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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학술심포지엄
불교평론 만해축전 31일 '언어문화 극복 모색'
2018년 08월 30일 (목) 15:28:08 김종찬 기자 kimjc00@hanmail.net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학술심포지엄 지상중계


불교평론은 날로 저질화 폭력화되는 언어문화의 원인을 진단하고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학술심포지엄을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오는 31일 개최한다.
2018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은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주제로 기조발제에 이도흠 한양대 교수의 ‘말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초기경전에 나타난 구업의 유형과 극복 방안’(한성자 동국대 교수), ‘말과 침묵, 그리고 이심전심의 소통’(윤종갑 동아대 교수), ‘한국사회의 거친 말, 거짓말의 원인과 불교적 대안’ (허우성 경희대 교수), ‘사회연결망서비스(SNS)의 말 문화와 불교’(박수호 중앙승가대 교수), ‘청소년 언어문제에 대한 불교적 대안’(신희정 창원중앙고 교사), ‘말이 세상을 바꾼다’(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등 6주제를 발표한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혜숙 박사(금강대) 서재영 박사(불광연구원)의 사회로 만해축전추진위원회가 주최하며 발표문 요약본을 게재한다.





화쟁적 삶 유지하는 것이 고운 말 바탕

말이란 무엇인가-의미와 해석, 기능과 한계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교수)
말은 진실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왜곡한다. 말은 사람을 맺어주지만 그만큼 갈등하게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언어 자체가 실질을 가지지 못한 채 차이/구조/관계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기에 진리를 재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둘째, 발신자와 수신자가 다른 현실, 맥락과 구조, 세계관, 프레임에 있을 경우 발신자가 보낸 메시지와 수신자의 해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소통 과정에서도 잡음, 이데올로기, 권력 등이 왜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소통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세계관, 이데올로기, 신화, 이해관계, 권력, 맥락, 프레임 등이 작용하며 소통을 방해하고 말에 잡음이 끼게 하여 말을 왜곡한다. 철저히 팔정도에 입각하여 바르고 올바른 말만 하더라도, 발신자든, 수신자든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과 사회문화의 맥락,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관과 프레임에 따라 말에 의미를 담고 해석하기에 이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며, 소통 과정에서도 잡음, 이데올로기, 권력이 소통을 방해하며 왜곡을 일으킨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상대방의 맥락, 프레임, 세계관을 먼저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코드를 만들고[encoding] 풀어내는[decoding] 원리를 일치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며, 말을 왜곡하는 잡음, 이데올로기, 신화, 권력 등을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도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이 작동하고,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나이, 젠더, 사회적 지위와 집단 안의 서열, 지식 등의 요인이 권력으로 작동한다. 권력은 속성이 없으며 그저 작동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권력은 인간의 연기적 관계망에 작동하는 힘으로 체(體)가 아니라 용(用)이다. 권력은 말을 통하여 작동한다. 박근혜 정권과 대한항공에서 잘 드러났듯이, 국가와 자본은 거시권력의 정점에서 폭력적인 언어로 권력을 작동시키려다가 저항을 받았다.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러 권력이 작동하기에 사람들이 자신이 유리한 권력은 내세우고 불리한 권력은 숨긴다.
권력에서 갑의 위상에 있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언어를 통하여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작동하려 한다.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복종하거나 침묵하거나 저항을 한다. 저항하는 것은 거짓말, 받아치는 말하기, 말을 듣지 않기 등이다. 갑에 있건 을의 위상에 있건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거나 과장하기 위하여,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성에 의할 때는 이해관계나 목적을 위하여 나쁜 말을 하고, 감정의 차원에서는 이를 억제하지 못할 때 욕을 내뱉는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거짓말 같은 것은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에서 활성화하고, 욕은 이보다 낮은 단계로 감정과 심장박동, 자율신경을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변연계에서 활성화한다. 물론, 분노에도 순기능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도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좋은 거짓말이 있고 욕 또한 스트레스 해소, 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 또래 집단의 유대 강화 등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상대방을 기만하며 수치심과 모욕감, 분노를 야기한다.
