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담 스님 진영

청담 순호(靑潭 淳浩, 1902~1971) 스님은 재단법인 선학원 제7대 이사장과 조계종 통합종단 제2대 종정을 역임하였다. 아명은 찬호(讚浩), 도호(道號)는 올연(兀然), 법호는 순호(淳浩)이고, 불교정화운동 시기에는 청담(靑潭)을 법호로 썼다. 스님은 1902년 11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당에 다니다 1918년 열일곱의 나이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진주지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학생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이로 인해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주만에 방면되었다.

1921년 진주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결혼하였다. 4월에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우단(學友團) 회장을 역임하였다.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 남강 인근 진주 호국사(護國寺)에 들렀다가 선학원의 대강백 서응(瑞應)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금강산 마하연의 포명(抱明) 스님을 만나 스님의 지도하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남강 근처에서 홀로 정려(靜慮)에 드는 일이 잦았다.

1922년에 해인사에 들러 출가를 희망하였으나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용성(龍城) 스님에게 출가하려고 백양사 운문암을 방문하였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학교를 자퇴하고 지인 박생광(朴生光)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였다. 1925년 4월 일본 운송사(雲松寺)에서 출가해 약 1년간 수행하다가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등 형식적인 일본불교에 실망하여 귀국하였다.

25세 되던 1926년 5월 17일 고성 옥천사에서 경봉(鏡峰) 스님과 출가 인연을 맺었으며, 이때 받은 법명이 바로 순호(淳浩)이다. 이후 같은 해 10월, 서울 대원암 불교전문 강원에 입학하여 1928년까지 석전 한영(石顚 漢永) 대강백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청담 스님의 일대기를 종합 정리한 《청담 순호 선사 평전》에 따르면, 1954년 세납 53세에 “대처승 정화와 정통불교를 앞장서는 승려가 결혼한 스님을 은사로 하는 것은 안 된다.”며, 한영 스님을 법은사(法恩師)로 모시기로 하고 청담(靑潭)이라는 법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스님은 당시 젊은 수좌와 함께 일제의 종교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부패해 가는 승단을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전국 사찰을 순례한 스님은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28년, 운허 스님과 함께 서울 각황사(覺皇寺)에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며 불교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당시 스님은 수좌 50인과 함께 조선불교학인연맹을 결성하였으나 일제의 훼방으로 해체되었다.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만공 스님의 지도로 수선안거(修禪安居)한 스님은 이듬해인 1929년 3월 다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였다. 29세 되던 1930년 만공 스님에게 견성(見性)을 인가 받고 올연(兀然)을 도호로 받았다.

이듬해 진주 연화사(蓮華寺)에서 특별법회를 베푸는 와중에 읍소하는 가족의 간청을 못 이겨 옛 속가를 방문한 스님은 이후 10년 간 맨발로 다니며 참회 정진하였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금강산 유점사, 합천 해인사 등 전국 선원에서 철저한 인욕행을 실천하였다.

1935년 1월, 선학원(禪學院)에서 선부흥대회를 조직하고 조선불교선종을 창종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금강산 마하연 대표로 1939년 3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1회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에 참석하였다.

1941년에는 운허 스님이 찾아와 유교법회(遺敎法會)에 대해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해 3월, 승풍 회복과 불맥 계승을 취지로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유교법회가 10일 동안 개최되었다. 청담 스님은 운허 스님, 적음 스님과 함께 유교법회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유교법회에는 만공 월면(滿空 月面), 동산 혜일(東山 慧日) 스님 등 당대 고승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유교법회에 동참한 스님들은 당시 불교계가 가진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하여 율장 정신과 경건성, 위의 회복을 주 대안으로 삼았다. 부처님의 유훈인 《유교경》과 율장, 《범망경》 그리고 조계종지를 중심으로 일정이 진행되었다.

유교법회 후 범행단(梵行團)을 조직하여 선(禪)과 율(律)의 종지를 선양하였다. 이 때 만공·한영·상월·영명·서응·청담·운허·동산 스님 등 고승 4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해 가을, 청담 스님은 예산 수덕사에서 퇴옹 성철(退翁 性徹) 스님을 처음 만났다.

1943년 보은 법주사 복천암(福泉庵)에서 성철 스님과 수행하던 중 초파일에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초석이 된 영산도(靈山圖)를 구상하였다. 불교정화를 향한 스님의 원력은 해방 후 성철 스님과 30여 대중이 함께 한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져 반향을 일으켰다.

1954년, 선학원에 불교교단정화추진위원회가 설치되고 전국 비구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효봉 스님의 요청으로 정화운동에 합류한 청담 스님은 8월 열린 1차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서 선서문을 작성하여 교단정화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9월에 개최된 2차 전국비구승대회 임시종회에서 도총섭과 총무원장 소임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스님은 순교단(殉敎團)을 조직하고 종헌을 제정 공포하며 정화운동을 총지휘하였다.

갖은 곤욕과 시시비비 가운데에서도 청담 스님은 묵묵히 정화불교의 과업을 진행해 종단의 대소 소임을 짊어지며 쉬지 않고 꾸준히 인욕 정진하였다. 1955년 8월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선출되었고, 다음 해 사임한 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청담 스님은 대중교화와 불교홍법에도 전심 진력하였다.

1956년 11월,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58년 11월에는 태국에서 열린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60년에는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현 불교신문)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에 취임하였다. 1961년 11월에는 중창한 서울 도선사(道詵寺) 주지 소임을 맡았고,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에 취임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62년 2월에는 룸비니 한국협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4월에는 불교재건비상중앙종회 의장에 취임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稟受)하였다. 1964년 9월에는 동국학원 이사에 선출되었고, 2년 후인 1966년 9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재임하였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재단법인 선학원 제7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한편, 1966년 12월 대한불교조계종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1967년 1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총재, 8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장, 다음 해 10월에는 대한민국종교인협의회를 설립하고 의장단에 피선되었다. 1969년 3월에는 한국불교 총연합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70년 7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재임한 스님은 광복절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이어 9월에 3·1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0월에 세계불교연합회 장로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9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불교회관을 기공했고,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세계고승합동법회에 참석하는 등 불교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쉼 없이 불법을 펼쳤고 잠시도 방일치 않던 스님은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납 45세로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스님이 걸어간 길은 중생교화를 위한 인욕과 쉼 없는 보살행 실천의 연속이었다.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수도정진에 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번뇌를 타파하기에 애썼다. 수행의 길이 녹록치 않음에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고 했던 평소의 지론과 용맹정진의 자세는 젊은 수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스님의 사자후는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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