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근현대 불교의 사상과 의례를 집중 조명하는 ‘한중 불교학술교류회의’가 한국선학회 주관으로 연세대학교 문과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지난달 23일부터 27일까지 열렸다.

한중 학술회의는 ‘근현대불교동향’을 진단하며 ‘항일전쟁 기간 일·중 불교계의 전쟁태도 비교’(赵文洪 연구원, 중국)의 기조발표에 이어 ‘조선의 근현대 불교관계 법령과 선교 강학 전통’(연세대 신규탁 교수)와 ‘북양정부 초기의 불교정책 및 사원관리 잠정규’(纪华传 중국) ‘티베트불교 밀종 수학의 구성과 체계’(尕藏加 연구원) 발표로 이어졌다.

이어 ‘성철 선사상’에 대해 ‘성철선사의 돈오돈수와 중국 선학의 한국화’(魏道儒 교수), ‘한국 현대 불교의 법맥과 성철선사’(胡静 교수), ‘성철선사의 간화선법’(오용석 교수), ‘성철 찬, <백일법문>의 핵심 철학’(차차석 교수) ‘퇴옹성철의 <임제록> 강설과 해인총림’(박인석 교수)가 발표됐다.

한국 불교 근현대 ‘의례’에 대해 ‘한국불교의례의 실태와 과제 및 그 해법의 실상’(이성운 교수) ‘현행 한국 수륙재의 양상과 특징’(석법안 교수) ‘한국 현대 불교음악의 흐름과 반추’(윤소희 교수) ‘동진(東晉) 선비들의 불교 봉행 내용과 의식’(하덕미 교수) 등이 발표됐다.

선학회 한중 국제학술회의는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와 중국 북경사회과학원이 공동주최하고 (재)백련불교문화재단과 (사)어산작법보존회가 공동 후원했다.



[근현대 불교 동향]

종교 이용 침략 홍보, 승려들 가사걸치고 염주 쥐고 살인


항일전쟁 기간 일·중불교계의 전쟁태도 비교

赵文洪(중국사회과학원 세계종교연구소)


1930-1940년대의 항일전쟁은 일본 쪽에 있어서는 정의롭지 못한 침략 전쟁이고, 중국 쪽에 있어서는 정의로운 반(反)침략 전쟁이다. 이 전쟁에 대해 일·중 양국(일본을 앞에 배치한 이유는 이 전쟁은 일본이 먼저 발기한 것이므로, 전쟁에 대한 태도 역시 중국인보다 일본인이 먼저 갖고 있기 때문이다)의 불교계는 모두 명확한 태도가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양국의 태도가 매우 유사하나, 내용으로 보면 사악함(邪)과 정의로움이 대립되고, 마도(魔道)와 정도(正道)의 구분이 뚜렷하다.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杀生)을 주장한다. 불교의 계율에서 살생을 금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반드시 살생하게 된다. 일·중 양국 불교계의 승려들은 모두 전쟁을 지지했다. 일본 승려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지지하여 무고한 중국인들을 참살한 반면, 중국 승려는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여 침략자를 물리쳤다.

예컨대, 일본 불교 조동종의 학자는 <불교와 전쟁>이라는 책에서 중국에 대해 일으킨 전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 세계, 내지 중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있다”라고 변명하고, 또한 “선(善)을 목적으로 한 전쟁은 바로 선한 것이다”라고 변명했다. 일본 불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어떤 학자는 “적을 죽이는 것은 바로 악마를 죽이는 것이고, 대다수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고취했다.

중국의 경우는 전면전쟁이 시작된 후에 태허(太虛)스님이 말하기를 “지금 소수의 미친 악마가 세계에 큰 재앙을 입히는 것 불사하고 그 국민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인민들과 서로 죽이게 한다. 이와 같은 광폭한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항전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바로 불교의 방편법문이다.”라고 했다. 일・중 양쪽의 불교계는 모두 자기 나라 전쟁의 명분을 분명히 하고, 상대방의 전쟁이 정의롭지 못함을 꾸짖었다.

