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연구단의 국제학술대회가 ‘중론과 중관사상’ 주제로 오는 지난달 27일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이방인들과의 대화: 언어와 해탈”(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앤 맥도널드 교수)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용수(龍樹, Nāgārjuna) 저작 내의 맥락적 탐구”(북경대 예 샤오용 교수) △“󰡔쁘라산나빠다󰡕 제18장의 『팔천송반야』 인용에 대하여”(일본 무사시노 대학의 니사쿠 요시아키 교수) △“바비베까의 신(神; Īśvara) 개념 비판: ‘그는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야기한다.’”(보스턴대학의 데이비드 엑켈 교수) △“바비베카 vs 찬드라끼르티: MMK 1.1에 나타난 논리(四不生의 비판)를 중심으로”(일본 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의 사이토 아키라 교수) △“길장의 팔불중도(八不中道)에 대한 사상사적 이해”(동국대 HK연구단 조윤경 교수)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김종욱 연구단장은 “공성설(空性說)을 다룬 용수의 저작들에서 시작된 중관파 사상은 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크게 발전했고 동아시아 유입 후에는 삼론종 형성의 근간을 이루는 등 불교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고 세계 중관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용수의 대표 저작인 ‘중론’ 및 중관사상에 관한 주요 문제들을 다뤘다”고 밝혔다.
김종찬 기자



▲ 동국대 HK연구단의 국제학술회의에서 조윤경 교수사 발표하고 있다.

길장의 팔불중도(八不中道)에 대한 사상사적 이해

조윤경(동국대학교)



팔불(八不)은 구마라집(Kumarājīva,鳩摩羅什)이 번역한 청목(Piṅgala,靑目)석 『중론』의 귀경게와 「인연품」 첫 부분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생기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생멸, 상단(常斷), 일이(一異), 내출(來出) 개념을 모두 부정하는 八不은 『중론』의 핵심 사상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여러 논사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중국 삼론종에서도 팔불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보고 매우 중시했다.
삼론종의 팔불 해석의 특징은 주로 삼종(三種)중도, 즉 세제(世諦)중도, 진제(真諦)중도, 이제합병((二諦合明)중도의 형식으로 『중론』의 팔불을 해석하였다는 점이다.
『중론』의 처음에 팔불이 제시된 까닭도 가르침의 으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팔불중도에 의해서 정관이 생성된다. 길장은 팔불로 인해 이제가 바르게 되고, 이제가 바르게 되면 두 가지 지혜가 생기고, 두 가지 지혜가 생겨야지만 불보살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길장(吉藏)은 이러한 자성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불생불멸의 세제중도이고, 이 불생불멸은 성공(性空)을 나타낸다고 본다.
성공은 자성이 필경공적하여 오안, 즉 육안, 천안, 법안, 혜안, 불안(佛眼)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길장은 삼종중도를 통해 가명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중도와 가명의 상즉을 드러내고자 했다. 깨달은 자의 지혜를 통한 설법과 이 설법을 통한 깨달음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앞에서 길장의 삼종중도는 모두 불생불멸 등 팔불 구문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 가운데 관건이 되는 진제중도는 인연으로서의 가명이 그대로 중도임을 표현한다. 따라서 중도는 가명에 대한 초월을 나타내는 형식을 별도로 상정할 필요 없이, 가명과 동일한 형식으로 드러나도 무방하다.
승전, 법랑, 길장의 삼종중도 해석을 살펴보았다. 삼론종은 삼종중도 체계를 통해, 이제와 팔불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중도를 해석하였다. 『중관론소』에는 길장이 선대 삼론사들의 삼종중도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중가 해석을 담은 삼종중도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자성과 가명에 관한 문제의식을 통해 가명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사실 세 논사의 삼종중도는 모두 중실의(中實義)와 중가의(中假義)를 내포하고 있지만, 길장이 『중론』에서 중첩하여 제시한 팔불에 특별히 자신의 팔불 해석을 배대한 것은 바로 중가의를 재정립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승전과 법랑의 삼종중도가 이제에 대한 중도의 초월성을 강조한다면, 길장의 삼종중도는 가명과 중도의 상즉성을 보다 강조한다. 승전은 기존의 교학체계에 대항하여, 자성을 벗어난 가명의 연기적 측면과 중도의 초월적 측면을 동시에 나타냈다. 법랑은 전통적인 중가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자성만이 아니라 가명에 대한 집착까지도 논파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가명에 대한 논파는 중가사들의 가명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는 것이면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중도의 초월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이제가 그 자체로 중도의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음도 밝혔다.
길장의 삼종중도는 선대의 교학을 종합하면서도, 가명의 위상을 한층 더 끌어올려 가명과 중도의 상즉성을 강조한다. 그는 전통적인 체용의 구분을 무화시키고 하나의 원융한 중도(一圓中)와 하나의 원융한 가명(一圓假)으로 전체를 아우른다. 따라서 길장의 팔불 해석에서는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언어형식을 고수하지 않아도, 중도와 가명의 궁극적 의미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용수(龍樹 Nāgārjuna) 저작에 대한 맥락탐구

