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주 스님.

석주 정일 (昔珠 正一, 1909~2004) 스님은 190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23년 남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6년 간 서울 선학원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고, 1933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 참선 정진하며 수선안거하였다.

1909년부터 2004년까지 근 백년간 재세한 석주 스님은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은 1910년 경술국치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건국, 한국전쟁 등 민족의 격동기과 혼란기를 살았다. 이 시기 한국불교 또한 민족불교가 왜색화 되고, 해방 이후 정화와 개혁의 요구가 분출되는 혼돈의 시기였다.

석주 스님은 선학원에서 수행하는 동안 만해 한용운 스님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각자들과 교우하며 민족의식을 싹틔웠다. 이러한 의식은 해방 직후부터 석주 스님을 왜색불교 청산과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불교 혁신의 기치 아래 경봉, 용담, 대의, 석기 스님과 조명기 박사, 이구열, 장상곤 등 불교 청년, 불교혁신회를 만든 이종익 박사, 여성동맹원이 모두 모여 통도사의 경봉 스님을 이사장으로 ‘불교혁신연맹’을 조직하였다. 1953년부터는 왜색불교 청산을 위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여 마침내 불교정화를 이루었다.

스님은 1958년 불국사 주지를 역임한 데 이어 1961년 선학원 이사장, 1976년 은해사 주지,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1년과 1978년, 1984년 제 7대, 제 15대, 제 23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종단 행정을 두루 맡았다. 또한 1989년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70년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 등을 역임하며 역경과 후학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스님은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거쳐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1997년에는 충남 아산에 보문사를 창건하고, 외로운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안양원을 설립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스님은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불교계에 어린이 포교가 전무하던 1965년 서울 칠보사 어린이회 창립을 시작으로 1966년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고문, 1970년 동회의 총재를 역임하는 등 종단이 미처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하던 시절, 어린이·청소년 교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 큰 이정표를 남겼다.

스님은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던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국가공휴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힘써 오늘날 모든 국민이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할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님은 후학 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1980년 중앙승가대학 초대학장, 1988년 동 대학 명예학장을 역임하며 현대적인 승가교육을 정착시켰다. 스님은 포교 원력으로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을 역임하였고, 청소년 교화와 경전 한글화에 힘쓴 공로로 1989년 제 2회 포교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5년과 1976년 비구·비구니 이부승 계단이 구성될 때, 당시 스님은 종단의 스님들에게 계율을 주는 전계대화상이었다.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제주도로 요양하러 내려갔다가 한 신도가 “건강에 좋다.”며 드린 전복죽을 공양한 일이 있다. 그 때 계단에서 석주 스님을 존증아사리〔證師〕로 모시겠다는 의견을 전하자 스님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나는 증사를 할 수 없소. 전복을 넣고 끓인 죽을 먹은 적이 있는데 어찌 내가 증사를 할 수 있겠소.”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계율을 지키지 못한 일로 증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물리쳤던 것이다.

스님은 역경 불사에도 적극적이었다. 평생 역경에 대한 원력을 세워 한국전쟁 이후 선학원에서 《불교사전》을 출판한 운허 스님과 함께 1961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해 우리말본 경전을 펴냈다. 1964년 동국역경원이 설립된 이후에는 운허 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 37년만인 2002년 9월,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완간하였다.

스님은 동국역경원 부원장 소임을 10년 간 맡았다. 스님은 그동안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안하고 출근했다고 한다. 스님 생신이라고 신도들이 보시한 돈은 전부 동국역경원 후원금으로 보시했다. 역경에 대한 스님의 원력은 남달랐다.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현우경》, 《선가귀감》 등을 번역 출판하였고,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은 직접 번역했다. 1989년부터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을 맡아 역경사업의 활성화에 진력하기도 했다.

역경불사에 대한 스님의 원력은 주석하던 칠보사 대웅전 현판을 직접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바꾸고 우리말 경전 보급에 앞장섰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의 불자들이 한글대장경으로 진리의 빛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석주 스님의 원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광주 민중들의 죽임을 목격하고는, 조국의 민주화에 나서는 정치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만해 스님의 후손이 살던 심우장에서 추모재를 올릴 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열사들의 정신을 불교가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노후복지로 집중되었다. 아산 보문사에 안양원을 설립해 어려운 노인과 스님의 노후복지에 진력을 다했다.

불교혁신운동과 정화운동을 주도한 스님은 종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바른 길에 앞장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94년 종단개혁 과정에서는 개혁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개혁을 손수 지휘하였다. 스님은 조계종 역사의 중요한 현장마다 늘 중요한 위치에서 올바른 길을 제시하며 현대 한국불교의 산증인 역할을 하였다.

스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중노릇 잘하는 것이냐고 여쭈면 ‘아침 예불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아침 공양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침 예불에 빠지는 것은 그 전날 늦게 절에 들어오거나 딴 짓을 한 것이고, 아침 공양에 불참하는 것은 그 전날 저녁에 밖에 나가서 딴 것을 먹은 것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아흔이 넘어서도 조석 예불을 철저히 하였고, 예불 끝에는 으레 좌선 정진을 하거나 108 참회를 하였다. 이후 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도량을 쓸었다고 한다.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과 포교원장, 선학원 이사장, 개혁회의 의장 등 불교계의 큰 소임을 모두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불교계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안정과 화합, 그리고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임이 다했다고 생각하면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국불교는 그 어느 때보다 석주 스님의 향훈이 그리운 때이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