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참선하여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이루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대체로 알고 있다. 오매일여란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수행을 통하여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은 경지를 만들려고 애써는 수행자들이 많다.

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다는 말은 본래 <수능엄경>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수능엄경> 제10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난아, 저 선남자는 삼매를 닦아서 상온(想蘊)이 다 소멸한 자이다.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깨나 늘 한결같으니, 깨어 있고 밝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거치른 육진경계의 그림자가 없다. 세간의 모든 산하대지를 보면 마치 거울에 밝게 비추인 듯하여 다가와도 달라붙지 않고 지나가도 흔적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오매일여의 근거이다.

상온이란 생각하여 분별한다는 말이다. 생각하여 분별함이 소멸하면 평소 꿈과 생각이 사라져서 자나깨나 늘 한결같은데, 이것은 곧 깨어 있는 마음이니 맑게 갠 하늘이나 깨끗한 거울처럼 밝고 텅 비고 고요하여 세속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일들을 밝게 비추지만 그것들에 끄달리지 않고 그것들의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깨달음을 통하여 밝혀지는 우리 마음의 실상을 나타내는 말씀으로서, 보통 사람의 분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상온, 즉 분별하는 생각이 사라지면 평소에 생각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져서 자나깨나 한결같게 된다는 말을 쉽게 이해하면, 상온이 사라진 사람은 생각도 없고 꿈도 없으니 의식활동이 정지된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어서 잠과 깸의 구별이 없다는 말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잘못이라는 것은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명백하다. 이렇게 상온이 사라진 사람의 마음은 깨어 있고 밝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깨끗한 거울처럼 세간을 모두 비추고 있지만 세간의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무의식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크고 원만한 거울과 같은 지혜라고 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듯이, 깨달은 마음은 흔히 거울에 비유된다. 거울 자체는 텅 비고 깨끗하여 아무 모습도 없으나, 온갖 모습이 그 위에 나타난다. 온갖 모습이 그 위에 나타나지만, 거울은 언제나 텅 비어서 깨끗하다. 텅 빈 거울과 그 위에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함께하여 둘로 나누어질 수 없지만, 텅 빈 거울과 나타나는 모습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즉, 텅 빈 거울과 나타나는 모습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이것을 일러 불이법(不二法)이라 한다. 우리의 분별심은 같거나 다르거나 하는 이분법(二分法)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불이법을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거울에서 일여(一如)한 것, 즉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텅 빈 거울이다. 그 위에 나타나는 모습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화한다. 거울은 원래 텅 비고 깨끗하여 언제나 한결같다. 본래 텅 빈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거울과 같은 마음 위에 나타나는 모습에 오염되어서 모습에 끄달리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고, 텅 빈 마음을 문득 깨달아서 모습에서 해탈한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다.

육조혜능이 마음은 경대(鏡臺)가 아니어서 먼지가 붙을 수 없다고 했듯이, 마음이라는 거울은 텅 빈 허공과 같아서 유리와 같은 사물이 없으므로 본래 더러운 때가 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더러운 거울을 닦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거울에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거울의 본래 역할이니 거울 위의 모습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모습을 분별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중생의 분별심을 한번 항복시켜서 모습에서 벗어나는 불가사의한 체험이 곧 깨달음이다. 이 체험을 얻는 수행방법은 없다. 오직 참된 선지식을 만나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날 문득 한 마디 말씀에 불가사의한 해탈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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