예 샤오용 (북경대)



잘 알려져 있듯이, “모든 것 자성(svabhāva)을 가지지 않는다”고 나가르주나는 주장한다.
‘자성’이라는 것은 변화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 어떠한 것일지라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의존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방해한다.
따라서 모든 범주를 모순되고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남을까? 아니면 보존될 수 있는가 즉, 영원히 변화하는 연속체로서 존재하게 될 것인가?
후기 중관학파(Mādhyamika) 전통의 용어를 사용하면 앞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의 범주를 치명적이고 완전하게 무효화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궁극적인 단계에서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단순히 부정하여, 보다 하위의 관습적인 단계에서는 그 범주가 작용하고 기능한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인가?”
중관(중도사상 Madhyamaka)의 철학에서 “사물은 그것이 공하지 않을 때 즉 자성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하거나 소멸하거나 다른 것들에 의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성은 정의상 독립적인 동시에 변화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성이라는 방해물이 제거될 때, 무엇 때문에 사물은 여전히 생겨날 수 없으며 소멸할 수 없는가? 이 대답은 나가르주나가 지은 몇몇 게송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는 ‘만약 자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남는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성을 소유하고 있는 사물은 생기하거나 작용할 수 없으며, 반면에 자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때때로 니힐리즘(허무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주장, 즉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존재할 수도 없고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바비베카(Bhāviveka 淸辯)를 시작으로 해서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즉 ‘완전한 부정은 다만 궁극적인 단계에 적용된다.
그렇지만 관습적인 단계에서 특정한 사물들은 비록 자성을 결여하지만 작용하고 기능한다’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제설(二諦說)이 잠입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해결책을 양 극단을 피하는 중도 사상(madhyamaka)의 표준적인 설명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나가르주나의 자성에 대한 부정을 궁극적인 단계로 제한하고 관습적인 존재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이 논의를 더욱 복잡하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주제와 관련된 두 가지 의문점을 옆으로 밀어두고자 한다. 하나는 나가르주나가 저술한 문헌에서 ‘자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후기 중관학파 전통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발전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관습적 존재’에 관한 정확한 가치에 관련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물이 세속적인 관습에서 존재하고 작용한다”고 말하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적 중요성과 그리고 그것이 관념론적인 지위를 부여하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다.
두 종류의 논쟁이 있다.
붓다팔리타는 이 단락에서 중관(Madhyamaka)의 주창자(옹호자)와 경멸적인 의미인 ‘허무주의자’(nāstika)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자 하였다.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관습적 진리[俗諦]를 언급하지 않는 점이다. 모든 논의는 궁극적 실재, 즉 공성(空性)과 그것에 대한 지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는 붓다팔리타가 허무주의자의 주장과 말로써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 점이다. 차이점이란 허무주의자의 경우 속임수 혹은 무지를 가지고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관(중도 사상)의 주창자는 진실한 지각에 의해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 붓다팔리타는 인용 이후에 또 다른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기서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다.
이 예에서는 두 증인이 법정에서 동일한 증언을 한다. 한명은 실제로 당면한 사건을 본 반면, 다른 한명은 직접 보지 않았으며 매수되었거나 혹은 친구의 편에 서서 증언한다. 후자는 허무주의자와 정확히 같아서, 그의 말은 옳지만 실제적인 지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관(중도 사상)의 주창자는 진실한 허무주의자인 반면, 소위 허무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단지 그런척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거의 같다.
요약해, 나가르주나의 몇몇 게송은 ‘자성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존재하고 작용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지시한다. 나는 나가르주나의 저작들 중에서 허무주의적 부정을 궁극적인 단계로만 한정하는 문헌 전거를 찾지 못했다.
󰡔근본중송󰡕의 ‘이제설’은 붓다의 설교를 분류하고자 한 것인데, 이는 서로 다른 가르침 체계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고 언어를 불가언설적인 실재를 가르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매체로 정당화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부정을 궁극적인 단계로 한정하고, 관습적 단계에서는 실제 존재를 허용하는’ 이제설에 의해 명기된 제한은 허무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대응에서 결여되어 있다. 또한 붓다팔리타의 주석과 같은 󰡔근본중송󰡕에 대한 초기 주석전통에서도 결여되어 있다.
나는 2017년에 출판한 논문에서 중도(middle position)는 󰡔근본중송󰡕과 초기 주석서들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두 가지 진리보다는 궁극적 진리[眞諦]만에 기반 하여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도를 이제설과 짝을 짓는 아이디어는 중관(Madhyamaka) 전통에서는, 중도를 지키기 위하여 관습적 단계에서 존재를 인정한 바비베카 이전에 도입되지 않았다.
나가르주나가 중도를 주장하고 허무주의자라는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성(svabhāva)을 반박하는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문맥상의 한정은 나가르주나의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에 기반한 후대의 각색이다.
따라서 나가르주나에 있어서 만약 자성이 반박된다면 우리의 개념이 만드는 모든 세계는 붕괴하게 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어떠한 단계에서도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된다.