일본의 경우 ‘7.7 사변’ 직후 두 명의 저명한 불교학자가 각기 문장을 발표하여 “이번 사변(北支事变)은 정의로운 전쟁”이며, 또한 중국에 대한 “자비행”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경우 전면 전쟁이 시작된 후에 태허스님이 “중국의 항전은 전쟁을 소멸시키고, 멈추기 위해 일어나 전쟁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중 양쪽 불교계는 모두 전쟁에 봉사하도록 승려를 격려하고 동원했다. 중・일 양국의 승려들은 모두 군대를 따라 봉사하고, 국내와 국제의 홍보과 정보활동에 종사하며, 전쟁에 금전과 물품을 기증했고, 심지어 직접 입대해 투쟁하는 등 다방면에서 전쟁을 위해 봉사했다. 전쟁터에서는 일본 승려와 중국 승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일 전쟁 양국 승려들의 사고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중·일 전쟁 중 양쪽 불교승려들의 전쟁에 대한 태도, 그리고 그들이 전쟁을 위해 한 행동들을 형식상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그러나 가치로는 또한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와 같은 참혹한 역사 장면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첫째, 국가의 이익은 종교 신앙보다 높다. 어떻게 해서든지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한다. 이것은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신앙이다. 하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일・중 양국의 승려들 모두 이론으로는 살생계를 파계했다. 양자의 차이는 오직 일본의 국가이익은 사악한 것이고 중국의 국가이익은 정의로운 것에 있다.

둘째, 공민 신분은 신도 신분보다 높다.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 어찌 이리 핍박하는가?”라고 하듯이 같은 불제자인데 어찌 일본 승려가 중국 승려를 함부로 살해하고 개미만도 못한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일본인의 신분을 지극히 존귀한 것으로 보고, 같은 불제자인 중국 승려들의 동문 신도 신분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 불교계는 아주 순진하게 일본 승려들을 동문형제로 간주해, 성명을 보내고 우편을 보내, 그들에게 자비심을 내어 침략 전쟁을 저지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이와 같은 행동은 호랑이 보고 가죽을 달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부터 중국 승려들도 다시 일본 승려들을 동문형제로 보지 않고 마귀나 백정으로 간주한다.

셋째, 종교는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중일전쟁 기간 중국에 대한 침략활동에 참여한 일본 정부, 일본군인, 일본 승려, 모든 침략 전쟁을 지지한 일본인들은 대단히 잔인한 마귀이다. 그들의 잔인함, 난폭함, 표독함은 인류 역사적 기록을 초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뜻밖에도 불교를 제멋대로 떠들고 입에 자비를 운운하며, 종교를 이용하여 침략을 홍보했다. 승려들은 심지어 가사를 입은 채로, 손에 염주를 쥐고 있는 채로 사람을 죽였다. 인류 역사상에 가장 자비스런 종교인 불교가 살인의 도구가 된 것이다. 마치 󰡔서유기(西遊記)󰡕에서 마귀가 삼장법사를 호랑이로 변신시킨 것과 같다. 이것은 바른 종교와 바른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한 것이다.

넷째, 종교는 오로지 종교 이외의 정의로운 힘과 결합해야 종교의 자비, 박애, 평화, 그리고 생명을 아낌 등의 이념을 실천에서 실현할 수 있다. 승려들의 기도는 정의롭고, 선량하고, 아름다워서, 사기를 격려하는 데도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그런데 일본의 침략자는 무엇 때문에 패배했는가? 승려들의 기도가 아니고, 피투성이가 되게 분투한 장병들 때문이고, 총포와 총검 때문이고, 세계 반파시즘 연맹의 단결 대적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든 만약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종지로 삼으려면, 반드시 각자의 종교 단체를 잘 건설하는 동시에 사회의 진보와 선량한 역량의 축적을 촉진함에 힘써야 한다. 더 나아가 선량한 역량으로 하여금 사악함을 압도하고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종교에서 창도하는 아름다운 이념은 더 빠르게 현실이 될 수 있다.

이상 네 가지 인식은 무수한 승려들을 포함한 수많은 중국인, 특히 몇 천만의 사상자의 선혈과 생명으로 얻은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불교를 연구할 때 불교 교의를 중시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불교가 겪었던 여정을 중시해야 하고, 인간 세상에서 불교와 선·악의 교섭을 중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불교가 더 오래, 더 좋게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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