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비록 󰡔수심결(修心訣)󰡕에서 자심(自心)을 영원불변하는 자아(自我)로 해석되기 쉬운 표현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을 실재론적(實在論的)이었다고 단정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눌은 자심(自心)을 우리에게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설파하지만, 그러나 자심을 인간 삶의 궤적을 넘어서, 실재론적으로, 해석한 적은 인용된 문구를 제외하고는 지눌 저작 전체에서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지눌은 자심을 인간을 넘어선 어떤 불멸의 존재자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한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기한 인용문에서의 일물(一物)도 존재자(存在者) 자체에 대한 언표(言表)라기 보다는 상징(象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지눌 사상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일물은 방편(方便)으로, 다시 말해서 체(體)의 측면이 아니라 용(用)의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눌은 자성(自性)의 시원(始原)을 묻지 않는 다는 점에서, 중국과 한국의 선사(禪師)들 가운데에서 가장 실재론적인 경향이 없는 선사에 속한다. 오히려 선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초기불교의 정신에 근접해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진심직설>이 가지고 있는 지눌의 다른 저작과의 이질성은 모두 용(用)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논쟁이 더욱 어려운 것이다.
③의 경우 필자는 최연식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④의 경우에도 필자는 최연식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4. 필자의 부언
필자는 최연식이 지적한 부분이외에도, 󰡔진심직설󰡕을 지눌 전체 사상과 비교해볼 때, 이질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진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심직설>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조사선(祖師禪)으로 많이 기운다.

1). 우선 불교(佛敎)라는 용어를 보자. <진심직설>(「진심이명」)에서는 불교를 교(학)으로, 조교(祖敎)를 선(법)으로 배대하여 사용한다. 이런 용례는 다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지눌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모두 불교를 ‘부처의 가르침’으로 사용하며, 선법에 배대되는 교학의 용어가 아니라 선과 교를 다 포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2). 또 조문(祖門)이라는 용어를 <진심직설>에서만, 「진심정신」, 「진심묘체」 등에서 3회 사용한다. <진심직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조문(祖門)이라는 용례는 없으며, 선문(禪門)이 약 39회, 선종(禪宗)이 약 18회, 선학(禪學)이 약 5회 그리고 선법(禪法)이 약 5회 사용된다.

3). 다음으로 지눌 저작 전체에서 오직 󰡔진심직설󰡕에서만 장자(莊子)가 2회 인용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선(禪), 특히 조사선(祖師禪)과 접점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지눌의 선적 사유체계는 노장사상적인 면이 없다는 점이 그 주요한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서 장자가 인용되고 있을까?

4). 마지막으로 <진심직설>을 살펴보면 전체 15편 중의 많은 부분에서(「진심정신」, 「진심이명」, 「진심묘체」, 「진심묘용」, 「진심식망」, 「진심소재」, 「진심공덕」 등이 그렇다.) 결론을 선사(禪師)를 동원하거나 선적(禪的)인 표현으로 끝맺는다. 즉 조사선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지눌은 다른 저작에서는 이런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눌 선법은 선과 교가 균형을 이루는 점이 그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진심직설󰡕의 저자가 지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둘째, 다른 저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승조(僧肇, 384년~414년)가 5회 인용되고 있다. 전체 분량 7128자 정도의 논문에 승조가 5회나 인용되었다는 것은 지눌이 승조를 아주 중요한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눌의 다른 저작에서 본다면 이런 정도의 빈도 수는 인물로는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0)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서 25회,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7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7회,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6회 정도 인용된다.

또 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진심직설>에서 6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4회,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6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서 5회 인용된다. 그리고 <화엄경(華嚴經)>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13회, <원각경(圓覺經)>이 <진심직설>에서 6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사기>에서 4회 인용되는 정도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면 지눌은 승조를 왜 다른 곳에서는 인용하지 않았을까?

셋째, 이 문제는 이미 연구자 최연식이 지적한 바가 있지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지눌 사유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개념들이 󰡔진심직설󰡕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눌 논리는 ‘자성의 공적영지’, ‘성기’, ‘돈오’, ‘오후수의 방식으로서의 점수’, ‘오후수의 내용으로서의 정혜쌍수’ 그리고 ‘간화경절문’이라는 6개의 핵심코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심직설>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단지 유사어구들만 보인다. 그 결과 <진심직설>은 지눌 전체사상의 체계에서 겉 돈다. 오히려 지눌 사유체계는 <진심직설>을 빼버리면 더 명료해진다.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서 필자는 총론의 면에서는 최연식과 그 문제인식을 같이 함을 각론의 면에서는 최연식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상당하게 있음을 밝혔다. 필자가 최연식과 그 문제의식을 같이 함은 무엇보다도 ‘자성의 공적영지’, ‘성기’, ‘돈오’, ‘점수’, ‘정혜쌍수’ 그리고 ‘간화경절문’이라는 6개의 핵심어구를 제외하고는 지눌의 사유체계를 논의할 수가 없는데, <진심직설>에는, 비록 유사언어가 보이기는 하지만, 동일어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심직설>을 지눌의 저작이라 하더라도, 지눌의 사유체계를 모호하게는 만들지만 어긋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눌의 사유체계 내에서 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인 것이다.

사실 <진심직설>과 지눌의 다른 저작과의 관계를 볼 때 부동처(不同處)가 사실상 동처(同處)보다 꼭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최연식의 논지가 기존 학계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뛰어 넘기에는 아직, 총론이나 각론의 면에서, 미진하다고 생각한다. 최연식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더 많은 절차탁마(切磋琢磨)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최연식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기존에 알려져 있지 않는 새 판본을 소개한 공적과 더불어, 우리 불교학계의 큰 소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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