서의 정음 문헌이 가장 많았다.
성종은 재위 12년인 1481년 가을에 두시집의 언해령을 내렸다. 그 첫 원고가 그해 겨울에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인쇄한 것이 󰡔分類杜工部詩諺解󰡕(약칭 󰡔두시언해󰡕)이다. 󰡔두시언해󰡕의 주 편찬자는 유윤겸으로, 그는 승려 의침에게서 두시를 배운 유방선의 아들이다. 김흔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고려하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일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 한글은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왕과 왕실도 언해본을 편찬하고 교육에 이용하였다. 즉, 1746년(영조 22) 3월 영조는 왕세자에게 교훈을 주고 스스로를 반성할 목적에서, 독서와 생활을 통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모아 󰡔어제자성편󰡕을 엮고 정유자로 간행하였다. 한문본은 언해되어, 󰡔어제자성편언해󰡕가 장서각에 있다. 또한 영조는 󰡔어제상훈언해󰡕, 󰡔어제훈서언해󰡕, 󰡔어제경민음󰡕, 󰡔어제백행원󰡕, 󰡔어제경세문답언해󰡕 등 언해본 훈요 및 정론서를 제작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고전시문집의 선집을 언해한 것, 한문 간찰이나 문집, 행장, 묘도문자를 언해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대개 궁중이 집안에서 여성들이 공람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듯하다. 그리고 실용서를 언해한 것도 적지 않게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사역원 교재와 의서 등 실용적인 서적을 언해하였다. 조선 왕조는 통역 및 변역에 관한 사무를 맡은 관청으로 사역원을 두었는데, 여기에는 한학(중국어학), 몽학(몽고어학), 여진학(여진어학), 왜학(일본어학)의 사학이 있었다. 여진어학은 17세기에 청학(=만주어학)으로 변경되었다. 이들 사학(四學) 관련 언해서가 여럿 나왔다.
조선시대의 언해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 경서의 언해이다. 세종은 경서의 현토와 언해에 깊은 관심을 두어, 1448년(세종 30)에 김문에게 사서의 언문 번역을 명하였지만, 사서언해는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완결된다.
17세기 초부터 사서삼경의 언해본은 감영이나 사원에서 널리 각판되어 인출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는 사서 언해본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각한 궁유한사본이 나왔다. 이 책은 한문 원문을 대폭 생략하고 원문에 붙어있던 한자음이나 방점을 판각하지 않았다.
조선후기에는 중국문언소설이나 백화어 소설, 그리고 희곡 대본을 언해하되, 거의 번안하기까지 하였다.
1461년(세조 7) 6월부터 1471년(성종 2)까지 간경도감에서는 불서 언해본과 정음 문서를 상당수 간행하였다. 간경도감은 중앙에 본사를 두고 개성․상주․전주․남원․안동․진주 등에 분사를 두었다.
성종 이후로는 자성대왕대비 윤씨가 불서 언해 사업을 주도하였다. 자성대비는 선덕 학조(學祖)로 하여금 이미 번역되어 있던 󰡔금강경삼가해󰡕를 교감케 하고 󰡔남명천계송󰡕을 번역하게 해서 1482년(성종 13)에 각각 300부 와 500부를 인쇄토록 하였다.
그 둘은 세종이 동궁 이향(李珦 : 文宗)과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보상절󰡕의 마지막에 번역해 넣으라고 한 것이었으나 󰡔금강경삼가해󰡕는 일부만 번역되었다. 󰡔남명천계송언해󰡕는 세종이 직접 30여 수를 번역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김수온이 인수대비 한씨(성종의 모후)의 후원으로, 1495년(연산군 원년)에는 학조가 정현대비 윤씨(성종의 계비)의 후원으로 간경 불사를 일으켰다. 김수온의 발문을 지닌 언해 불서로는 󰡔원각경언해󰡕와 󰡔몽산법어언해󰡕가 있다. 학조의 발문을 지닌 인경목활자본(인수대비와 정현대비가 만든 활자로 찍은 책)으로는 󰡔영가집언해󰡕․󰡔금강경언해󰡕․󰡔반야심경언해󰡕가 있다. 학조는 이미 1485년(성종 16)에 인수대비의 후원으로 󰡔오대진언󰡕과 󰡔영험약초󰡕(본래 합철), 󰡔불정심다라니경언해󰡕를 간행한 바 있다. 1496년(연산군 2)에는 󰡔육조법보단경언해󰡕․󰡔진언권공언해󰡕․󰡔삼단시식문언해󰡕 등을 인경목활자로 인출하였다.
