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기자협회(회장 안직수, 불교신문 차장, 이하 불기협)가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한파’에 맞서온 불기협이 성년이 된 것이다. 자축할 만한 일이고, 축하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성년이 된 불기협을 축하하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고, 비난만 메아리쳐 온다. 불기협의 20주년 기념사업과 교계 언론사의 ‘현실과 미래’에 몰아친 ‘바람’은 매섭다. 바람에 ‘아상 중심적’ 비난과 비판이 혼재했다는 느낌이다.

불기협에 몰아친 ‘비난’은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책 《한국의 대종사들》에 집중됐다. 왜 이 책이 비난거리가 된 것인지 의아스럽다. 이 책 발간이 견지동 45번지 주변이 시끄러울 만한 일인지 납득되지 않는다.

한 인터넷 언론사는 “한 권의 책 때문에 원로의원 스님, 상좌, 문중, 종단 집행부까지 벌집 쑤신 듯 요란하다”고 전했다. “일부 원로의원 스님은 책을 전량 회수해 전량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당초 200권을 사주기로 했다가 책 내용을 보고받고는 대노하고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고 했다. 《한국의 대종사들》 같은 기획은 한 개인이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원력 있는 개인이 할 수 있지만, 지금 불기협이 했다. 이 일을 책 팔아먹기 위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곤란하다.

‘벌집 쑤신 듯 요란하다’는 세부 내용은 책 제목이 ‘한국의 대종사’가 아니라 《한국의 대종사들》’이란 점이 우선 지목됐다. 불교 최고의 법계인 대종사 뒤에 ‘들’이란 의존명사를 써 ‘대종사 무리들’로 격하했다는 점이 심각한 대목이란다. ‘들’이란 표현이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난 식견이 부족해 알지 못하겠다. 의존명사 ‘들’은 대종사가 단일인이 아님을 알게 하는 적확한 용어로 봐야 한다. 대종사들은 단 한 분의 대종사 스님들이 아닌 대종사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문제될 게 없다. 교계 언론이 ‘대종사들’이란 표현이 문제가 되어 쓰지 못한다면, 일반 언론은 ‘장관들’ ‘국회의원들’이란 말도 쓰지 못한다는 논리와 뭐 다른가.  <미디어 붓다> 이학종 대표는 “‘위인들’ ‘성현들’ 등의 말도 불경한 말이 된다. 트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선택의 문제지 ‘오류의 문제’는 아니다.

불기협 안직수 회장은 전·현직 불기협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기획 초기 ‘대종사’와 ‘대종사들’을 놓고 논의하는 과정에 ‘대종사’가 더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대종사들’로 제목을 결정했으나, 이번 논란으로 출판사 디자인 팀과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안직수 회장은 논란이 된 “여러 사안을 보완해 책을 다시 출간하기로 했다”고 했다. 또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는 “《한국의 대종사들》의 책이 나오지 못해 도서교환권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사실상 20주년 행사로 예정된 《한국의 대종사들》 봉정식의 의미는 퇴색됐다.

‘표지의 얼굴사진이 작고 잘렸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다. <불교저널> 웹사이트 초기 화면에 등장하는 많은 스님들과 석학들의 얼굴은 대부분 일부만 제공된다. 편집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껍데기’에 큰스님들의 법안을 잘라서 편집했다고 문제가 돼서 “책을 전량 폐기해야 한다”면 교계 출판사들은 앞으로 표지디자인과 편집하는 데 참으로 애를 먹게 생겼다. 일반 출판사들은 ‘대통령님 용안’도 맘대로 편집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다른 게 뭔지, 참 일하기 어렵다.

《한국의 대종사들》책 표지는 충분히 잘됐다고 나는 본다. 디자인이 신선하고 현대적이며, 디자인의 시도도 보기 좋다. 교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 발행되는 모든 잡지와 신문, 심지어 인터넷 언론의 웹초기 화면의 썸네일에도 ‘트리밍’은 보편적이고 일상화된 편집기술이다.

‘얼굴크기도 제각각이어서 화를 부추겼다’는 점도 우스운 일 아닌가? 대종사 스님마다 ‘법안’의 용모와 특징도 다르다. 당연히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표지 사진 박스 크기는 일률적이다. 그 안에 담긴 법안이 획일화 된 모습 일색이었다면 저급한 ‘북디자인’이 나올 것이다. 편집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책 표지는 신문의 동정 면이 아니다.

대종사 ‘30명의 순서도 뒤죽박죽’이란다. 순서를 품계 수지 순서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대종사 스님들의 ‘좌차’를 어디에 맞춰야 하는 것일까? 법랍순일까?, 아니면 대종사 법계품수 순일까? 중앙종회 의원은 ‘다선’ 순이다. 선 수가 같은 경우는 법랍순이다. 원로회의 사무처 측은 “아랫사람들이 좌차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대종사의 법계에 순위를 매기는 게 옳은 일인가? 안 회장은 이메일에 “원로회의 사무처의 의견에 따라 일부 조정키로 했다”고 했다. 원로회의 사무처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 어른들의 뜻을 반영된 더 좋은 책이 나올 것으로 난 믿는다.

