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상절』은, 1446년 세종의 妃 소헌왕후가 훙거한 후(1446. 3. 24.), 수양대군이 부왕인 세종의 명을 받들어 편찬을 시작,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이용하여 그 이듬해인 1447년 7월 25일경에 원고를 완성하고, 1448년 연간에는 전체 24권을 모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가 24권으로 구성·간행되었으나, 현재는 그중에서 열권만이 전해지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1) 이 책은 그동안 이동림(1959), 김영배(1972, 1986,2009), 천병식(1985), 세종대왕기념사업회(1991, 2012) 등에서 불교에 조예가 깊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주해(역주)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는 석보상절이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중세국어 자료이므로 내용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석보상절』은 석가의 일대기로, 왕후의 명목을 빈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숭유억불을 국시로 하던 조선사회의 관점으로는 반국시적인 사업이며, 그럼에도 이것이 군왕과 왕실의 권면·후원으로 경전 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고유어와 외래적인 요소의 동국정운 한자음과 외국어까지 모두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 문자체계로써 우리나라의 언어문화적, 불교문화적 역량을 결집 해 국보급 문화재를 제작해낸 것이다.

이 책은 왕자(수양대군)가 부왕(세종)의 명으로 당시 고승대덕의 자문을 받고 여러 불경에서 관련 내용을 뽑아 조성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다시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번역해 만든 한글불교경전이다.

전거가 분명한 여러 佛典들을 모아 기획 의도에 맞추어 한 문 불전인 『석보상절』을 만들고, 이를 다시 표준화된 훈민정음 표기법에 따라 ‘正音’으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석보상절서>와 <어제월인석보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연과(因緣果) 의 원리에서 왕(세종)과 왕자(수양대군)가 이 문헌 조성의 주체가 되어 있다. 이것이 완성되자, 세종은 이를 열람하고 바로 「月印千江之曲」이라는 한국적 운문불경을 제작한다. 그리 고 그 10여 년 후에 이 두 문헌을 합편해 한글대장경이라 일컬을 만한 『月印釋譜』를 편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전 불사의 핵심적 기반은 바로 이 『釋譜詳節』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반포 후 한국 고유어, 개신 한자음(동국정운 한자음), 외국 어(중국어)의 훈민정음 표기법을 만들어 적용한 최초의 어문규범집이자 용례집이다. 이 석보상절 제작이 외국어의 한글 표기법을 추가 제정하게 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따라서 석보상절은 ‘훈민정음’ 문자문화의 교육자료로서, 국어교육적인 활용 가치가 대단히 많은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석보상절은 스토리텔링에 기여할 만한 풍부한 불교문화 콘텐츠를 보유한 책이라는 것이다.

『석보상절』은 우리나라에서 조성한 전혀 새로운 버전의 석가의 일대기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자유로운 번역, 풍부한 협주, 그리고 우리나라 문자인 ‘훈민정음’을 이용한 한 국적 불교경전의 조성 등 실로 다양한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불교문화사적 전통을 계승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석보상절에 들어 있는 불교용어의 주석(협주)은 오늘날의 불교용어사전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불교용어를 일관성 있게 주석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조선의 불교학사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 는 1459년 월인석보에 가면 그 분량이 대폭적으로 증가하며, 이것만 모아놓아도 수준 높은 불교용어사전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분량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석보상절은 금속활자를 제작해 간행된 책으로서,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한국 출판문화사적 가치를 한껏 드높인 책이다. 거기에 숭고미·엄숙미의 서체미를 보여주는 전서체의 훈민정음 동활자 제작은 문자발달사적 도약을 가져오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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