이성에 관련해서는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윤리적 이타성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른 말, 좋은 말을 위하여 필요하다. 감정에 관련된 나쁜 말의 경우 수행이나 감정의 통제나 절제만이 대안이 아니다. “신경 과학의 최근 연구들은 뇌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력된 감각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미리 예상하면서 예측적으로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측 신호는 경험을 안내하고 제한하면서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뇌에는 세계가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정신적 모형이 있다. 이 모형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를 바탕으로 개념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의미구성현상이다. 당신이 깨어있는 매순간 뇌는 개념으로 조직된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인도하고 당신의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포와 분노는 신체, 얼굴 등의 특정 변화가 감정으로서 의미 있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실재한다. 다시 말해 감정 개념은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다.”
감정은 외부나 타자의 자극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뇌신경세포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기억된 현재’이다.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예측(prediction)하고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실재한다고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고 감정은 오직 지각하는 인간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문화 전체가 당신이 형성하는 개념과 당신이 하는 예측에 집단으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옆 사람이 나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을 때 그 고통은 즉각적으로 느끼지만, 그에 대해 화와 욕을 바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예측하며 시뮬레이션한 다음에 화를 내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해하고 “괜찮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것을 친교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웃기도 한다. 그러기에 감정의 조절과 통제가 능사가 아니다. 타자, 타자의 가치관과 문화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더 나아가 타자를 섬기는 대대적(待對的)이고 화쟁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의 바탕이다.
이제 거짓말, 막말, 잘못된 말, 이간질하는 말, 뒷담화, 악담, 발림말, 언어폭력, 성희롱, 악성 댓글을 지양하고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말, 진실이 담긴 말, 선플을 가려서 행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말이 있기에 사람이 짐승보다 낫지만 나쁜 말을 하는 이는 짐승보다 못하다. 모로코 속담처럼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베인 상처보다 깊다. 나쁜 말은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속이거나 화를 미치는 짓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나와 남을 모두 그릇된 길로 이끈다. 나쁜 말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자 모두의 영혼을 죽이는 행위다. 구업(口業)은 세 사람 모두에게 작동한다.
반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 말은 인격과 지성의 표현이다. 말은 바로 그 사람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비롯하여 450여 곳이 넘는 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은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며, 실제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자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진여문(眞如門)에서는 실제와 일치하면서도 참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이 참된 믿음에 의하여 진여(眞如)를 지향하는 말, 타자와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끄는 말만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생멸문(生滅門)의 경우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윤리적 이타성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여야 하고, 감성적인 차원에서는 타자, 타자의 가치관과 문화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더 나아가 타자를 섬기는 대대적(待對的)이고 화쟁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의 바탕이다.



