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십호 중에 잘 오신분, 잘 가신분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잘 오셨다고 하여 여래(如來)라 하고, 잘 가셨다고 하여 선서(善逝)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 왕실에서 고대하던 왕자였으니 온나라 백성들이 환영하는 탄생이었고, 출가하여 정각을 이루고 생사고해 빠져있는 중생에게 해탈의 대법을 펴고 대도사로 대열반에 드셨으니 참으로 잘 머물다 가신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잘 머물다 가는 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머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은 머무름 없이 머물러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선남자여 일체법의 성품은 머무름 없이 머무는 것인데 어찌 여래가 머물기를 바란다고 말하는가. 선남자여 머문다는 것은 색법을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 인연으로부터 생기므로 머문다고 하고, 인연을 여의었으므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 여래는 이미 모든 색의 속박을 여의었는데 어찌 여래가 머물기를 바란다고 하는가. 수(受)·상(想)·행(行)·식(識)도 그와 같다.”

여기서 오온은 나를 뜻하고, 십처 십팔계는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 이십오유는 육도 윤회하는 삼계의 세계를 뜻한다. 나란 오온이 인연화합하여 이루어져서 인연따라 주하고 인연따라 멸하므로 무상하고 무아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서로 관계하므로[相依相關]하므로 무자성이고, 무집착 무소득이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곧 나라는 것이나 나의 재산 명예 권력도 무상하고 무아이고 나아가 공하므로 실체가 없어서 머무는 것이 없건만, 중생들은 이 모든 것들이 머무는 것[住]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 머무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이 갖고자 하고 더 많이 누리고자 한다.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도 인연따라 오셔서 인연따라 이 세상에 머물지만, 인연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집착을 여의고 생로병사를 떠나 머무르는 바가 없이 머문다고 한다.

부처님이 어느날 꾸시나가라에서 인연따라 열반에 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모두 세상에 더 머물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머문다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하지만 여래는 이미 유위법을 끊었으므로 머물지 않느니라. 머문다[住]는 것은 공한 법이라 할 수 있으니, 여래는 이미 공한 법을 끊었으므로 항상하고[常] 안락하고[樂] 나이고[我] 청정함[樂]을 얻었다. 어찌하여 여래가 머물기를 원한다고 말하는가. 머문다는 것은 이십오유를 말하는데 여래는 이미 이십오유를 끊었으니 어찌하여 여래가 머물기를 원한다고 하는가. 머문다는 것은 곧 범부요, 성인들은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무는 일도 없느니라. 여래는 이미 가고 오고 머무는 상(相)을 끊었거늘 어찌하여 머문다고 하는가.”

머무름에 집착하는 중생을 위하여 부처는 입멸에 들지만 진실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치 여러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이들을 두고 다른 나라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륻들이 어머니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실로 어머니는 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한다. 󰡔법화경󰡕 여래 수량품의 비유와 흡사하다. 훌륭한 의사에 아들들이 있었다. 아들이 독을 마셔서 실성하거나 약에 취하여 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좋은 약을 만들어 아들에게 주었으나 아들이 약에 취하여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는 이웃나라에 가서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아들들은 소식을 듣고 크게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아버지가 남겨놓은 약을 먹고 모두 병이 나았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쾌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돌아와 아들들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아버지는 실제 죽지 않았으나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죽었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여서 중생들이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으로 병이 들어 육도 윤회하며 생사고해 속에 있으므로, 이를 건지고자 방편으로 입멸을 보이신 것이요, 실제로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이와 같이 생주이멸을 보이신 이유에 대해서 여래가 항상 계신 것을 보면, 중생들이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오욕에 집착하고 악도에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반경󰡕에서는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은 머무름 없이 머문다고 한다. 진리의 세계에서 잘 머무는 법은 마치 허공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공은 동방 서방 북방이나 네 간방이나 위 아래에 머물지 않듯이, 여래도 동방 남방 서방 북방이나 네 간방이나 위나 아래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중생들은 유위(有爲)의 몸이므로 생주이멸이 있고 무상하고 무아지만, 여래는 가고 오는 상을 여의어 머무름이 없는 무위(無爲)의 몸이므로 생주이멸이 없고 상·락·아·정이라 한다. 여래의 성품이 머무름이 없으니 허공과 같이 처음과 끝이 없다. 머무름이 없는[無住] 무위이므로, 온갖 법을 알면서도 집착함이 없는 수능엄삼매라 하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힘이 있고 삿된 것을 파해 버리니 금강삼매라 할 수 있다. 머무름 없으므로 집착함이 없어서 보시바라밀이 이루어지고 내지 반야바라밀이 성취되며, 머무름이 없으므로 무상하고 무아이며 부정하고 고(苦)임을 알아 사념처가 성취되고, 생이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머무름 없이 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오온인 내가 있고 나의 재산과 나의 지위와 권력 등이 있어서 이런 것들로부터 존재 의의를 느끼고, 이런 것들이 나의 행복과 안락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은 머무르는 바가 없이 머물러야 한다고 깨우치고 있다.

오월은 부처님 오신날이 들어 있다. 온 세상이 비치는 등불처럼 부처님의 머무름 없는 자비가 함께 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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