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 스님 근영


남산 정일 (南山正日, 1932~2004) 선사께서는 선학원 제15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 당호는 남산(南山)이고, 출가 전의 속명은 ‘이득(二得)’을 쓰셨다. 서울 은평구에서 1932년 음력 2월에 출생, 1956년에 조계사에서 득도 이후, 1963년에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 후 10여 년간 전강(田岡)스님 문하에서 수학하셨다. 1992년부터 2003년 사이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 법주사 궁현당에서 세수 73세 법랍 47세 되던 2004년 11월 스님께서는 홀연히 입적하셨다.

<법어록>(비움과 소통, 2013)의 행장기에 의하면 스님께서는 출가 전 여덟 살 되던 해,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의 눈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소년 이득(二得)은 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발견한다. 바로 <선가귀감>이다. 소년은 뜻도 모르면서도 수십 번이나 거듭 읽고 또 읽었다. 생사초월의 뜻을 가슴 속에 늘 품고 있던 차 친척의 권유로 조계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당시 조계사에서 원주 소임을 맡으셨던 범행(梵行) 스님은 총무원장 태전 금오(太田金烏) 선사에게 인도하였고, 이에 금오 선사를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수계, 1963년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게 된다.

<선가귀감>은 서산 스님께서 선법의 종지를 드러내어, 선 수생의 요긴한 점과 5가의 종풍을 제시하며 수행자가 거울 삼아 스스로를 경책하도록 만든 선가(禪家)의 보물이다. 정일스님께서는 불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 적이 있다.

<팔만대장경>과 선사의 어록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간추려 적고 휴정 스님이 직접 주해를 달고 평하여, <선가귀감>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들은 번뇌 망상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참선을 해도 어떤 망상이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선가귀감>의 사상이 항상 머리에서 돌아간다면 자기를 올바로 경책하게 되므로 자기 마음을 밝히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알아야겠다는 그 신심(信心)이 놓쳐지지 않게 됩니다.

단편적인 기록으로 고서점이 어떤 서적을 취급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소년 이득(二得)이 읽었던 판본은 고가(高價)의 판본이라기보다, 필사본(혹은 대여 세책)이나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나온 선학원 간행의 전적을 탐독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볼 뿐이다. (1948년 선학원 ‘한글 선학간행회’에서는 한글 선적1호로 200쪽 분량의 판본을 펴낸 적 있다. 이 때의 책이름은 <선가구감>이다.)

스님께서는 1960년 망월사에서 안거 성만 이후, 1963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 전강(田岡) 선사 문하에서 약 10년간 참구 정진하셨다. 범어사, 용화사, 동도사 등지에서 참구정진하셨고, 백련사 주지 소임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1974년부터 2004년까지 보광사 주지를 맡으셨다. 이어서 1983년에 선학원 주지 및 1991년에 재단법인 심무회 이사를 맡으셨고 1992년에 법주사 주지에 취임하셨다.

보광선원을 개설하여 조실로 주석하시던 중 1992년 12월 22일, 재단법인 선학원 제15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셨다. 스님께서 선학원 이사장으로 주석하시던 1995년, 조계종의 ‘선학원대책특별위원회’는 선학원 법인 정관변경을 요구한다. 이에 스님께서는 ‘94년 전국 분원장회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관개정 요구를 거부하셨고, ’95년 전국 분원장 회의를 통해 독자노선을 결의하셨다. 그 결과 이듬해에 ‘96년 조계종 총무원장과 선학원 이사장의 공동합의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종무직 취임, 승려자격, 교육기회 등의 이른바 3개 사항에 대한 제한조치가 ‘98년에 시행되어, 결국 ’96년에 결정했던 양측의 합의사항이 무산되었다. 이에 도제 스님들의 교육을 위해 정일 스님께서는 ‘99년 4월에 도제장학금을 지급하기로 결의하셨다.

전국분원장 회의를 열어 자구책으로 자체 도제교육의 실시와 계단설치에 대해 논의, 2000년 3월에 서울 우이동 보광사에서 행자교육원을 개원하는 한편, 같은 해 3월과 11월에 구족계 수계산림을 선학원에서는 봉행하였다. ’02년에 선학원 이사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의 6개항 합의안이 도출되어, 양측이 서명하면서 법인법 논의는 일단락이 되었다.

