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행 스님

효일 범행(曉日 梵行, 1921~2012) 스님은 선학원 설립 이래 17년에 이르는 최장기간 법인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선불교의 맥을 면면히 계승한 우리 시대의 장로(長老)였다.

범행 스님은 1921년 음력 2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부친 전주 이(李)씨 경순(景順)과 모친 밀양 박(朴)씨 흥옥(興玉)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가 전 이름은 임배(林培)였다.

동갑내기였던 부모는 나이 마흔두 살에 막내아들을 얻었고, 스님은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군인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군복을 벗고, 포목점과 방앗간 등을 운영했다.

스님은 일곱 살에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부친은 “배워서 아는 게 많으면 일제의 앞잡이밖에 더 되겠느냐.”는 생각에 공부를 채근하지 않았다. 보통학교를 1년 더 다니고서야 졸업한 스님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그 뒤 또래와 달리 학교에 다니지 않고 공부를 등한히 했던 것을 후회하며 세계문학전집과 시집을 탐독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나 칼 마르크스, 엥겔스 같은 철학가와 사상가의 책도 즐겨 읽었다.

열아홉 살 때 부친이 별세하자 스님은 이후 10여 년 동안 만행하듯 세상을 공부하며 부친의 사업을 이었다. 스님은 집 수 채와 화학공장, 아산만 일대 땅 3만여 평 등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산만 일대 땅은 이승만 정부가 토지개혁을 할 때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빼앗겼다.

스님은 물려받은 화학공장을 운영하다 1948년 폭발사고로 염소에 중독돼 폐를 상했다. 생사의 기로에 직면한 스님은 절에서 요양하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금산 태고사를 찾았다. 그때 태고사에는 포산 혜천(飽山 慧天, 1912~1971)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하동 칠불선원 조실과 합천 해인사 조실을 지낸 포산 스님은 윤보선 대통령과 사촌지간이었고, 기독교운동가였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치호의 5촌 조카였다.

범행 스님은 태고사에서 요양하며 포산 스님과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간 쌓은 교양과 상식으로 논쟁에서 남에게 지지 않는다 자부했지만 포산 스님이 펼치는 논리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상의 알음알이가 불교사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스님은 “부처님을 믿으면 병마를 이겨낼 수 있다.”는 포산 스님의 권유로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佛頂心觀世音菩薩姥陀羅尼)’를 두 달이 가까이 지심(至心)으로 외우고 또 외워 병을 완치할 수 있었다.

새 생명을 얻은 스님은 자신의 삶을 부처님께 회향하기로 결심하고, 포산 스님을 은사로 축발득도(祝髮得度)했다. 태고사에서 1년을 더 머문 스님은 1949년 계룡산 용화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했다. 당시 용화사에는 만공(滿空) 스님의 제자인 용음(龍吟) 스님이 조실로 있었다. 범행 스님은 그해 금오 태전(金烏 太田, 1896~1968) 스님을 은사로 건당하고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스님은 전쟁통에 가만히 앉아 수행하는 것을 사치인 듯 여겼다. 1952년 팔달사로 갔다. 그곳에서 전쟁으로 힘든 삶을 이어간 피난민을 위로하며 도심포교의 원력을 품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듬해 교단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스님은 경기도 교무원 교무국장 소임을 맡아 한강 이남 경기도 사찰의 정화를 책임지게 되었다.

당시 교단정화운동의 핵심이었던 효봉, 동산, 금오, 청담 스님은 정화 방안에 대해 조금씩 의견이 달랐다. 효봉 스님은 본사만 수행처로 삼자고 주장하였고, 동산 스님과 청담 스님은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금오 스님은 그마저도 거절하고 걸망지고 걸식하며 만행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교단정화운동의 여파로 서울(당시는 경기도 광주) 봉은사가 비구 측에 제일 먼저 접수되었는데, 범행 스님이 1954년 첫 주지로 발령받았다. 스님은 정화불사와 관련한 송사 해결에 앞장섰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조계사 주지로 부임하여 운영난에 처한 조계사의 난국을 극복하는데 진력하였다. 당시 어려운 환경에도 군포교의 원력을 세워 육군사관학교 포교를 비롯해 대구 2군사령부, 육군3사관학교 법당 건립 등 군불교 진흥을 위한 다양한 불사를 진행하였다.