진실 말할 때 비난할 사람 비난해야



초기불전에 나타난 구업의 유형과 대처 방안


한성자(동국대 교수)

구업 가운데 가장 큰 범계가 되는 것은 역시 거짓말과 관련된 것이다. 모든 의식적인 거짓말은 비교적 가벼운 범계라고 할 수 있는 바일제의 첫 번째 계율에 의해서 금지된다. 그러나 거짓말 중에서도, 인간을 초월한 상태를 아직 성취하지 못했으면서도 거짓으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특별히 가장 무거운 범계인 바라이에 해당된다. 그에 따라 그러한 거짓 주장을 한 비구는 승가에서 쫓겨나 다시는 비구의 자격을 되찾을 수 없다.
거짓말, 모욕, 이간질의 세 가지 구업과 올바르지 않은 담마 암송 등의 여러 다양한 구업에 의한 범계는 바일제에 해당된다. 바일제의 첫 번째 항목은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참회해야 한다.” 이 계목은 석가족의 핫타까 Hatthaka라는 스님이 외도와 논쟁하면서 어떤 때는 자신의 패배를 부정하고 어떤 때는 인정하지 않으며 외도의 질문을 회피하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일삼으며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자 외도들이 “어찌 석가의 아들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비난함에 따라 그것이 붓다에게 알려져 제정되었다(Sv.Pc1).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일 경우에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동물의 행방을 물어보았을 경우에 동물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 사냥꾼이 알게 되면 신심을 잃거나 반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비구가 범계를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비난하는 경우에, 그에 대한 벌로 받게 되는 처벌이 거짓으로 내세운 범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거짓으로 바라이로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승잔(僧殘, saṅghādisesa)의 악의, 성냄의 죄에 해당되며, 거짓 승잔으로써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바일제의 근거 없음에 처하고, 거짓으로 승잔 이하의 범계로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그릇된 행위의 범계인 둑까따(Dukkaṭa)에 해당된다. 선의의 의도로 약속을 했다가 어기게 되어도 둑까따에 해당되는 범계를 저지른 것이 된다.
고의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경장의 여러 곳에서도 반복해서 경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라훌라에 대해 훈계하는 붓다의 말씀이 본보기이다.
구업으로 인해 받게 되는 범계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잘 말해야 한다.
아래 교설은 진실과 사실을 말해야 할 때 확실하게 칭찬할 사람을 칭찬하고 비난할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확실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뽀딸리야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한다. 뽀딸리야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뽀딸리야 경 AN 4.100]
네 부류의 사람 중 첫 번째 부류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만 비난 받을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부류이다. 세 번째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고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도 않는 부류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칭송받을 사람을 칭송하는 부류이다. 붓다는 이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진실을 얘기할 적당한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든다.
율장과 경장에서 구업과 관련된 교설들을 분석함으로써 구업의 유형을 범계와 네 가지 불선한 구업의 기준에 따라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선한 구업을 짓는 잘 말하는 법에 대해서 모색해 보았다. 그 결과 율장의 범계에 따라 불선한 구업의 유형은 가장 큰 죄인 바라이에 해당되는 초월한 경지에 대한 거짓 주장과 비교적 가벼운 죄인 바일제에 해당되는 거짓말, 모욕, 이간질의 세 가지 불선업과 담마 암송 등의 다양한 유형의 불선한 구업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경장에서는 네 가지 불선업의 거짓말, 모욕, 이간질, 잡담이 흔히 함께 짝을 해서 설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각각의 언어행위에 대한 경전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거짓말, 모욕, 이간질 잡담의 더욱 깊은 의미를 살펴보았다.
잘 말하는 법에 있어서는 잘 말한다는 것이 사실은 네 가지 불선한 구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이를 긍정적인 관점으로 고쳐서 표현한 것이 잘 말하는 법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진실하게 말하는 것으로, 모욕을 삼가는 것은 상냥하게 말하는 것으로, 이간질을 삼가는 것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잡담을 삼가는 것은 유익하게 말하는 것으로 긍정적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새롭게 덧붙여서 잘 말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 적절한 때에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잘 말하는 법의 기준을 설정해 보자면 진실을 말하는가, 상냥하게 말하는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는가, 유익하게 말하는가의 네 가지와 마지막으로 적절한 때에 말하는 가를 추가한 다섯 가지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확실한 의사 표명을 했느냐는 기준에 따라 그 말한 것을 보고 사람의 부류를 네 가지로 나눈 교설에서는 사실과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 비난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송할 사람은 칭송하는 사람을 더 수승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도 잘 말하는 법에서 함께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실제 우리의 언어행위에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현재 항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간단히 적용해 보는 시도를 해 보기로 한다. 먼저 진실하게 말하고 있는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서로 자기 말이 진실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고 있어서 정확한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그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다. 다만 각자가 접근 가능한 정보에 따라 나름대로의 판단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의 기준들, 즉 상냥하게 말하고 있는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유익하게 말하고 있는가 가운데서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와 유익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는 그 중심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상이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가령 나한테는 해가 되어도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고 판단 내릴 수가 있으며 또 그럴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냐에 따라 결과가 또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네 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교설에 따르면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에 비난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송할 사람은 칭송하는 사람이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에 따르면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자신이 설 자리를 분명하게 선택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런 몇 가지 사항만 고려해 보아도 교설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잘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잘 말하는 것이 다르게 될 것이다. 결국 최종판단은 각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지적 정서적 능력에 따라 깜냥껏 판단해서 잘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나마 경전의 교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선한 구업을 지으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점차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어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언어 통해 언어의 길 끊어버려 무분별심으로 전향