‘쁘라산나빠다’ 제18장의 ‘팔천송반야’ 인용에 대하여

니사쿠 요시아키 (무사시노 대학교)



찬드라끼르티(Candrakīrti)의 『쁘라산나빠다』(Prasannapadā, PsP)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중론』(Mūlamadhyamakakārikā, MMK) 전부를 산스크리트 원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주석으로서 유일하기에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뿌생(Louis de la Vallée Poussin, LVP)은 『쁘라산나빠다』의 텍스트를 편집했고 여러 학자들은 이 텍스트를 지금도 쓴다.
하지만 뿌생의 편집본(PsPL)에 문제가 있으므로 연구자들은 새로 발견된 사본을 참고하여 뿌생의 편집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드 종(de Jong)[1978]은 물론 크라흐(Kragh)[2006], 맥도널드(MacDonald)[2015b] 그리고 니사쿠(Niisaku은 발표자의 박사학위 논문) 등의 편집본을 활용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쁘라산나빠다』의 맥락을 더욱 자세히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발표자는 『쁘라산나빠다』 제18장의 비판본(critical edition)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 (PsPSkt)와 티벳역 (PsPTib)에 인용된 『팔천송반야』(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Aṣṭa)를 분석했다. 이 논문에서는 산스크리트와 티벳역 『쁘라산나빠다』의 인용문, 그리고 『팔천송반야』원문을 비교해 차이점을 고찰하겠다.
『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PsPSkt)의 yāvat 이후, 그리고 (c) 『쁘라산나빠다』 티벳역(PsPTib)의 ba'i nas 직후 (2) 굵은 활자로 표시한 부분을 비교해 보면 텍스트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쁘라산나빠다』 티벳역의 굵은 활자 부분이 『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의 직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물론 티벳역 『쁘라산나빠다』가 『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의 여타 사본에 기반해 번역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산스크리트와 티벳역 『쁘라산나빠다』가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된 번역을 삽입했다는 관점을 도입하면 이 차이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팔천송반야』 티벳역 (d) A계열(AṣṭaL)과 (e) B계열(AṣṭaD)을 비교하면, 티벳어로 번역하면서 이미 성립된 텍스트를 삽입하고 적절하게 “생략” (omitted)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쇼지가 지적한 대로, (c) 『쁘라산나빠다』 티벳역(PsPTib)은 (d) 『팔천송반야』 티벳역A계열(AṣṭaL)과 부합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논의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PsPSkt)의 (2) 굵은 활자 부분은 다음 문장과 무리없이 연결되는 듯하나, 분석해 보면 그 부분이『팔천송반야』(Aṣṭa) (2) 부분을 요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티벳역 A계열(AṣṭaL)과B계열(AṣṭaD)을 참고해 본다면, 원문이 그렇게 짧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2)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쁘라산나빠다』에서는 『팔천송반야』의 (3)과 (4)를 인용하여 상제(常啼)의 보살 정신을 보여주려고 의도했고, yāvat 이하 부분은 상제보살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맥을 서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PsPSkt)의 저자가 절대 처격(locative absolute)으로 상황을 설명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인용문 (a)부터 (e)까지 분석했는데 논의 사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쁘라산나빠다』 티벳역(PsPTib)에 인용된 『팔천송반야』는 산스크리트 『쁘라산나빠다』 (PsPSkt)에 있던 『팔천송반야』를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에 번역된 티벳역 『팔천송반야』을 삽입한 것이다. 이런 경우 『쁘라산나빠다』 티벳역에 인용된 『팔천송반야』는 A계열과 부합하고B계열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2.『쁘라산나빠다』 산스크리트(PsPSkt)의 편집자는 상황을 요약하여 yāvat 이후에 삽입했다.


