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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상 학습 수용…평생 참선 생활선 제창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주최 만해 한용운 추모학술회의 지상중계(요약)
2018년 06월 11일 (월) 16:53:24 김종찬 기자 kimjc00@hanmail.net


   

1주제
만해 한용운의 자아(自我)개념과 선(禪)

정영식(고려대장경연구소)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다양한 색깔을 지닌 사상가이다. 우선 그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만해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 주로 이 분야에 집중되어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승려였으며 선사였다. 비록 그가 ‘수많은 수행납자들을 지도했던 선승도 아니었으며 이름난 선방에서 오랫동안 안거를 했던 수행자도 아니었지만’, 29세인 1907년에는 강원도 건봉사에 들어가 하안거와 동안거를 마쳤으며, 수행의 결과 1917년에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참선을 놓지 않았는데, 심우장에 거처하면서도 매일 참선을 행하였으며 특히 60줄에 들어서기 시작한 1930년대에는 선에 관한 논설들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1932년에 발표한 「禪과 人生」, 1933년에 발표한 「禪과 自我」, 1935년에 발표한 「文字 非文字」, 1937년에 발표한 「尋牛莊說」과 「禪外禪」 등이 그것이다.

만해는 불교를 ‘자력(自力)의 종교’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력신앙의 표상인 염불당을 폐지하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표적인 자력신앙인 선은 만해의 의중에 맞는 것이었다. 만해에게 있어서 참선이란 ‘마음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만법을 현현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서 마음이 ‘스스로 자체를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만해는 주장하였다.

철학은 현상에 대한 탐구인 반면, 참선은 이 현상을 지어내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과 철학은 구별되어야 한다. 만해는 참선과 철학에 대해 “참선은 체(體)요 철학은 용(用)이며, 참선은 스스로 밝히는 것이요 철학은 연구며, 참선은 돈오(頓悟)요 철학은 점오(漸悟)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해는 조계종의 승려로서, 한국 전통선의 입장에 서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입적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한국 전통선이란 내용적으로는 6조 혜능(慧能)을 시조로 하는 남종선이며, 법맥으로는 중국의 임제종을 잇는 것이었다. 또 수행방법으로서는 간화선을 행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만해는 남종선을 계승하고 있으며, 수행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유일한 수행법으로서 간화선을 들고 있다.

만해는 간화선이 ‘중도(中道)를 취하는 수행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만해는 참선에 있어서는 ‘어떠한 마음의 작용도 그치는 것(灰心滅志, 昏沈)’과 ‘마음으로 사량하고 궁구하는 것(苦思極索, 掉擧)’를 모두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양자의 폐해를 떠난 중도적 수행법이 간화선임을 역설하고 있다.

만해는 불교가 지향해야 할 것은 구세주의(救世主義)와 평등주의(平等主義)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승이라도 ‘염세적 고선(枯禪) 사선(死禪)’이어서는 안 되며,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만해는 선외선(禪外禪)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선외선이란 ‘선중 인물이 아니면서 능히 선적 언동을 하는 것을 말함이다’고 말한다. 즉 선을 배우고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예를 들면 상치장수라 하더라도 선적 언행을 하면 그를 선자(禪者)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선을 제창하였으며, 자신도 심우장에 거처할 때 거사로서 매일 참선을 닦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조계종의 선승이었던 만해인만큼, 선 전통에서 말하는 진아관념에서 자신의 자아개념을 도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 만해의 무한아·절대아는 유가의 인(仁)사상에서 영향받았을 가능성 있다.

결론적으로 만해는 다양한 주의와 사상을 학습하였으며, 또 그것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사회진화론, 칸트철학, 사회주의 등의 서양사상도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는 평생 참선을 계속한 승려였으며 선사였다.

선에 관한 그의 견해는 양가적(兩價的)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우선 그는 당시의 한국선을 ‘염세적 사선(死禪) 고선(枯禪)’이라 규정하고 한국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선의 대중화를 지향하여 생활선·선외선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선사상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간화선을 견지하였으며 ‘간화선이야말로 유일한 수행법이다’고 주장하였다. 만해는 일본견학 등을 통해서 조동선(曹洞禪) 등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화선이 최고임을 주장한 것은 흥미롭다.