선(禪)과 중관의 언어관과 깨달음

윤종갑(동아대)


세간인 일반의 이해로서의 진리는 ‘언어를 통한 진리’[세속제]이며 최고의 진실로서의 진리는 ‘언어를 떠난 체험적인 진리’[승의제]이다. 그런데 용수는 언어 관습[세속제]에 의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진실[승의제]이 가르쳐지지 않고, 최고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 최고의 진실을 알 수 있으며, 최고의 진실을 체득하는 순간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은 되어 있지 않지만 최고의 진실의 체득[도달]과 깨달음[열반]은 동시적이다. 혜능이 독경 소리[언어]를 듣고 곧장 깨침을 얻었듯이 용수 역시 언어를 통해 진실을 보는 순간 목록 깨달음이 증득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단순한 소리나 의미가 아닌 깨달음의 본질[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증득자[깨친 자]는 언어를 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진실을 본 것이다. 깨달음의 진실을 봄과 깨달음은 즉각적‧동시적이기 대문에 돈오이다.
혜능이 언어를 통해 마음의 본성을 봄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였듯이 용수 역시 언어를 통해 최고의 진실을 봄으로써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용수가 말하는 최고의 진실이란 무분별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곧 마음의 본성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혜능과 용수 모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언어에 의해 최고의 진실을 체득할 때 깨달음이 가능하며 그것은 문득 이루어진다.
선과 중관은 언어가 방편이며, 그것도 깨달음에 이르는 최고의 방편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과 중관은 동일한 가르침을 펴고 있다. 언어가 방편임을 알지 못하고 언어를 진리로 간주하여 언어 그 자체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깨달음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평생 언어의 감옥에서 번뇌로 시달릴 것이다. 중생의 삶인 것이다.
선사들의 가르침은 어떤 사실을 주장하는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비유와 설명으로 깨달음의 진실을 전하고자 한다. 환자의 병세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말]이 달라지기 때문에 진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편에 불과한 언어 자체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땅 위에서 헤엄을 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이다.
우리가 현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사실은 언어에 의해서 알려진 것으로,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는 아니다. 중생의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서 세속제가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속제는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일상어 중에서도 올바른 가르침을 전달하고, 나아가 궁극적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는 언어이다. 즉, 세속제는 언어에 의해 대상화된 현상적 세계[相]에 토대하면서도 이에 매이지 않고 그 실상이 공하다는 승의제로 나아갈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제는 세속[일상]과 승의[깨달음]를 이어주는 사닥다리 내지 뗏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선의 불이법과 중관의 이제설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는 곧 윤회와 열반의 갈림길을 결정한다. 맑고 향기로운 정법의 언어를 사함으로써 이 세계를 깨끗이 정화할 때 이 셰 그대로가 정토가 되는 것이다.
언어는 개념을 형성하여 판단한다. 개념이란 유, 종은 물론이고 선과 악, 미와 추 등 무수한 범주를 형성하여 언어에 해당하는 그 개념의 범주가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의 보편논쟁과 현대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 등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언어에 해당하는 실재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는 그 진위여부를 떠나 대부분의 인간이 실제 언어의 실재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선과 중관에서는 언어의 실재화로 인하여 분별심이 생하며, 그 결과 세속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교의 최고의 가르침인 사성제와 연기, 공까지도 실체화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고 진단한다. 무아설에 기반한 붓다의 가르침은 실체론(아트만)이 잘못되었으며, 실체론을 고수하는 한 아상(我相)으로 인한 삼업과 삼독 등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붓다 가르침의 핵심은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실체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사라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출발점이 나라는 실체[我相]의 상정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과 중관은 언어의 실재화를 통해 무아설은 물론이고 깨달음까지도 실체화되었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한 단적인 비판이 신수의 깨달음에 대한 혜능의 비판이며 유부의 아공법유설에 대한 용수의 아공법공설이다. 선과 공은 무아설의 전통을 이어 받아 깨달음의 대상은 물론이고 깨달음의 주체까지도 부정한다.
선과 중관에 따르면 언어의 실재화를 통해 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되었다. 언어를 통한 개념의 범주화는 일체의 존재를 범주화시킴으로써 이 세계를 낱낱이 분절하고 경계를 지어 분별심을 조장한다. 분별심의 극단이 실체 개념이다. 언어[희론]가 늘어날수록 분별심이 강화되고, 분별심이 증대할수록 분절과 경계는 더 촘촘하고 미세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 묵언이다. 언어를 여윔으로서 분별심을 없애고 세계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원래 마음의 경계가 없듯이 세계의 경계도 없는 것이다. 한 마음이듯이 세계도 한 세계인 것이다. 분별심을 여위게 되면 나는 물론 세계의 경계도 없어지고 나와 세계의 경계도 지워지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인해 일체의 경계가 소멸한다.
언어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면 언어를 소멸시켜야 한다. 그런데 언어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그 사실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인식하였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선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하듯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선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언어를 통해 알 수 있다면 고통의 치유를 위해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선과 중관은 언어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는 약처럼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약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병이 나으면 약이 필요 없듯이 고통이 치유되면[깨닫게 되면] 언어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처럼 선과 중관에 있어 언어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약을 통해 병[환자]을 치유하듯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고통[중생]을 치유할 것인가이다. 언어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지만 병의 증상에 따라 여러 약이 필요하듯이 선과 중관에서도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불교 사상 가운데 가장 다양한 논리와 어법을 사용한 학파[종파]가 선과 중관이다. 세속의 논리[언어]에 토대하여 초세속의 논리[언어]를 펼친 학파가 바로 선과 중관이다. 이러한 초세속의 논리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선과 중관은 언어를 통해 언어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분별심에서 무분별심으로 전향하게 한다. 선어록과 중론에 나타난 언어의 길은 도처에서 끊어지고 또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문득 언어의 길이 아닌 마음의 길을 헤매고 있음을 깨닫고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텍스트임을 알게 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여윔으로서 마음을 찾게 된 것이다. 그것이 선이고 공이다.


부처님 모방 오온과잉 줄이고 적(敵) 모방 자유민주주의 성숙


오온과잉의 시민 중생에게는 할 말이 없다

허우성(경희대비폭력연구소장, 불교평론편집위원)

