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곧 수행(修行)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수행의 방식에는 가부좌을 하고 앉아서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좌선(坐禪)을 비롯하여 화두를 들고 살펴보는 간화(看話)나 나타나고 사라지는 의식(意識)을 관찰하는 관심(觀心)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외에도 화두를 염불처럼 외우는 염불선(念佛禪)이나 앉아서 호흡을 헤아리는 수식관(數息觀) 등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선(禪)이라고 하면 어떤 형태의 수행법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본래의 선(禪)은 이런 여러 가지 종류의 수행이 아니다. 선은 곧 깨달음이다. 우리의 본래면목인 진여자성(眞如自性)에 대한 깨달음이 곧 선이지, 선이 어떤 수행의 방법은 아니다. 선은 곧 불법(佛法)이다. 불법은 어떤 종류의 수행법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참된 모습에 대한 깨달음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선의 특징을 나타내는 잘 알려진 다섯 마디의 말이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그것이다. 불립문자는 문자를 세워서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교외별전은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의 밖에서 문자 아닌 방식으로 따로 전한다는 말이고, 이심전심은 문자를 통하지 않고 곧장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전한다는 말이고, 직지인심은 사람의 마음을 문자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가리킨다는 말이고, 견성성불은 마음의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어떤 방식의 수행을 하라는 말은 없다.

선의 시초는 영산회상(靈山會上)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표현되는 사건이다. 석가세존께서는 영취산 위에서 법회를 많이 열어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셨는데, 어느 날은 법상에 올라가 말씀을 하지 않고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다. 모든 대중은 그 뜻을 몰라서 잠잠히 있었는데,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에 석가세존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열반묘심(涅槃妙心)과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미묘법문(微妙法門)을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咐囑)하노라.” 정법안장이란 바른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추었다는 말이고, 열반묘심이란 망상번뇌가 사라진 미묘한 마음이란 말이고, 실상무상은 참된 모습에는 분별할 수 있는 모습이 없다는 말이고, 미묘법문은 깨달음의 법으로 통하는 문은 미묘하여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인데, 이러한 법문을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경전의 밖에서 따로 전하여 마하가섭에게 부탁한다는 말이다. 여기 부처님이 당부하신 말씀은 깨달음이 어떤 것인가를 나타낸 말씀이지 어떤 방식의 수행법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중국 선종의 오조홍인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각자가 깨달은 안목을 게송으로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가장 상수제자인 신수(神秀)가 이런 게송을 제출하였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인 경대(鏡臺)와 같다./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 오조는 이 게송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소견이라고 평가하였다. 그 뒤 혜능(慧能)은 신수의 이 게송을 이렇게 바꾸었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경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오조는 이 게송을 보고서 혜능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육조로 인가하였다.

두 게송의 차이는 명백하다. 신수는 마음을 털고 닦는 수행을 말하였는데, 혜능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육조단경> 첫머리에서 혜능은 설법하기를 “깨달음인 자성은 본래 깨끗하니 단지 이 마음을 쓰기만 하면 곧장 깨달음을 이룹니다.”라고 하여, 본래 깨끗한 마음인 자성을 깨닫기만 하면 될 뿐이라고 말한다.

더러운 마음을 털고 닦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수행이 아니라, 본래 깨끗한 자성을 깨닫는 것이 곧 선(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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