▲ 동국대 HK연구단 국제학술회의에서 사이토 아키라 교수와 말콤 데이비드 엑켈 교수가 토론하고 있다.



바비베까의 신(神; Īśvara)개념 비판:
“그는 어떤 이에게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야기한다”

말콤 데이비드 엑켈 (보스턴 대학교)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근본중송』(Mūlamadhyamakakārik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게송을 뽑는 콘테스트가 열린다면 아마 많은 강력한 후보들이 있을 것이다.
『근본중송』에는—특히 자아(自我), 사성제(四聖諦), 그리고 열반(涅槃)에 관한 챕터에는—많은 기억에 남는 게송들이 있다. 물론 나가르주나의 게송들이 기억에 남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논쟁 속에서 쉽게 내뱉어 질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들은 논적이 가장 신뢰하는 입장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말의 단도와 같다.
하지만 첫 번째 챕터의 첫 번째 게송 보다 더 근원적인 게송은 없다. 그 게송은 이 후의 논의에 강력한 기반을 제공하여 나머지 챕터들은 그곳에 표현된 기본적인 통찰을 불교도들이 실재의 범주들로 간주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게송은 명쾌하고 날카롭다. 그것은 중관의 사고를 특징짓는 내장된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의도하고 있는 범위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에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적용되도록 되어 있다. 산스크리트를 모른다 할지라도 순전히 “na”라는 단어의 반복을 통해 여전히 게송에 담긴 부정(negation)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영어로는 “no”라는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도 다음과 같이 복수의 부정의 힘을 표현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자체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그 둘로부터,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디서도 발생한 적이 없다.” 이 게송의 의미는 종종 “발생한”이라는 용어의 형식에 가려져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단순하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것도 생겨난 적이 없다는 것을, 보다 구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도 발생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챕터를 여는 “발생의 부재”라는 주장은 『근본중송』의 처음에 위치한 나가르주나의 귀경게의 공식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온전히 깨달으신 분, 스승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분, 소멸함이 없는, 발생함이 없는, 끊어짐이 없는, 영속함이 없는, 단일하지 않는, 복합적이지 않은, 옴이 없는, 감이 없는 연기(緣起)를 상서로운 희론의 적멸로 가르치신 분께 경배를 올린다.”
말하자면, 부처는 발생함이 없는 연기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발생의 부재”의 중요성은 해당 단어를 귀경게의 두 번째 단어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강조되어 있다. “소멸함의 부재와 발생의 부재가 부처가 연기라 가르치시는 것이고 그 분께 경배를 올린다.”
만약 『근본중송』 나머지 부분이 첫 번째 챕터 첫 번째 게송에 대한 각주라면, 첫 번째 챕터의 첫 번째 게송은 나가르주나의 귀경게에 대한 각주이다.
『근본중송』 1장 1에서 나가르주나가 구사하는 부정의 논리적 구조는 사구부정의 익숙한 형태를 따른다.
X가 아니고, X가 아닌 것도 아니고, X이기도 하고 X가 아니기도 한 것도 아니고, X도 X가 아닌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러한 형태의 논법은 중관 논서에 광범위하게 발견되며 이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을 간과하기가 쉽다. 자신으로부터 발생하고, 어떤 것으로부터 발생하고, 혹은 자신과 다른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인이 없는 생성이라는 생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논리적인 완벽함의 분위기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그것이 언급될 필요가 있는가? 짠드라끼르띠(Candrakīrti)는 이 게송을 주석하며 기본적으로 원인이 없는 생성의 가능성을 무시해버린다. 이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바비베까(Bhāviveka)와는 조금 다르다.
바라문교의 신성에 관한 이미지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바비베까는 창조의 문제를 거론한다. 예를 들면, 그는 불교도들과 신의 추종자들의 차이를 반어적으로 지적하고는 이를 세계의 다양성의 근원으로서의 업을 부각시키는 데 이용한다.
“왜 어떤 불교도들은 행복하고 그(=신)의 추종자들을 고통 받는가? 왜 그 복받은 사람들이 신의 명령에 의해 악행을 저지르는가? 업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업’이 그것의 원인이라는 것이 말해져야 한다. 이것이 브라흐마와 끄리쉬나가 창조자들이라는 것을 논박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주장의 자세한 측면들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이야기 될 수 있고 이야기 될 것이다. 이는 바비베까가 그의 바라문교 논적들과 가졌던 논란이 많은 관계에 대해 그가 가졌던 열정과 그의 열변을 증명한다. 하지만 필자는 필자가 본고에서 논의한 것이 적어도 나가르주나가 단순히 “무원인”에서 발생하는 인과의 가능성에 대해 흘리 듯 말한 것에 대해 바비베까가 발견한 탐구할 여지가 있는 철학적 복잡함의 일면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비베카 vs 찬드라키르티:
MMK 1.1(근본중론 1장)의 ‘四種生 비판’ 논리 중심으로