오온설을 포함한 불교 심리설은, 우리의 지각에는 인지적인 차원과 감정적인 차원이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즉, 소위 인지적인 차원과 감정적인 차원이 혼재한다고 보는 것 같다. 12연기의 한 고리인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중생은 오온과잉이다. 정의로운 전쟁을 했든 촛불혁명을 했든, 행위자가 오온과잉이었다면 전부 중생의 행위다. 오늘날의 시민 중생은 아라한에 가까운가, 악마에 더 가까운가? 대답은 우리가 느끼는 욕망과 분노의 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대승기신론》과 원효에 따르면 그렇다. 원효 등이 말하는 장식(藏識)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 바로 그것이다. 무명업상이란 무명(또는 不覺)에 의해 생겨난 업상이란 뜻이다. 업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욕망과 분노(欲瞋)이다. 욕망과 분노는 앞서 언급했던 애·불애 곧 아진(我塵)분별로 이어지고, 이런 분별은 집착과 혐오, 배제와 공격의 시발점이다.
욕망과 분노, 집착과 혐오는 세상의 모든 중생계에 늘 존재해왔다. 〈소연경(小緣經)〉이 그걸 잘 말해준다. 이 경에 따르면, 중생은 십악(十惡)을 범한다. 십악에는 살생, 도둑질[도절盜竊], 음란, 기망(欺妄),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간탐(慳貪), 질투, 사견(邪見)이 들어 있다. 기망은 속이는 일이고, 양설은 양쪽에 다니면서 이간질하는 일이고, 악구는 욕설하는 것이다. 기어는 진실 없이 교묘하게 표현된 말이고, 간탐은 인색하고 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악구, 기어, 양설은 나쁜 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공감 조작, 여론조작이나 댓글조작은 기망이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포털의 수익 창출은 기망이면서 간탐이다. 십악은 결국 오온과잉, 욕진, 애·불애, 아진분별, 집착과 혐오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필자의 가설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배경감정이 강하고, 이것이 분노, 질투 등의 일차적, 사회적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거나 표출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내믹 코리아, 하나된 열정(one passion), 하나의 한국(one Korea)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배경감정이 일상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구호이거나, 그것을 강화하는 구호로 보인다.
《숫타니파타》의 〈라훌라경〉은, 붓다가 출가한 아들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고 적고 있다. “다시는 세간으로 돌아가지 말라.”(mā lokaṃ punar āgami)고. 만일 라훌라가 이 충고를 정치와 같은 세속사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숲 속에 머물기로 결심한다면 그의 임무는 비교적 단순해진다. 그의 한 몸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청정을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라훌라가 출가자로서 세속 정치에 관여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까? 무엇보다도 오온을 정상화시키고 십악도 멀리하면서 참말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에서 올바른 인지적 판단도 해야 한다. 만일 오온 정상화 없이 세속에 참여하게 되면, 붓다의 아들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세상을 향상시킬 수도 없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오온체를 모방하고, 그런 것들만 양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의 불자들은 붓다의 이런 충고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서로 달라도, 우리가 승가 내의 개인적 삶을 만족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보다는, 국내외 문제와 관련해서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아내기가 훨씬 어렵다는 점에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 정치적 사변이 유달리 많았던가? 그런 사변들이 낳았던 강력한 감정들은 한민족의 문화와 우리 개인의 생리에까지 각인되어 민족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소리와 이미지, 그것들로 촉발되는 정동, 감정, 느낌이 너무 세고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전달방식과 우리의 인식에는 감정적인 차원이 차고 넘친다. 정치적인 공간, 비정치적인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악마’와 장애물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듯하다. 우리는 스스로 오온과잉의 존재로서, 유사한 오온체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공감하며 모방하는 존재이다. 공감과 모방의 내용에는 물론 집착과 혐오도 포함된다. 오온 정상화는 여러 겁(劫) 동안 자신의 심신에 쌓아온 적폐를 청산한 아라한만이 성취할 수 있는 목표로서, 세속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민주주의란 오온과잉인 시민 중생 다수로 하여금 정치적 목표와 절차를 선택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말만 아니라 나쁜 말과 거짓말도 하고, 분노와 혐오를 비롯해서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을 모방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붓다에 따르면, 참말의 핵심 조건은 오온 정상화이다. 이 글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글도 아니고 아라한을 위한 글도 아니다. 일반 시민 중생에게 할 말은 없지만, 불교를 조금이나마 실천하려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당부 사항이 있다.
첫째, 붓다를 모방해서 오온의 크기를 다소 줄여보라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자기개조의 길이다. 둘째, 오온을 좀 줄여서 동지가 아니라 ‘적’을 일부나마 모방하도록 애써보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인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중동을 주로 읽는 사람은 수시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한겨레나 경향신문의 독자는 조중동을 가끔 읽어보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분노나 혐오를 좀 줄이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보다는 선불선(kusala, akusala)의 태도가 유리할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먼저 부처님을 모방해서 오온과잉의 정도를 좀 줄이고 ‘적’을 모방하다보면, 자유민주주의는 좀 더 성숙해지고 한반도에서 자유, 사회 정의, 평화의 꽃이 필까? 정치적으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슨 대안이 있을까? 그 희망이 아무리 변덕스러운 기쁨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면 부처님을 모방함은 공동체의 정치적인 향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고, 단순히 수년 뒤 청산할 적폐를 좀 줄여주는 정도에 불과할까? 아! 그런데 여기에서 하는 이 말은 얼마나 참된 것일까?









