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의 스님 진영


“한 생각 밝으면 극락이요, 한 생각 어둔 것이 곧 지옥이다.”

근·현대 한국불교에 있어서 한국불교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대의 동원스님은 선학원 제 8대와 10대 이사장을 2번 역임했다.

스님은 1901년 예천군 풍양면 신기리에서 부친 이병규(李柄奎) 공과 모친 이억순(李億順) 여사의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고, 속명은 만업(萬業)이다.

1919년, 19세 청년 만업은 도인(道人)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도(道)를 알기 위해 집을 나선지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년 만업은 전국 각지를 주유하면서 여러 스승을 만났지만 늘 가르침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악산 오세암에 발길이 닿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녘 법당에서 한 스님이 종송(鐘頌)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차종성편법계(願此鍾聲遍法界) …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아침 공양이 끝난 후 부전스님에게 본인이 생각한 종송의 뜻을 설명했다. 청년 만업의 이야기를 듣고 난 스님이 “정각(正覺)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이 된다는 뜻입니다”라고 답하고, “정각의 내용을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스님은 “깨우쳐야 안다”고만 말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후 청년만업은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또다시 길을 나섰다.

청년 만업은 정선 정암사에 도착했다. 정암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모셔온 영험 있는 도량이다. 그곳에 주석하고 있던 동일(東一)스님과 학송(鶴松)스님에게 “도술(道術)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청년 만업이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동일스님과 학송스님은 “그것은 요사스러운 사도(邪道)로 정도(正道)가 아니다”면서 “가장 크고 올바른 도는 불도(佛道)”라고 일러주었다. “불도를 닦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면 생사를 해탈하여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다”는 두 스님의 권유로 청년 만업은 결국 방황을 끝내고,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1932년 태백산 정암사에서 혜암(惠庵)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동원(東元)이란 법명을 받았다.정암사에서 1년 정도 수행한 동원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수행 처를 옮겼다. 대중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스님 회상에 들어가서 수행하고, 이어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는 만공(滿空)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과 산사의 수행가풍에 감화를 받은 스님은 마하연을 출가 본사로 정하고, 정식으로 승적(僧籍)에 올렸다.

1933년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1934년 금강산 마하연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행했다. 이어 금강산 표훈사, 금정산 범어사, 설악산 백담사, 도봉산 망월사, 통도사 백련암, 법주사 복천암, 예산 수덕사 등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36년 7월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고, 1941년에는 계룡산 갑사에서 ‘업장 소멸 및 조국해방 기원 백일기도’를 했고, 이듬해에는 설악산 봉정암에서도 백일기도를 했다.

이후 1945년 봄,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대의(大義)라는 법호를 받았다. 의로움을 실천하며 살라는 뜻으로 그 후로 줄곧 이 법호를 사용했다.

같은 해 8월15일 드디어 해방이 찾아왔다. 당시 덕숭산 수덕사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보며 정진하던 대의동원스님은 무룡(武龍)스님과 같이 덕산면 장터로 달려갔다. 1000여명의 면민이 모인 가운데 대의스님은 “이제 일제가 물러가고 자유를 찾았으니, 일심 단결하여 잘 살아보자”는 내용의 연설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스님은 면민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상경해 서울 선학원에서 3년간 <선가귀감>을 번역하여 3000부를 간행했다. 1949년에는 육군본부 순국영령 봉안소인 장충사(忠司) 사장(司長)으로 취임했다. 1953년 김천 직지사 주지를 지냈고, 1954년부터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다. 서울 화계사 주지(1954년), 서울 조계사 주지(1955년), 경기도 종무원장(1956년), 계룡산 갑사 주지(1957년), 조계종 총무부장(1958년), 속리산 법주사 주지(1959년), 조계종 감찰원장(1960년), 선학원 이사장(1967) 등의 소임을 보면서 종단중흥과 정화불사의 전면에 나섰다. 이밖에도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1969년), 대한일민계몽회 총재(1970년), 조계종 장로(長老,1971년), 대한불교 총연합회 이사장(1972년), 한민족총회 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1974년)을 지냈다.

스님은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전 심광사에 주석할 무렵, 스님의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 원력으로 심광사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다른 스님이나 신도들이 “시끄럽다”고 불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희망”이라며 언제나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스님은 다락에 보관해 놓은 과일을 어린이들의 간식으로 내어 놓았다. 그런 덕분에 1970년대 심광사는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스님은 법문을 하실 때,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첫째는 부모님의 은혜이고, 둘째는 국가의 은혜, 셋째는 스승의 은혜, 넷째는 친구의 은혜이다. 대의스님은 “이것이 대(大)우주의 진리이며, 인간 생활의 법칙이며 사회의 원리”라면서 “이 진리와 법칙에 순응하는 자에게만 삶의 광명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의 스님은 ‘효도가’를 통해 이렇게 가르침을 내렸다.

부모말씀 곧잘 듣고
부모 뜻을 잘 받들어
부모 마음 즐겁도록
이 몸 바쳐 다해보소.

깊고 깊은 부모은혜
이 몸 받고 태어나서
부모은중 모르오면
사람이라 할 수 있소.
세상에서 제일 큰 복
효도하여 받게 되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효심 갖고 살아가소.

지성으로 섬기어서
부모은공 갚으시오.

자비공덕 모르오면
사람이라 할 수 있소.

평생 수행자의 길을 반듯이 걸었고 정화불사의 전면에 나섰지만 항상 겸손했던 스님은 “많은 시은(施恩)만 지고, 허송세월하면서 승려 된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후회막급이며, 세인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1978년 6월22일 세수 78세로, 법납 47세로 조계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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