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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과 선정 수행
2018년 05월 21일 (월) 17:44:28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이전 호를 통해 한국 불교계의 수정주의 이해가 일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일본불교계에 영향 받은 한국의 수정주의 이해는 여러 방면으로 잘못된 지식을 재생산하고 있다.

 학술논문에 이어 설법 현장이나 불교사회운동 차원에서도 공공연하게, 예를 들면, “부처님은 선정삼매가 아닌 사유로 깨달았다”라고 주장하거나 “중생 이대로가 붓다인데 무슨 선정이 필요한가?”라든가, “부처님도 선정주의를 버렸는데 선정 닦아서 붓다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 없다”라는 주장 등이 횡횡하고 있다.

또한 “유전돈법(唯傳頓法)인데 무슨 점차차제의 선정인가?”에서 급기야는 점차차제의 선정을 부정하려다 보니 도성제인 중도를 궁극 경지인 멸성제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국불교학계가 큰 틀에서 창의적인 불교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국의 기존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기에 급급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불교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불교지식이 생산된다면 한국불교는 활력을 찾을 것이다.

1. 붓다와 비구들의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선정수행

그렇다면 석가모니 붓다에 있어 선정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수정주의를 풀면, 수정의 정은 선정을 의미하며 수정(修定)이란 선(禪)과 정(定), 즉 삼매를 닦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석가모니 붓다와 비구들의 하루, 한달, 일년 그리고 임종 때까지 지속되는 것은 바로 선정이었다.

 일반 비구들의 경우 일과의 대부분은 선정수행이었다. 다 아는 사실은 삼학(三學) 가운데 중심은 바로 정학(定學)이지 않는가! 먼저 석가모니 붓다를 보자. 초기경전에서부터 붓다는 도솔천으로부터 마야 부인의 태로 강림은 물론 태중에서나 탄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염(念)과 정지(正知)에 있었음이 강조되는데, 여기서 염과 정지는 정확히 정학에 들어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일찍이 어린 시절, 석가국의 농경 의식이 있었던 날, 초선의 선정 체험의 이야기는 불전에서 유명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불교 선정의 기원을 어린 태자의 농경제로부터 둔다는 것이다. 출가 후에도 두 선인의 이름을 빌어 선정 수행이 이야기되고, 깨달음도 선정 중에서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빠알리 본이나 대응 한역의 초기경전에서는 석가모니 깨달음은 선정을 버린 후가 아닌 선정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선(禪)을 의미하는 빠알리 jhāyato가 언급되면서 정각을 이루었음을 아래에 인용되는 게송은 물론 이러한 게송의 앞 뒤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석가모니 붓다의 오도송(悟道頌)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이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극한 마음으로 선정에 든 수행자에게 제법(諸法)이 드러날(pātubhavanti) 때 그에게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린다. 제법의 인연을 반야지혜로 통찰(pajānāti)했기 때문이다(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Athassa kaṅkhā vapayanti sabbā Yato pajānāti sahetudhammanti.)