업과 연기 기초한 동체대비(同體大悲)와 보은(報恩) 개념 주목


사이버공간의 언어폭력과 대안적 불교윤리


박수호(중앙승가대학교 교수)


사이버성폭력은 사이버공간에서 타인에게 성적인 수치심이나 혐오감 또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행위이다. 대부분의 사이버성폭력은 대화방이나 쪽지보내기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대방 의사를 무시하고 음담패설을 계속하거나, 채팅 중 성적인 질문을 하는 것, 상대방의 동의 없이 ‘컴섹’을 요구하고, 성적 모멸감을 유발하는 게시물이나 자료를 올리는 행위, 메일이나 메모를 통해 일방적인 만남을 강요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심한 경우는 채팅 중 번개모임을 통해 만난 뒤 실제로 성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고, 사이버스토킹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사이버스토킹은 사이버공간에서 타인에게 원하지 않는 접근을 계속적, 반복적으로 시도하거나 이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유발하는 행위이다. 흔히 메신저나 채팅창에 등록된 아이디가 네트워크에 접속을 하면 다른 이용자에게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기본적이다. 주로 여성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남성 이용자들이 스토킹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사이버성폭력의 한 유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사이버폭력은 사이버공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이버공간과 현실공간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경향이 관찰되고 있다.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에게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 ‘현피’ 현상이나 현실공간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특정 대상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로 사이버공간에 악성 루머를 유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실’과 게임 용어인 ‘Player Kill(PK)’의 합성어인 ‘현피’는 온라인상에서 일어난 다툼이나 분쟁이 비화되어 분쟁의 당사자들이 현실에서 직접 만나 물리적 충돌을 벌이는 일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이다.
사이버공간은 불교적 세계관과 친화성이 높다. 정보는 항상 새로워지고 다듬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삼법인의 내용과 개념상 일치하고 있다.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이버공간은 각 결점 사이의 관계 유지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는 점에서 행위자 및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업의 논리는 상관성이 높다. 또한 업의 논리와 연기론은 사이버사회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불교윤리의 적용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업과 연기의 가르침에 기초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과 보은(報恩)의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보호, 서로에 대한 호혜, 사회에 대한 책무 등 사이버윤리의 실천 덕목들은 동체대비와 보은이라는 불교윤리를 통해 더욱 큰 의미를 포괄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동체대비의 정신을 기초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호로 확장되며, 호혜와 사회적 책무는 보은의 윤리를 통해서 보다 긍정적인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 사이버윤리의 원칙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이버공간은 개인화․상대화된 주체들이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행위를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윤리적 원칙은 조화(harmony)이다. 수평적이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발현하면서 공동체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 조화라고 생각된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화의 원칙은 정보격차 해소의 지향점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조화로운 사이버공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책임(obligation)이다.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은 네트워크의 연절점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개인들에게는 일종의 의무와도 같다. 특히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책임은 바로 네트워크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원활한 소통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네트워크로부터 배제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고, 이것이 널리 확산되면 네트워크 자체가 해체됨으로써 정보사회의 기반을 허무는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이버공간에서 최초의 사회적 구성물이 출현하던 시점부터 인터넷의 기본적 이상은 정보의 공유와 공개를 통한 발전에 있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급속히 자본주의적 질서로 편입되면서 공유의 이상이 잊혀지기 시작했지만, 정보공유운동이 주장하는 바는 여전히 타당성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앞서 논의한 바 있다. 공유(share)는 불교적 가치와도 매우 친화성이 높다. 연기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 불교는 보시와 자비, 무소유, 보은 등의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공유를 통한 공동의 번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최종 귀착점이 바로 회향이다. 인연을 따라 내게 잠시 머물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인연에 따라 되돌리는 것이다. 즉, 불교는 회향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를 실현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바로 신뢰(trust)이다. 사이버공간의 익명성과 탈맥락성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이로 인해 사이버공간에서의 상호작용에 근본적인 왜곡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연기론에 입각한 보은과 공업중생의 논리를 통해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낸다. ‘나’라는 주체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무수한 인연의 결과로서 발현되는 것이므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은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은인과 같은 존재가 된다. 또한 나와 연기론적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시대적인 공동의 업을 함께 나눠지고 있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은인이자 분신과도 같은 존재들을 불신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불신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신뢰는 존재를 위한 필수적인 요청이 된다. 이처럼 연기론적 관계 속에서 개인은 비교적 안정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신뢰할 수 상호작용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은 조화와 책임, 공유와 신뢰라는 윤리적 원칙을 통해 모두 함께 공존․공영하는 것을 요구한다. 예불문의 마지막 구절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라는 점은 이러한 요구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윤리의 원칙을 총괄하는 것으로서 공동성(collaboration)을 상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화, 책임, 공유, 신뢰를 통해 함께 번영하자’는 불교적 사이버윤리의 원칙을 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사이버윤리는 ‘CoHOST’(함께 주인되기) 원칙으로 명명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할 경우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외부적인 강제에 의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발적인 준수를 통해 불교적 사이버윤리가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주인이 되는 ‘참 나’를 찾는 불교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불교 윤리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도 더욱 높아질 수 있다고 본다.








