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선정과 지혜를 얻는 일일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대열반에 들어가는 것도 이 선정과 지혜라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과 지혜에 들어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문을 할 때면 항상 선정에 들어갔다가 선정에서 나와서 법을 설하였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에 들어계시다가 선정에서 나와서 󰡔대방광불화엄경󰡕이 설해지는데 그 선정에서 구상하신 지혜의 법문을 중중무진법계연기라고 한다. 법화경에서도 무량의처삼매에 들어있다가 선정에서 나와서 󰡔묘법연화경󰡕이 설해지는데 그 선정에서 구상하신 지혜의 법문을 제법실상이라고 한다.

이렇듯 부처님이 어떤 선정속에서 어떤삼매에 들어 있느냐에 따라 설해진 법문이 달라지고 상대하는 대중들에 따라 법문의 깊이가 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도 오른쪽에 해당하는 우면제자(右面弟子)로 지혜제일인 사리불존자가 있고, 좌측에 해당하는 좌면제자(左面弟子)로 선정제일인 목건련제자가 있다. 곧 선정과 지혜에 항상 들어계신다는 부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열반경에서는 부처님이 선정에 드시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하려는 까닭이며, 선근을 심지 못한 자들에게 선근을 심도록하려는 까닭이며, 이미 선근을 심은 자에게 선근을 늘어나게 하려는 까닭이며, 선근의 과보가 미숙한 자에게 이를 성숙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이미 성숙한 자에게는 이를 아뇩다라삼먀삼보리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선한 법을 하찮게 여기는 자에게 법을 존중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방일한 자들이 방일을 여의게 하려는 까닭이며, 문수사리등 여러 대보살들이 함께 논의 하려는 까닭이며, 경을 읽고 외우기 좋아하는 이들을 교화하여 선정을 사랑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성행(聖行)과 범행(梵行)과 천행(天行)으로 중생을 교화하려는 까닭이며, 함께하지 않는 깊은 법장을 관찰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방일한 제자들을 꾸짖되 여래는 항상 고요하면서도 선정을 좋아하거늘 하물며 너희들이 번뇌를 다하지 못하고 방일하겠느냐고 고 꾸짖으려는 까닭이며, 모든 나쁜 비구로서 여덟 가지 부정한 물건을 받아두고 욕심이 적지않아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를 꾸짖으려는 까닭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들은 바 선정법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니, 이런 인연으로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수사리등 대보살과 함께 논의 하려는 까닭이란 문수사리 등 대보살들은 십주(十住)에서 이미 생사의 분단생사를 끊었고, 십지(十地)에서 반야·법신·해탈을 이루어 법계 어디든 제도할 중생들이 있으면 그곳으로 법신을 나투어 제도할 수 있고, 반야의 지혜로 가장 깊은 번뇌인 무명번뇌를 끊어서 업에 끌려서 생사를 이루어지는 분단생사는 물론 변역생사에서 해탈하며, 견혹·사혹·진사혹의 뿌리가 되는 근본무명 번뇌를 끊어서 중도 실상을 증득해 가므로, 나날이 불도를 장엄해 가는 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들이 수행할 때는 이런 대보살의 보살 정위(正位)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보살부류와 함께 하므로써 보살도가 갖추어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보살정위는 선정과 지혜를 닦지않고 들어갈 수 없으며, 보살과 같은 부류에 들어야 법을 묻고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행·범행·천행이란 중요한 세가지 보살행이다. 성행은 성인들이 닦는 계행 정행 혜행을 말한다. 대열반을 듣고 이 법을 믿으므로 일체 재물과 권력과 명예 등을 버리고 정법으로 바른 행을 실천하여 무상도를 구하는 행이다. 범행은 보살이 청정한 행으로 자비심으로 중생의 고를 없애고 안락을 주는 행이다. 천행은 천연의 청정 도리를 닦아 익히므로, 성행은 곧 진제삼매이고, 범행 영아행 병행은 속제삼매이며, 천행은 중도왕삼매라고도 한다. 모두 선정과 지혜로 닦아가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이런 대열반의 선정은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소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대열반이 무상정(無相定)이라 하고 있다. 모습이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니 우리는 그 특징으로 알 수밖에 없다.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남자여 열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無相]. 무엇을 열가지라고 하는가. 빛깔의 모습, 소리의 모습, 향기의 모습, 맛의 모습, 닿는 모습, 나는 모습 머무는 모습, 무너지는 모습, 남자의 모습, 여자의 모습이 없다고 한다.”

중생들은 이런 모습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음을 내고, 어리석으므로 애착하고, 애착하므로 속박당하고, 속박되어 신업·구업·의업을 일으키고, 이러 업들은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서 반드시 그 과보를 받고, 과보로 정보(正報) 의보(依報)에 따라 육도(六道)에 태어나며, 태어나므로 늙고 병들고 끝내 죽음에 이른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죽으므로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리석음을 내지 않고, 어리석음이 나지 않으므로 애착이 없고, 애착이 없으므로 속박이 없고, 속박이 없으므로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지 않으므로 죽는 일도 없고, 죽는 일이 없으므로 항상[常]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락·아·정의 대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열 가지 상(相)이 없는 경지에 들려면 삼매의 선정상(禪定相)을 닦아야 하고, 때때로 지혜상(智慧相)을 닦아야 하고, 때때로 사상(捨相)을 닦아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와 선정은 수레의 양 바퀴와 같아서 한쪽으로 치우치지않아야 똑바로 불도에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사(捨)를 닦은 이유이다.

치우치는 쪽을 잘 덜어내고 잘 버리면 수레는 똑바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대열반의 길을 놓치고 있다. 이럴 때 집착하는 마음을 덜어내고 지혜와 선정이 균형을 이루어 나아가면 대열반의 문으로 곧 바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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