봉은사에서 3년간 주지소임을 보는 동안 1956년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조계사 주지로 부임하고, 1959년 동산 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 1960년 4.19학생민주화운동 직전인 4월 17일 대구 동화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정월께 다시 자리를 옮겨 경기도 용문산 상원사에 보좌(寶座)를 마련하였다. 어느 날 본가의 모친과 벗 삼았던 당시 최영희 장군의 모친과 한국은행 민병도 총재의 모친 등 세 분이 상원사를 찾았는데,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한 그날이었다.

이후 상원사를 떠나 서울 삼청동 칠보사를 찾은 때가 1961년 9월 하순이다. 이틀 후 은사 금오스님과 경산, 원허스님 등이 칠보사에 오더니 다시 조계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권유하였다. 조계사 주지로 두 번째 부임하게 된 연유이다. 1964년께 다시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경주 불국사를 놓고 범어사와 수덕사 문중 간에 점유 다툼이 거세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968년 범행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비로소 소용돌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범어사 동산 스님이 범행 스님을 신뢰하자 대중이 어찌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범행 스님은 여기서 6년간 주지를 역임하며 정부와 손잡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복원해 오늘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는 실질적인 기반을 닦았다. 특히 1968년 불국사 주지 재임 시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불국사를 옛 모습으로 복원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71년 지금의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 사장에 취임해 4년간 종단 여론의 눈이 되었다. 〈대한불교〉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출범 이전, 당시 조계사 주지 범행스님과 별좌 홍도(弘道) 스님의 산파 역할에 힘입어 창간된 종단 기관지였다.

선학원의 수장인 제13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시기는 1975년, 세납 55세였다. 당시 선학원은 당시 중앙선원의 건축비로 오천 만원의 큰 빚을 지고 있었다. 불교분규 당시부터 문제 사찰의 책임자로 부임해 해결사 역할을 해온 저간의 역량은 이곳 선학원에서도 절실히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선학원 이사장 수행 기간이 1991년까지 17년으로 역대 최장수 수장이 되어 선학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덕숭총림 초대 방장을 역임한 혜암 현문(慧庵 玄門, 1884~1985) 스님의 선풍과 덕화가 있었다.

범행 스님은 당시 선학원의 조실로 주석하고 있던 혜암 스님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때 만공- 혜암으로 이어진 전법게를 수지하고, 1975년 수덕사 방장 혜암 스님으로부터 오도송을 인가받기에 이른다. ‘효일(曉日)’은 바로 그때 받은 당호이다. 1976년, 세납 56세 때 깨치고, 선학원 이사장직에 있던 1979년 부산 금정선원 선원장에 부임해 1년 남짓 소임을 겸하여 수행하였다.

그 직후 수덕사가 채권자들과의 다툼으로 몸살을 앓게 되자, 당시 수덕사 노장인 벽초 경선(碧超 鏡禪, 1899~1986) 스님이 범행 스님을 찾아와 주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였다. 또 다시 말썽 사찰의 책임자가 되어 해결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84년의 일이다. 그러나 수덕사 역대 주지 명단에 범행 스님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1997년 9월 월산 스님이 입적하자, 1998년 법주사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들을 제접하였다.

이(理)와 사(事)를 둘로 보지 않고, 수행자로서 본분을 잃지 않으며 일생을 종단 정화와 청정가풍 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범행스님은 2012년 1월15일 새벽 1시10분 세수 91세, 법랍 64세로 수원 팔달사에서 “일생다사(一生多事) 몽중여환(夢中如幻) 일념방하(一念放下) 무애환희(無碍歡喜) 일생 동안 많은 일들, 꿈 속 일과 같네. 한 생각 내려놓으니 걸림 없어 기쁘고 기쁘도다”라는 임종게를 내리고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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