또한 성도 후에는 4주 또는 7주간의 선정의 보림이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성도 이후에도 일정한 장소에서 오랜 동안의 좌선이나 보름 또는 2개월이나 3개월 또는 그 이상 집중적인 선정을 하고 있음이 경전의 여러 곳에서 잘 나타난다. 이 때는 아난다와 같이 공양을 배달하는 시자 이외에는 누구라도 접촉을 단절하고 선정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상사의 일거수일투족이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어떠한 상태에도 항상 선정 삼매에 있다는 표현이 쓰여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또한 항상 ‘염처(念處 : satipaṭṭhāna)'의 상태에 있다고 나타난다. 염처의 상태란 선정에 바탕한 여실지견(如實知見 : yathābhūtañāṇadassana)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여래가 소지하고 있는 10가지 힘 가운데 모든 종류의 선정(Jhāna), 해탈삼매(vimokhasamādhi)가 구족되어 있는(samāpattī) 것으로 설명된다. 이는 마지막 반열반(般涅槃)에 이르기까지도 사선 가운데 제사선의 상태에서 들었음을 한역 유행경이나 이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에서도 말한다. 이렇게 붓다의 정신적인 특징은 기본적으로 선정과 관련해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초기 경전에서 출가 비구(니)의 하루 일과는 물론 안거(安居)를 포함한 매년의 반복되는 수행 생활의 대부분이 좌선 수행의 시간으로 되어 있다. 특히 집단의 수행 공간에서도, 출가 수행자가 행해야 할 것은 ‘성묵(聖黙)과 법담(法談)’ 만이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여기서 성묵의 원어는 ariya tuṇhībhāva인데 성스러운 침묵이란 다름아닌 좌선과 같은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더 전문적으로는 사선 가운데 제2선의 지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법담(dhammī kathā)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관해 논의를 의미한다. 이러한 선정 수행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선정 수행의 전문가를 칭하는 말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초기에서 부파 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사(禪師 : jhāyin)나 대승의 유가사(瑜伽師 : yogin)나 유가행자(瑜伽行者 : yogāvacara, yogācāra)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도 마찬가지로 선정에 힘썼다고 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서 출가자와 선정에 관한 논의를 벌이는 장면에서 알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뛰어난 재가 선수행자들이 열거되기도 한다.

2. Ariyapariyesana Sutta과 한역 『라마경(羅摩經)』의 오해

성도 전의 석가모니의 갖가지 편력 수행은 많은 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으로 세존의 깨달음 전후를 담고 있는 Majjhima Nikāya의 Ariyapariyesana Sutta와 그에 대응되는 한역 『라마경(羅摩經)』이다. 경에 의하면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로부터 사사받은 무소유처정(ākiñcaññāyatana)과 비상비비상처정(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정도라 할지라도 깨달음과 열반 해탈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하여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행법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 ‘떠났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입각점은 바로 열반과 해탈 그리고 무상정등각의 지점이다. 그래서 열반의 다른 동의어인 무상안온(anuttara yogakkhema)이라는 말이 같은 경에서조차 10여 차례나 반복적으로 강조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전의 맥락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을 생략한 채 ‘붓다는 수정주의를 버렸다’는 식으로 ‘완전 부정‘이나 ’단절‘과 같은 ’버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전 해석에 있어 큰 잘못이다. 정확히 말해, 여기서 석가모니 붓다가 문제로 삼았던 것은 선정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열반의 지점에서의 비상비비상처정까지 이다. 즉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서는 비상비비상처정 정도의 유위 선정으로도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정조차도 넘어야 만이 진정한 깨달음과 열반이 가능하다는 맥락이다. 그렇다고 결코 사선이나 사무색이 버려지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은 경의 결론에서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는 도상에 그대로 다시 되살려져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대신 경의 말미에 결론적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제시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수멸이라는 결론은 사실 불교 수행론이나 선정사에서 매우 심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경전에서 상수멸정으로 제행(諸行)의 지멸(止滅), 모든 취착(取着)의 버림, 갈애의 멸진(滅盡), 이욕(離欲), 지멸과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하였음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멸진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비상비비상처까지도 유위법(saṅkhata dhamma)에 배치시켜 무위의 열반과 역동적으로 대비시키는 경의 구성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아함 『분별육계경』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사무색정 모두를 유위(有爲)라 분명히 한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장아함의 『포타바루경』에서 비상비비상 이후 상수멸정에서 미묘상(微妙想)까지도 완전히 제거되는 단계로 설명된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완전한 고멸(苦滅)의 열반 상태에서 비상비비상처정까지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보여주는 유명한 경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다음과 같은 입처(入處)가 있다. 여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공무변처도 없고, 식무변처나 무소유처 그리고 비상비비상처도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 달도 태양도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나는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재생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의지처도 없고 작용도 없고 그리고 대상도 없는 상태를 고멸(苦滅)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 없이 상수멸정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수멸정 없는 열반은 또한 가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든 선정 단계와 경지는 조건적인 경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는 물론 이러한 선의 앞뒤 선정 또한 결코 부정되는 맥락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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