탄허 스님은 불경과 서장 등을 현토허고 번역할 때 많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작업의 방식은 명확히 기록되어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불경을 언해할 때 중국에서 범어불경을 한역할 때와 유사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던 듯한데, 탄허 스님의 경우도 그러한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없다.
15세기 불경의 언해는 한문 문장에 구결을 정하고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언해의 과정도 범어불경의 한역 작업처럼 몇 단계를 거쳐야 하였다. 다만, 간경도감 등 공식 기구에서의 언해 의식을 다룬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탄허 스님의 현토‧번역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탄허 스님은 한국의 공안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혜종고의 󰡔서상󰡕을 현토‧번역하였다. 대혜종고의 󰡔서상󰡕을 탄허 스님이 현토‧번역한 것은 언어의 지시기능을 극대화하여 원문을 알기 쉽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간결한 평어를 덧붙여서 주지를 적시하여 대중의 이해를 크게 돕고 있다. 이것은 종래의 현토, 언해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통현화엄(通玄華嚴)과 청량화엄(淸凉華嚴)에 대한 탄허의 관점

문광(동국대 불교학술원 외래교수)

탄허는 ‘동양사상의 진수는 화엄사상뿐’이며 ‘요의경 역시 󰡔화엄경󰡕 뿐’이라고 했다. 다른 경전은 화엄학에 끌고 가기 위한 방편적인 학설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탄허는 화엄경만이 유일한 요의경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천태 지의(天台 智顗 538-597)의 오시교판(五時敎判)을 채택하여 설명한다. 탄허의 교판론이 특이한 것은 이통현의 십종십교나 현수 법장(643-712)의 오교십종판을 모두 수용하지 않고 천태 오시교판의 전체적인 구도만을 활용하여 오직 󰡔화엄경󰡕만이 수승한 최고의 경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탄허는 화엄학은 대학원 학설에 해당하고, 요의경은 󰡔화엄경󰡕 하나밖에 없으며 나머지 전부는 불요의경으로 본다. 화엄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49년 설법이 존재했으니 화엄학은 법신의 설법이고 나머지 모든 팔만대장경은 화신의 설법이라고 했다. 탄허의 교판론은 한 마디로 팔만대장경은 󰡔화엄경󰡕과 󰡔화엄경󰡕의 여집합(餘集合)으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탄허의 사상은 기존의 교상판석에 입각해서 볼 때엔 다소 레디컬한 입론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탄허 화엄의 특징이다.
탄허는 화엄학 이하에서는 말세중생은 성불 못 한다는 말이 있지만 최고학설 화엄학에 가서는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화엄경󰡕이 최고 학설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화엄경󰡕의 여성성불론을 거론하며 󰡔법화경󰡕과의 차이를 변별한다.
탄허는 스승 한암의 회상에서 󰡔보조법어󰡕의 「원돈성불론」을 먼저 본 상태에서 대중들이 󰡔통현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화엄경󰡕 경문과 함께 매일 읽어 11개월 만에 독파했다고 한다.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된다고 했던 󰡔통현론󰡕을 읽은 다음부터 탄허의 화엄사상은 이를 토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통현론󰡕의 현토만이라고 해 달라는 한암의 부촉으로 기나긴 화엄역경의 불사는 시작되었는데, 그가 󰡔화엄경󰡕을 번역한 원칙은 󰡔통현론󰡕을 正으로 하고 󰡔청량소󰡕를 助로 하는 것(方山爲正, 淸凉爲助)이었다.