스님께서는 평소 포교와 선수행의 일치를 강조하신 바, 부처님의 선법을 부단히 닦으시고 몸소 포교의 겸행으로써 평상심의 법으로 대중을 제접하셨다.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상실하여 번뇌 망상에 시달리며 그것을 자신의 본체로 삼아 사는 중생들을 일깨우고자 애쓰셨다. 혼란을 일으키는 번뇌 망상을 어찌 정화해야 할까? 이 점에 대해 스님께서는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드신 적 있다.

‘번뇌망상은 눈에 들어가면 눈병이 되고, 입에 들어가면 단박에 배탈이 나는 탁한 청계천 물처럼 어지럽게 작용합니다. 이것을 참선법으로 정화시켜야 합니다. 더러운 물을 깨끗하고 순수한 증류수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증류수는 눈에 넣어도 좋고, 혈관에 넣어도 안전하고, 근육주사를 놓아도 말썽이 없습니다. 선문(禪門)에 들어 자신을 정화한다는 것은 마치 탁한 물을 증류수로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유가 이와 같을 진데,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스님의 견해는 과연 어떠할까 자못 궁금해진다. <법어록>을 살펴보면, ‘여래선 가운데서 조사선을 쓰는 것이며, 여래선과 조사선은 둘이 아니어서 조사선은 허공인(虛空印)과 같고 여래선은 수인(水印)과 같다’고 강조하셨다. 달리 풀이하여 조사선의 도리를 방편으로 놓은 것이 여래선 도리인데, ‘여래선은 평등지(平等知)가 되고 조사선은 차별지(差別知)’, ‘조사선은 직설(直說)이고 여래선은 방편설(方便說)’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둘이 서로 다른 것도 어느 하나가 경지가 낮은 것도 아님을 강설하셨다.

스님께서는 수행과 포교가 둘이 아님을 늘 강조하셨고 수좌를 제접하시며 숱하게 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전강스님과 법거래 나누시던 생사여탈의 선문답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님께서 범어사에서 본격적인 화두를 참구하던 중이었다. ‘새벽종송’의 장엄염불 가운데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대목의 본 뜻을 얻었고, 같은 날 오후 중단 불공 시, ‘약찬게’ 가운데 ‘육육육사급여삼(六六六四及與三)’의 뜻을 확연히 얻었다. 올바른 견처(見處)인지 용화사로 가서 전강스님을 친견하니, ‘입야타 불야타(入也打不也打)’ 공안을 물으셨다. 정일스님께서 걸망을 지고 원 안으로 들어가시는 시늉을 하였다.

전강스님께서는 주장자로 어깨를 한 번 치시니, 이에 정일스님은 “무엇을 치셨습니까?”라 하였고, 전강스님께서는 재차 주장자를 치셨다. 정일 스님께서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니 전강 선사께서 다시 치셨다. 이어 전강스님께서 방법을 바꾸어 “의리(義理)로 일러보소”라 이르니, 정일 스님은 잠자코 있었다. 이 문답을 계기로 정일스님은 화두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강스님께서 범어사 조실로 부임하시게 되어 자연히 범어사에 계속 머무시게 되었고 1963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것을 포함하여 범어사에서 3년, 인천 용화사에서 3년, 수원 용주사에서 3년 등, 전강스님 문하에서만 약 10년간을 참구에 매진하셨다. 이후 화엄사 내 구층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정진 후, 해인사 선원장을 거쳐 통도사 극락암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 공부 도중 스님께서는 열반의 도리에 계합(契合)하셨다.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極貧者喜歡帶露的蘆葦叢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渾然間一縷始光透過整個大地
만년 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萬年前事佛已涅槃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霧雨下着霧雨下着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最後如告別時的傷痛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느냐? 對前人未踏之地掛念呼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到靜靜地泛着水波的小溪去洗一把臉吧

- 남산 정일 대선사 오도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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