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일여가 선(禪)의 역사에서 또 한번의 방편으로 등장하는 것은 <선요(禪要)>의 저자로 유명한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가 깨달은 이야기이다. <선요>에 나오는 고봉의 글을 근거로 하여 그의 경험을 살펴본다.

중국 임제종 양기파로서 대혜종고 선사보다 후배인 고봉은 어느 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말에 문득 의문이 크게 일어나 먹고 자는 일도 잊어버릴 만큼 앞뒤가 꽉 막혔다. 그렇게 막막하게 막혀 6일째 되는 날 우연히 “백년 삼만 육천 날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라는 구절을 보고서 갑자기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서 곧장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 뒤 스승인 설암조흠 선사에게 자신이 깨달은 이야기를 하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 설암에게 여러 번 단련을 받아 공안(公案)도 밝혔고 남에게 속지도 않게 되었으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면 마음속에 흐릿한 것이 있음을 느꼈고, 또 일상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마치 남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느 날 설암이 물었다. “너는 하루 중 떠들썩할 때에 주인공이 되느냐?” 고봉이 말했다. “주인공이 됩니다.” 설암이 다시 물었다. “잠잘 때에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고봉은 역시 말했다. “주인공이 됩니다.” 설암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잠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을 때에 주인공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에 고봉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에 설암이 부탁하였다. “오늘 이후로 너는 불교를 배우지도 말고 법을 배우지도 말고 옛날과 오늘을 따져보지도 마라.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되,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라. 내가 한잠 자면 주인공은 결국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

고봉은 여기에서 다시 앞뒤가 꽉 막혔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렇게 맹서하였다. ‘일생을 내버리고 한낱 바보가 되더라도, 반드시 이 하나를 명백히 보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흘러 하루는 암자에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 이 일을 생각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때 옆에서 자고 있던 도반이 밀어낸 목침(木枕)이 땅에 떨어지면서 “쿵!” 하고 소리를 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고봉은 갑자기 의심 덩어리가 부서지면서 마치 그물 속에서 빠져나온 듯하였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풀리지 않았던 부처님과 조사의 여러 가지 말씀들이 모두 풀려서 의심이 사라졌고, 마치 고향을 멀리 떠나온 나그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니 원래 옛날 그 사람이어서 예전의 행동거지를 고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안정되고 태평하게 되어서 매 순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온 세계가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고봉이 처음 “백년 삼만 육천 날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라는 구절을 보고서 문득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깨달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말을 하면 분별심에 얽매이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분별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스승 설암은 고봉의 분별심을 확실하게 죽여서 공부를 마무리할 목적으로 꿈속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는지 물었는데, 고봉이 그렇다고 답하니 설암은 그러면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주인공 노릇을 하는지 물은 것이다. 여기에서 고봉의 분별심은 다시 가로막혀서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스승 설암의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고봉은 이 문제에 가로막혀서 5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밤 “쿵!” 하는 소리를 듣고서 문득 막힌 장벽이 사라지고 분별심에서 확실히 해탈하였다. 그러고 나니 부처와 조사의 말씀들에 대한 의문이 사라졌고 마치 고향으로 되돌아간 사람이 예전의 그 사람이어서 고칠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깨달음은 마음이나 행동거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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