불교계 의전에서 참 어려운 문제를 불기협은 《한국의 대종사들》 책에 종정 스님과 원로의장 스님을 우선 고려했다. 다른 대종사 스님들은 법계품수와 법랍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대종사 스님들을 모시는 데, 순위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대종사’ 스님들처럼 법계의 위의가 훌륭하고, 우리가 큰스님들로 모시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주실 일 아닌가? 대종사 스님을 모시는 상좌 스님이나, 문중에서 볼 때 문제를 삼겠다고 본다면 이 일 외에도 참 많은 논란이 있지 않겠는가? 비판을 위한 억지 논란을 부추기는 느낌이 짙다. 가슴이 먹먹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지만, 절집의 변화의 각박함에 세상 무엇보다 더 가슴이 답답하다.

《한국의 대종사들》서문에 “여러 사정으로 대종사 스님 전체를 담지 못한 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적었다. 대종사 스님들 중 모시지 못한 분들에 대한 예의를 불기협은 서문에 갖췄다. 어른 스님들의 섭섭함도 이해 못할 일 아니지만, 이 점이 ‘사고’처럼 비춰져서야 되겠는가?
안 회장은 “원로회의 사무처에서 추가로 취재를 요청한 스님에 대해 빠른 시일 내에 취재 및 원고 작성을 거쳐 ‘보완판’을 내기로 했다”고 했다. 빠진 부분을 채우고 보완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불기협의 ‘보완판’ 작업이 원만히 이루어지길 나는 희망한다. 더불어 이 일로 《한국의 대종사들》의 기획 의도가 비난받는 일이 없어야겠다.

비구니 스님의 최고 품계인 ‘명사’ 법계는 비구 스님의 대종사에 해당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비구니 스님이 포함된다면 책의 제목을 ‘대종사·명사’로 해야 한다”는 논리에 나는 또 답답하다. 말해 뭐하겠는가? 비구니 스님들에의 ‘차별적 예우’가 여전하고, 기자마저 그렇게 생각한 게 현실이라면, 참 비구니 스님들께 죄송스럽다. 세상의 절반, 한국불교의 절반을 책임지는 그분들께 참 송구하고, 서글프다.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 대종사를 포함한 데 강하게 반발했다는 점도 그렇다.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에서 타종단을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일로 받아들여 지지 않겠는가? 타종단 총무원장 스님들이 ‘옛 분’이 그래도 우리에겐 예우를 다했다며 회상하는 일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 ‘대표 종단’이 너그럽고 넓은 품을 보여줘야 할 일 아닌가? 이같은 정서가 조계종 전체의 일이 아니길 난 바란다.

앞으로 불기협 소속 언론사 기자들은 조계종과 조계종 스님들만 취재해야 한다는 것인지, 불기협에 가입한 주요종단의 언론매체들은 이제 조계종은 아예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지, 적절하지 않은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기가 더 어려워지겠다. 불기협은 조계종 종정 스님과 원로회의 의장 스님께 이해를 구했고, 양해도 했다고 한다. 절차와 예우를 불기협은 고민했다는 이야기다.

오·탈자 없는 책이 있겠나? 매우 위중하고, 큰 오류가 있다면 몰라도 오탈자 때문에 책을 다시 찍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출판 할 수 있겠는가? 정오표를 활용하고, 재판에서 오탈자를 잡는 것으로 충분한 일 아닌가?
안 회장은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원고 가운데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를 수정하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판단으로 수정본을 내기로 했다. 지관 스님께서 수정 원고를 보내주셨다”고 했다. 또 “다른 스님 원고 가운데 오탈자 등이 몇 곳 있어 같이 수정해 발간하겠다”고 집행부 회의결과를 통보했다. 큰 오류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겠다. 하지만 초판을 세상에 내보이지도 못하고 수정판을 내야할 정도의 큰일인지 여전히 난 이해하기 어렵다.

불기협은 짧은 일정과 열악한 여건에도 《한국의 대종사들》을 만드는 과정에 선후배들의 의견을 모으고, 추진 상황을 설명했다. 불기협은 직접 만남을 통해서, 이메일을 통해서 ‘한국불교기자협회 창립 20주년’과 일련의 사업에 대해 나름 열심히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선후배를 아우르고 ‘다른 의견’도 경청하려 했던 걸 안다. 물론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아쉽다. 하지만 부족한 점으로 일하지 못한다면 더 문제가 아닌가? 수고했다. 고생했다. 창립 20주년 기념식까지 더 힘내주길 바란다.

나는 우리 불교계 기자들이 ‘밥벌이’로만 일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박봉에 ‘등처가’로 불려도, 하루에도 수십 매의 원고를 써야하는 여건 속에서도 ‘신심과 원력’으로 팩트(FACT)를 좇는 교계 기자들의 사는 모습을 나는 안다. 교계 단체에서 일하는 많은 ‘법우’들처럼 똑같이 사는 모습을 우리는 안다. 늘 위기인 ‘신문사’에서 사는 교계 기자들의 힘듦을 선후배들은 다 안다. 이번 일이 불기협의 성년됨을 깎아내리는 일로, 비하해서는 안되겠다.

한국불교기자협회의 모든 기자 선후배들, 또 가입하지 않았지만 교계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선후배들이 건승하기 기원한다. 한국불교기자협회의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며, 그동안 불기협을 이끌어온 전·현직 집행부 선후배‘들’과 모든 회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 추운 바람에도 성성한 소나무처럼, 꿋꿋이 나아가길 바란다.

‘힘내라 불기협!’, 힘내라 선후배님‘들’.

서현욱/ 前 한국불교기자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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