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선학원의 설립 백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선학원은 일제 식민지의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법의 정통인 선리를 탐구하고, 선풍을 선양하고, 불교중흥을 이루기 위해 만해선사를 비롯한 용성, 남천, 도봉, 석두, 만공, 성월스님등 수좌스님들이 앞장서서 설립을 하였다. 선학원은 설립이후 서정희, 여운형, 신명균, 김법린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거쳐 간 독립운동의 본산이 되어 민족해방에 기여를 했다. 또한 해방이후에는 불교정화와 개혁의 산실이 되어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불교사적으로 보나, 민족사적, 항일독립투쟁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백년전 선학원이 설립된 그 자리에서 백년에 이어 앞으로 새로 다가올 한국불교 백년을 준비하는 뜻깊은 불사가 회향된 것이다.

개관식에서 이사장 법진 스님은 “민족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고 정화불교의 기치를 내 걸며,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선학원 조사스님들은 불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포교와 교육, 복지와 신행, 불교문화의 능동적 창달을 지향하면서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냈다”며 “한국불교의 살아있는 현장에서 늘 민족의 곁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개관식과 더불어 만해 한용운선사 동상 제막식도 봉행하였다.

만해 한용운선사는 일제식민정책에 의해 불교계가 점점 침체되어 가고, 당시 본사주지등 일부 승려들이 친일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하였다. 만해선사는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13년까지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등을 돌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1919년 3 · 1 운동 때는 독립 선언서의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썼고,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다. 만해선사는 이후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는데, 감옥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만해선사는 친구이자 동료였던 최린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곧바로 인연을 끊었고, 집을 지을 때 조선 총독부 쪽으로는 창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이자 불교개혁 선각자인 만해 한용운선사의 동상이 독립운동의 본거지이자 민족불교의 산실인 재단법인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에 건립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백여년전 우리 선각자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이에 항거한 3.1독립운동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죽임을 당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를 앞세운 왜색불교가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법난의 현장에서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수좌스님들은 선학원을 설립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그 결과 민족의 독립을 맞이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불교정화와 개혁운동을 일으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바로 세웠으며, 오늘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으로 재탄생 한 것이다.

오늘 재단법인 선학원의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개관은 민족과 불교의 정통을 잇는 선학원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개관식을 통해 재단법인 선학원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선학원의 발전과 불교중흥에 앞장서는 새로운 백년의 역사를 기록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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