한편 만해는 자아개념의 외연을 가족, 사회 내지 전우주에까지 확대하여 무한아, 절대아의 개념을 창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무한아, 절대아 개념이 형성된 배경으로서 칸트, 선, 유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특히 선불교의 초목성불설은 위진남북조시대 이후로 중국불교의 중심사유가 되었던 불성론에 기반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불성론의 입장에서 보면 만해의 자아관념은 그다지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에 관한 논의가 그러하다. 만해가 말하는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에 관한 논의 자체가 비록 칸트의 용어로서 단편적으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단순히 상즉상리(相即相離)의 관계로서 해소하려고 한 것은 무리였다고 생각된다.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 사이에는 보다 복잡한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개념에 관한 한 철학적 깊이와 논리의 엄밀성을 만해에게 요구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만해의 무한아·절대아 개념은 그의 이론적 천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국·만물에 대한 사랑과 체험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해의 소망은 자아개념을 확대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평등주의·구세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2주제


만해학 연구 성과와 과제(불교사상과 개혁론 중심)

오 경 후(동국대 불교학술원)


만해 한용운에 대한 연구는 한국 불교사 연구에서 원효 다음으로 그 연구 성과가 많다.

만해의 불교사상은 화엄사상과 선사상에 기초한다는 연구 성과가 있었다. 또한 만해의 개혁론 연구는 그의 문학 연구 다음으로 많은 성과를 양산하고 있는데, 만해가 평생토록 불교 개혁을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은 이유다. 우선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나온 배경을 ‘자각’이라는 관점에서 살핀 연구가 있었다.

2006년 이후 만해의 불교사상과 개혁론에 관한 연구 성과는 불교개혁론이 21편, 불교사상은 11편의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다.

만해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불교를 기반으로 한 ‘근대’, ‘서양철학’속에서 검토되었다.

만해의 선사상은 대체로 선불교의 전통 속에서 만해의 계승양상, 저술을 통해 선사상을 직접적으로 검토하였지만, 대체로 근대 속의 조선불교와 연관시켜 전개하고 있다.

만해의 불교대전은 불교사상의 본질과 근대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표적 저술이다. 송현주는 만해의 <불교대전>과 동시대 일본과 서구에서 편찬된 근대불교성전을 비교 검토하였다.

만해의 생애와 사상, 활동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대는 만해의 정체성과 행적을 살피는데 소홀히 할 수 없는 시기이다. 만해의 근대인식은 불교와 서구사상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만해의 불교유신론은 불교개혁론이기도 하다. 때문에 만해와 근대·개혁이 만해의 사상과 행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 분야는 양적 질적 증가가 여전히 꾸준하다. 연구 성과는 대체로 <조선불교유신론>을 기초자료로 그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전문 학술지에 발표된 만해의 불교사상과 개혁론에 관한 연구 성과는 약 32편이다. 80년대부터 2006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해당분야의 연구 성과가 38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수적 측면에서 변화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주제가 지닌 가치를 생각한다면 시와 문학연구에 비해 매우 일천한 상황이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한 불교와 근대, 불교와 개혁, 그리고 <불교대전>·<십현담주해>와 같은 저술은 만해의 불교사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해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해의 불교개혁론과 결부된 사상은 연구시기와 상관없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다는 입장이다. 만해의 평등과 구세는 그의 민족·평화·정치·사회참여 사상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만해의 불교사상과 서양철학과의 관계는 그가 비록 서양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가 더욱 심오하고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다. 예컨대 불성론을 중심으로 한 불교사상은 어떤 이념보다 우선한 인간존재의 근원을 바라보는 禪과 함께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 진보해가는 미래세계의 사상을 담보한 가정 적절한 종교사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불교관련 저술에 대한 연구는 초기 서지적 연구에서 벗어나 동시대 서구와 일본에서 간행한 불교성전류를 비교하였으며, <십현담주해> 역시 원저자와 김시습, 그리고 만해의 인식을 각각 분석하여 차별성을 규명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비교분석은 동시대 국내외 사상가들과 만해의 개혁론을 소개하고 분석하여 만해 개혁론이 지닌 특성과 가치를 규명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태도는 저술의 서지학적 측면과 만해 사상만을 강조했던 이전의 연구경향에서 확실히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만해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근간인 만해의 불교저술과 사상에 대해서는 그 연구가 수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불교계와 학계가 만해에 관심 가진지가 짧았던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수적 질적 측면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만해의 불교사상과 개혁론이 지닌 복합적 성격에 대해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연구 성과에서는 만해의 개혁론의 성격이 선명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였다. 만해사상이 단선적으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해 개혁론의 총론과 각론을 살폈을 때 그 선명성과 혼재성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주제
만해 한용운의 시대인식 변화에 대한 연구