사이토 아키라(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교)

나가르주나(Nāgārjuna) 작(作) Mūlamadhyamakakārikā(『根本中論』 이하MMK)의 제1장은 사물의 사불생(四不生), 즉 사물이 자신으로부터, 혹은 타자로부터, 혹은 자타의 양자로부터, 혹은 원인 없이 발생함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유명한 게송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점을 재고하고자 한다. (1) 나가르주나가 그의 논의에서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위의 게송에 그저 결론만 제시했는가, 라는 점이다. (2) 위의 게송에 대한 붓다팔리타(Buddhapālita)의 해설을 비판하는 바비베카(Bhāviveka)의 요점은 무엇이고 과연 그 비판이 논리적으로 유효한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3)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바비베카에 대한 방법론적인 비판을 통해서 붓다팔리타의 설명 방식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찬드라키르티(Candrakīrt)i의 토론에 대해 우리가 정확한 이해에 도달했는지 여부이다.
필자는 주로 (3)에 대해, 필요에 따라 (1)과 (2)를 참조하며 논하고자 한다.
첫째, 찬드라키르티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MMK(근본중론) 1장 1은 현존의 MMK 1.3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처음 세 게송의 순서를 ABh와 Zhōng-lùn에서 인용된 세 게송의 순서와 동일하게 v.1 → v.3 → v.2으로 확정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둘째, 찬드라키르티는 그의 논의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붓다팔리타의 MMK 1.1 주석에 대한 바비베카의 논증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두 가지의 논리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 셋째 결론은 찬드라키르티가 사용하는 sādya-sādhana-viparyaya(논증대상과 논증자의 역전, 換質換位)라는 합성어 중 viparyaya라는 술어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다.
이 구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숨겨진 구문 prakṛtārthavipayayena(토론 중인 주장의 의미의 역전, 즉 부정을 통해서)라는 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viparyaya라는 술어는 ‘역전’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반드시 논리적인 환질환위의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 동국대 HK연구단 국제학술회의에서 사이토 아키라 교수와 말콤 데이비드 엑켈 교수가 토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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