끊임없는 탐구·성찰로 스스로 깨치는 방법 함께 알려준다


청소년 언어 문제에 대한 불교적 대안
신희정(창원중앙고 교사)

거짓말하는 라훌라의 행동을 고치기 위하여 붓다의 1단계 반성적 성찰은 일상적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초등학교에서 인성교육 차원에서 실시하는 일기쓰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붓다의 일상적 성찰은 행위 전⋅과정⋅후 성찰이며 사실상 자아의 모든 면에 대하여 모든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주도면밀한 성찰이다. 먼저 대화편에서 붓다는 라훌라에게 도덕적 성찰이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 접근할 때, 고의로 거짓말하는 자와 그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의 덕성은 수행자로 나아가기 어려움을 여러 차례 문답으로 주고받는다. 이것은 붓다처럼 되고 싶은 라훌라에게 도덕적 성찰함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배움 동기이다. 동시에 붓다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대하여 부끄러움(hirī)과 창피스러움(ottappa)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활용한다. 이 두 가지 원리는 수행자를 수행자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근본이며 인간 사회를 수호하게 된다.
붓다 대화법에 의하면 우리는 행위 전 동기와 행위 후 결과를 고려하며 동시에 행위 과정 중에 지속적으로 성찰하여 선한 동기가 행위로 이어져 그 결과까지 유익함과 괴로움을 주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붓다 대화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과 악인지, 무엇이 유익함과 해로움인지, 무엇이 괴로움과 즐거움인지를 교화나 주요 덕목을 직접 제시하는 계율과 같은 도덕적 사회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붓다 대화법은 끊임없는 탐구와 성찰을 통해서 스스로 깨치는 방법을 함께 알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 대화법은 배우는 자 스스로 생활 사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자발적인 마음공부이자 도덕 교육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라훌라가 지속적인 성찰과정을 통해 수행자의 품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속적인 성찰과정을 통해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쳐 인간됨의 덕과 품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붓다는 가르쳐준다.
좋은 교육이론과 대안은 구체적인 교육 상황에서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전도 선언문을 비롯하여 붓다의 대화편에는 붓다가 가르치기 위하여 내용과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나온다. 연구자는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로서 지금까지 Ⅲ장에서 제안한 붓다 대화법을 적용하여 청소년이 올바른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제안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제안하는 활동은 두 가지이다. 활동 1은 라훌라 대화편에서 나타난 붓다 대화법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기획한 것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국어 시간에 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 2는 승가 공동체에서 진행했던 포살과 자자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변용한 방법이다. 담임 활동 시간을 이용하여 실천할 수 있다. 활동 1은 거짓말 하는 라훌라를 위하여 물 대야를 활용한 붓다의 실물 교육 원리에서부터 출발한다. 두 가지 활동은 모두 붓다 대화법이 실천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자율성과 평등성을 갖춘 교육 공동체로서 교실이 마련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
[활동 1 : ‘장미와 나’] 교사는 절화 장미 한 송이씩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교사의 질문이 적힌 활동지를 함께 배부한다. 잘려진 장미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느낌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교사는 ‘잘려진 장미’의 의도를 제시한다.
“이것은 나무에 있는 그대로 존재했더라면 더 아름답게 활짝 펴있을 장미입니다. 하지만 잘려진 이 장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장미는 서서히 시들어 말라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위의 사람들(친구, 부모님, 선생님)로부터 경험했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잘려진 장미와 같은 마음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떠올려봅니다. 어떤 말과 행동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가 되게 했나요? 적어봅니다. 장미는 가시가 있어요. 가시는 여러분의 방어 기제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말과 행동을 경험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싶었고(드러내지 못한 마음반응),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드러낸 말과 행동)를 떠올려 보고 적어보세요. 이제 이런 괴로운 마음들을 여러분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해요. 먼저 나누어준 가위로 가시를 조심스럽게 잘라냅니다. 실제로 여러분 마음을 상처 나게 하고 잘려나간 장미로 있게 만들었던 그 사람에 대한 미움, 원망, 분노를 함께 잘라낸다 생각하고 잘라냅니다. 지금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요? 떠오르는 그 마음 상태를 적어보세요. 이제 시들어가는 장미를 다시 아름답게 생기 있게 살려보려고 해요. 준비한 빈 생수통의 반을 자르고 그 통에 물과 사이다를 350CC 정도 되도록 1:1 비율로 섞어 부어주세요. 그리고 락스 1/3티스푼을 혼합하여 주세요. 남은 사이다와 물 그리고 락스를 넣어 보충용액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용액의 물을 교환할 때 사용하면 됩니다. 이제 자신의 장미를 액체가 담긴 통에 넣어주세요. 이 물은 장미를 다시 살릴 도움을 주고 다시 빛나게 하도록 하는 최적화 된 조건을 만들어 줄 겁니다. 여러분 교실 뒤에 며칠간 두고 잘려져 시든 자신의 장미가 다시 살아나는지 관찰해봅니다. 그때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드는지 기록해둡니다. 변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둬도 좋습니다. 물이 뿌옇게 되면 만들어둔 보충용액으로 전량 새로 갈아주어야 합니다.”
1주일 뒤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 장미를 보면서 장미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준 최적화된 조건들에 대해 문답하면서 윤리와 사상시간에 배운 ‘연기(緣起)’를 떠올려 볼 수 있게 한다. 교사는 사이다와 락스 그리고 물이 적절하게 조화된 상태가 절화된 장미에게 주는 이로움에 대해 설명한다. 동시에 학생들이 관계 속에서 올바르고 좋은 마음가짐과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말과 행동이 서로에게 어떤 이로움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고 의견을 들어본다. 또한 학생들이 종이에 기록했던 내용들을 자유롭게 발표해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자신의 언어생활에서 무심코 습관적으로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성찰해보고 앞으로의 다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활동 2 : 함께 쓰는 마음일기] 앞서 제시한 붓다의 두 가지 성찰기준을 활용하거나 버츄카드를 활용하여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선택하게 한다. 버츄카드 활용할 때에는 2-3가지의 가치를 선택하게 한다. 학생들은 그 가치를 성찰 준거로 삼아 1주일이나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집과 학교에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세 가지 항목(학업 과정, 교육 관계, 그리고 일상에서의 마음가짐· 언어생활 · 태도)에 대하여 마음일기를 쓴다. 담임교사는 둘러앉아서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마음일기를 읽어 스스로 성찰하고 다짐하는 시간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칭찬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진다.