김경집(진각대 교수)


1910년대 한국불교에 대한 만해의 인식은 개혁이었다. 그는 1910년 3월과 9월 두 번에 걸친 승려의 결혼문제를 제시하여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1914년 불교대전을 발간하여 정체된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런 인식이 형성된 것은 출가 후 일본 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만해는 1919년 3.1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한 이후 한평생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독립의식은 어린 시절 선친의 교육과 의병활동, 출가 후에는 臨濟宗 설립운동, 그리고 세계를 주유하면서 열강에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인식하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그는 선친에게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 걸사의 언행, 세상 형편, 그리고 국가 사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교육의 영향으로 스스로 의인, 걸사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1920년대 만해는 불교문화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출옥 후 한국역사에 남긴 불교의 막대한 영향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취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며 불교계 인사들과 1921년 9월 法寶會를 조직하였다. 설립기념식에서 법보회의 첫째 목적은 불교를 대중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만해는 1920년대 한국사회를 암흑의 세계, 고통의 세계로 보았다. 밥이 넉넉지 못하고 옷이 헐벗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물질적 고통과, 자유가 없어 눈과 입이 제 역할을 못하는 정신적 고통을 겪는 시대로 인식하였다.

고통의 원인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인의 독립을 쟁취하여야 되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30년대 만해는 일제의 통제에 의해 끌려가던 한국불교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에게 있어 불교와 사회는 둘이 아니었고, 불교는 한국과 한국인의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을 혁신하려면 영향을 준 불교를 먼저 개혁할 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며 불교 개혁의 시작은 불교와 정치의 분리로 봤다.

만해는 신간회 경성지회장에서 물러났지만 관심과 활동노선의 지지는 계속하였다. 1930년 신간회가 민족주의 계와 사회주의 계의 반목으로 해소되려 하자 양측의 반목은 신간회 개선을 위한 행동이겠지만 만약 분리되어 각자의 계급 운동을 한다면 현재 신간회가 지향한 목표를 넘어설 수 없다고 보았고, 분화는 될지언정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불교 승려이면서 사회 활동가인 만해는 한평생 한국불교와 사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국불교 속에서 활동하며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았고, 때론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고 발전해야 하는 한국불교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 현실인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1910년대 만해의 현실인식은 불교의 개혁과 독립운동이었다. 불교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승려취처를 제안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발간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할과 서적을 통해 불교계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사회에 대한 인식은 독립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 체제가 되자 세상을 주유하며 문명의 발전과 한국인의 어려움을 지켜보았다. 주권상실과 대중들의 고통을 인식한 그는 망설임 없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불교사상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으로 한국인의 자주권을 강변하였다.

1920년대 만해의 현실인식은 불교와 사회에 대한 가치의 확대였다. 불교에 있어서 문화적 가치에 눈을 떠 역사적인 자료의 수집과 전승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고유한 한국불교 문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 불교의 발전임을 인식하였다.

사회적 활동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여 독립을 지향하는 활동으로 나타났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선출된 후 여성의 권위와 역할에 대한 조언과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청년들의 의식과 자세를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런 청년운동이 불교계에도 확대될 수 있도록 이끌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단체로 발전시켰다.

1930년대 만해의 인식은 불교와 사회는 둘이 아니라는 심화된 의식이었다.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준 불교를 개혁할 때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을 혁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불교 개혁의 시작은 불교와 정치의 분리, 한국불교 통일기관의 설치, 그리고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불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더욱 심화된 사회활동은 불교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발전이라고 생각하였다. 1920년대 문제의식을 넘어 농민문제, 재만 동포의 문제, 한글장려, 물산장려, 그리고 교육문제 등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 전반에 걸쳐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자기 일은 자기가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과, 모든 산업에 있어 새 길을 개척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만해홀에서 4일 열린 만해학술회의에서 발표자와 논평자들이 종합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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