탄허는 청량과 통현의 차이를 퇴계와 율곡의 차이와 배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불교나 유교 어느 한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만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뜻이 통하여 종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회통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사의 문제를 유교의 이기의 문제로 분석하고 있다.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놓고 볼 때 입도의 시기에는 율곡의 이론이 명쾌하여 이기론에 대한 명확한 종지가 선다. 차후에 융섭하여 볼 수 있을 때가 되면 퇴계가 ‘이발(理發)’을 통해서 그가 전하고자 한 의미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입도의 시기에는 통현의 성기의 입론을 통해 분명하고 명확한 이해를 한 뒤 융통하여 볼 수 있을 때 청량의 연기의 입론도 좋음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엄학의 종지가 일거에 드러나는 것은 역시 󰡔통현론󰡕이라는 것이다. 탄허는 이렇듯 청량-통현의 화엄학을 퇴계-율곡의 성리학과 회통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탄허의 화엄학에서 통현-보조-한암-탄허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보조는 이통현의 󰡔화엄론󰡕 40권을 3권의 󰡔화엄론절요󰡕로 요약하고 󰡔원돈성불론󰡕을 지어 선엄일치(禪嚴一致)의 화엄선을 주창함으로써 사교입선의 사교 대신에 선교회통의 대원칙을 제시했다. 한암은 보조의 사상을 현대에 계승하여 󰡔보조법어󰡕를 찬집·현토하여 탄허로 하여금 번역하게 하고, 󰡔통현론󰡕의 현토를 부촉하여 󰡔신화엄경합론󰡕의 현토역해를 견인했다. 탄허는 스승 한암의 법맥을 이어 보조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고, 자신의 처소를 이통현을 따라 ‘방산굴’이라 명명하고 󰡔통현론󰡕을 중심으로 󰡔화엄경󰡕을 완역했다.
탄허 화엄사상의 일단은 그가 󰡔화엄경󰡕은 일승경전이며 유일한 요의경이라고 강조했던 것은 그의 사상의 중요한 한 측면을 구성한다. 게다가 그가 이통현의 󰡔화엄론󰡕을 최초로 원문과 함께 현토완역하고, 󰡔청량소󰡕보다 중시했던 것은 보조와 한암을 계승한 것으로 한국화엄사상사의 한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탄허는 단순히 그들의 사상을 계승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사로서의 정체성과 회통사상이라는 커다란 기획속에서 융회하고 있다. 성기(性起)를 강조하여 󰡔통현론󰡕을 중시했지만 사사무애와 같은 법계연기 또한 중시하여 노장학과 회통하는 등 다채롭게 화엄을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가 ‘사사무애법계도리 역시 임제 제3구에 불과하다’고 했던 것은 그의 화엄사상의 정점을 찍은 언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화엄을 보는 관점이 이 언명에 모두 드러난다. 그가 법계연기보다 법성성기를 강조했던 근본 원인은 그의 사상의 근본바탕이 선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한 “宗旨가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라고 했던 그 핵심종지는 바로 禪이었던 것이다.
탄허가 대전 학하리의 자광사를 창건한 것은 이곳을 미래 도의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어 삼교회통을 바탕으로 한 동양학의 응집처로 발전시킨 화엄대학원을 설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엄대학원의 설립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탄허의 화엄불사는 본래 그 성격이 有形에 있지는 않았다. 탄허가 󰡔화엄경󰡕을 번역하던 장소인 방산굴의 주련은 탄허의 가풍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이를 그의 ‘선적 화엄’이라 해도 좋을 것이요 ‘성기불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탄허의 모든 불사는 ‘공화불사(空華佛事)’를 지은 것이다. 허공 꽃과 같은 불사란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는 불사이며, 불사를 해도 한 바가 없고 이루어진 바가 없는 완전한 무아 세계의 불사이다. 성기무애의 불사이자 해탈열반의 적정세계였다. 그래서 탄허의 역경과 불사는 ‘공화불사’이자 ‘공화결사’였다. 실체가 없는 완전한 무아의 결사요 성기의 결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선사라고 자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탄허의 일생은 역경과 교육으로 일관되고 불사와 결사로 관통한 일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평생의 모든 공화불사는 실화결사(實華結社)로써 무진의 법계에 이생상도(利生常道)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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