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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수행 아닌 깨달음이다- 2
2018년 10월 01일 (월) 11:01:05 김태완(무심선원장) budjn2009@gmail.com

 
중국 선종의 실질적인 개창자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이다. 혜능은 수행법에 대하여 어떤 입장일까? <육조단경>에 보면 황제가 파견한 설간이라는 사신이 혜능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서울에 있는 선승들은 모두 말하기를 ‘도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좌선하여 선정을 익혀야 한다. 선정으로 말미암지 않고 해탈을 얻은 자는 아직 없었다.’라고 하는데, 스님이 말씀하시는 법은 어떻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혜능은 이렇게 답한다. “도는 마음에서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는 것에 있겠습니까? <금강경>에서 ‘만약 여래가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깨달음도 없는데, 하물며 앉겠습니까?”

이에 설간은 밝은 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했는데, 혜능은 이렇게 답했다. “도에는 밝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밝고 어두움은 서로 상대하여 세운 이름입니다. <유마경>에서는 ‘법은 비교할 것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간이 다시 물었다. “밝음은 지혜를 비유하고, 어둠은 번뇌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수지 않는다면, 끝없는 생사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혜능이 답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순다고 한다면, 이것은 소승(小乘)의 견해로서 양이나 염소처럼 하근기입니다. 지혜가 뛰어난 상근기라면, 전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설간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밝음과 밝지 않음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에 둘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둘 없는 자성이 바로 진실한 자성입니다. 진실한 자성은 어리석은 범부라고 줄어들지도 않고 현명한 성인이라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 속에서도 고요하지 않습니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고 안이나 바깥에 있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아 늘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일컬어 도라고 합니다. 당신이 만약 마음의 요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모든 좋으니 나쁘니 하는 분별을 전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깨끗한 마음바탕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바탕은 맑고 늘 고요하면서도 묘한 작용이 끝이 없습니다.”

설간은 이 말을 듣고서 문득 크게 깨달았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선(禪)은 어떤 수행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선지식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서 문득 깨닫는 것이다. 혜능도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서 깨달음을 경험하였고 오조의 설법을 듣고서 다시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좌선수행에 대한 혜능의 비판은 <육조단경>에 여러 곳 등장한다.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마치 사리불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에게 꾸중을 들은 것과 같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아야 하니 이로 말미암아 공부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있다면, 이것은 곧 캄캄한 공(空)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북종신수의 제자가 신수는 늘 대중에게 “마음을 쉬어 고요함을 보고,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서 혜능은 말했다. “마음을 쉬어 고요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항상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라. 살아 있을 때에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를 못하네./ 더러운 냄새나는 육신을 한결같이 붙잡고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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