개인 노력과 사회적 제도보완 함께할 때 사회변화 중심


말이 세상을 바꾼다
-붓다의 언어와 사회변화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본지 편집위원장)


우리의 말은 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서 한계와 직면하곤 한다. 대부분 은유를 통해 표현되는 우리의 말은 그 은유가 형성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쉽게 알 수 없는 한계와 그로 인한 무의식의 과정이 추가되면서 자신의 내면은 물론 대화의 장을 꼬이게 만드는 난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에게는 그 난관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주어져 있고,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해서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해보겠다는 의지만 발휘한다면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진리의 전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용수나 비트겐슈타인과는 달리 붓다는 그 어려움과 한계를 직시할 수 있다면 보다 적극적인 대화와 토론이 활용될 필요가 있음을 다양한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대화와 토론의 장에서 주고받는 말들에 대한 정교한 분류와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고, 이러한 붓다의 제안은 토론문화가 전반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살려낼 필요가 있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을 매개로 하는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붓다의 대화법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두 차원으로 나누어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으로 이 작은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나는 나와 타자 사이의 불이성(不二性)을 전제로 나 자신의 화법(話法)에 대해 성찰하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자신의 언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다양한 형태의 은유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 일상의 화법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타자에게 불필요한 오해나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역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별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운 데도 다른 사람의 화법에서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주로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은유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 타자의 은유에 관한 주목과 성찰은 우리의 언어생활은 물론 일상의 행복을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
다른 하나의 제안은 대화와 토론 문화의 개선과 정착을 위한 것이다. 대화를 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는 일과 자신의 말을 명료하게 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하거나 질문을 해올 때 그것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를 살펴 그 유형에 맞는 답변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는 명료하게 그 의견을 전달하면 되고, 상대방의 질문이 모호할 경우 되묻거나 분석하여 재질문해야 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 믿음과 관련된 강한 주장을 해올 경우에는 더 이상의 대화를 이끌어가지 않고 마무리하는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다.
토론공동체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해서는 특히 역습과 회피라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토론문화 속에는 상대방의 주장과는 관계없는 다른 사안으로 역습하거나, 질문의 본질은 외면하면서 다른 말들을 늘어놓는 회피가 일상적으로 들어와 있다. 이런 문화는 불교계와 같은 종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붓다의 무기(無記)와 침묵은 결코 회피가 아니다. 답변이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그 질문의 유형을 나눠가면서 성격에 맞는 응답을 하고자 했고, 토론공동체 안에서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회피하거나 역습을 하는 사람을 대화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럼 사람들이 설 수 있는 땅을 토론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나서서 좁혀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그 출발점은 자신이 그런 부정적인 의미의 대화상대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과 공동체 차원의 노력은 당연히 제도와 문화 자체의 뒷받침이 함께 마련될 수 있을 때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화상대방의 의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리(一理)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면서 자신의 주장 속에도 진리의 일단이 담길 수 있도록 명료하고 진정성있게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화쟁(和諍)이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정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른바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문화가 지속될 경우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도 그가 가진 외적인 힘 등에 의해 좌우되지 않게 하는 헌법적 장치의 보완과 법적인 시행 방안 마련 등이 토론문화를 개선해가는 데 실천적인 배경이 된다.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과 사회적 차원의 제도보완이 함께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말 문화는 사회변화의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청정한’ 미래사회를 이루어내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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