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禮), 권력투쟁의 수단이 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기해예송(己亥禮訟), 혹은 1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복제란 상복(喪服)을 입는 제도로, 참최(斬衰)ㆍ자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의 복(服)을, 경우에 따라 3년, 1년(기년), 9개월, 5개월, 3개월 동안 입는 것이다. 이는 친소관계에 따라 차등을 주는 것으로, 예컨대 부친상엔 참최3년, 모친상엔 자최3년, 조부모상엔 자최1년 등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 지팡이를 집느냐 마느냐, 지팡이는 대나무로 하느냐 오동나무로 하느냐 등등의 구분을 두어 애써 친소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던 제도이다.

일찍이 공자가 “친족간의 친소관계와 현인을 대우하는 등급에서 예가 생기는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던 바,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복제에 차등을 두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비교적 상세히 분류를 해 놓았다. 그러나 상을 당하는 경우가 몇 가지 법조문으로 수렴될 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사는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1635년 인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아들을 낳고는 출산 후유증으로 죽었다. 당시로썬 매우 늦은 나이인 42세 때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638년 인조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15세 어린 딸을 계비로 맞이하니, 바로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당시 인조의 나이는 43세였다.

 아버지인 선조가 51세에 19세 어린 계비를 얻어 낳은 아들로 말미암아 궁중에 음모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사실을 목도하였고, 자신 또한 그 희생자였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더구나 선조와는 달리 인조는 이미 인열왕후의 몸에서 왕자를 네 명이나 본 터였다.

선조가 젊은 왕비를 얻고 6년 후에 죽은 것처럼, 인조 또한 어린 왕비를 들인 지 11년 만에 죽었다. 다행이라면 계비의 몸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행운은 이후에 벌어질 권력투쟁과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비가 죽은 뒤에 굳이 새로 정비를 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후궁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뽑아 정비로 승격하는 것이 가장 좋다. 대개 왕자를 낳은 후궁이나, 다음 서열의 후궁을 계비로 앉히면, 분란도 적고, 국가적 낭비도 없다. 그런데 선조와 인조는 굳이 계비를 얻었다. 내밀한 권력관계를 살펴보아도, 선조의 새 장인인 김제남(金悌南)이나 인조의 새 장인인 조창원은 조정의 핵심인물이 아니었다. 거칠게 말해서 어린 소녀를 품고 싶은 중년의 욕망 말고는, 외형상 별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려운 국혼은 끝내 지독히도 불행한 결과를 낳고 만다. 훗날 김제남은 가문이 거의 멸족되는 화를 당하고, 장렬왕후는 이후 전개될 권력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각설하고 장렬왕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동시에 궁중의 최고 어른인 대비가 되어 아들 효종의 상을 당한 것이다.

가례(家禮)에 의하면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므로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를 중심으로 한 서인은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갓 즉위한 현종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윤휴(尹鑴)와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왕은 특별한 존재로 왕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장자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즉 제왕의 예는 사대부나 백성들과는 다르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효종이 비록 차자이지만, 장자로 취급되어 3년복을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 비해 서인의 주장은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예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이든 사대부든 모두 동일한 예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한편 1674년 갑인년에 일어난 갑인예송(甲寅禮訟)은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사망으로 불거진 논쟁이다. 1차 예송 때와 같은 논리로 천하동례의 원칙에 따르면 인선왕후는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大功, 9월)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왕자예부동사서의 논리에 의하면 인선왕후는 장남의 며느리로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1차 때는 서인이 이겼고, 2차 때는 남인이 이겼다. 권력은 당연히 승자에게 돌아간다. 1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현종은 갓 즉위한 19세 소년이었다. 현종 자신이 여리고도 했고, 대신들의 결정을 자신의 의지로 바꾸거나 물리칠만한 힘도 없었다. 하지만 2차 예송 때는 달랐다. 현종은 즉위한 지 15년에 이르러 경륜을 갖춘 34세 장년의 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흔히 예송논쟁을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싸움이거나, 붕당의 폐단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권력이 있는 곳치고 투쟁이 없는 곳이 있을까. 투쟁은 권력의 한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싸우냐는 것이다. 자객을 보내어 정적을 죽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송은 고차원적인 투쟁 방법이다. 논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품격을 말해준다. 더하여 정치철학이 충돌하는 것이라면 그 싸움은 오히려 숭고해 보인다. 현종 연간에 발생했던 예송논쟁에는 그런 요소가 분명히 내재해 있었다.

2. 정이불체(正而不體) 체이부정(體而不正)

송시열은 사종지설(四種之說), 즉 부모가 삼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를 들었다. 정이불체(正而不體), 체이부정(體而不正), 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인데, 각각 손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장자가 아닌 서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장자에게 질병 등의 문제가 있어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경우, 맏손자가 아닌 서손(庶孫)이 후사를 이은 경우이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장자에게 계승되지 못한 경우를 크게 내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이 사종지설에 의하면 효종은 체이부정, 즉 서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에 해당한다.

송시열의 말이 근거도 있고, 특히 주자학적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지만, 왕이라는 특수한 권력을 지닌 자 앞에서는 자칫 위험한 말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가 송시열에게 사종지설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송시열이 하나씩 들어가며 해석을 하였는데, ‘정이불체ㆍ체이부정’이라는 대목에 와서 말하기를,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대왕(大行大王)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라고 하자, 정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며 말을 못하게 하였다. 2)

대행대왕은 승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시호가 없는 전왕을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효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에겐 셋째 아들 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이 아직 살아 있었다. 종법(宗法)의 적자승계의 원칙에 따른다면 왕위는 효종이 아니라 석견으로 이어졌어야 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말은 효종이 세자에 책봉될 때부터 문제가 된 정통성 시비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정태화는 제왕가의 일이라며 말을 막았다. 절대 권력자를 향한 ‘정이불체’니, ‘체이부정’이니 하는 말들은 매우 불손하며 경우에 따라선 도발로 여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현종이 어린 왕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어떤 권력자가 되어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현종의 아들 숙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3. 왕의 자리에 사적인 것은 없다, 원종추숭(元宗追崇)논쟁

정원군(定遠君, 1580〜1619)은 선조의 아들이며 인조의 아버지이다. 광해군(光海君)과는 배다른 동생이다. 광해군은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이고 정원군은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소생이었다. 정원군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과 결혼하여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綾陽君), 능원군(綾原君), 능창군(綾昌君)을 낳았다.

광해군은 즉위 전부터 정통성시비에 휘말렸다. 선조의 적자는 늘그막에 젊은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이었고, 장남은 임해군(臨海君)이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던 광해군은 정통성 시비로 머리가 아팠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서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오히려 적었다. 서자나 차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태반인데, 유독 광해군 때에 이런 시비가 일었던 것은 내ㆍ외적 정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자세한 상황을 여기에서 나열할 바는 아니지만....... 광해군은 결국 즉위한 1608년에 맏형 임해군을 제거하고, 1614년엔 적자 영창대군마저 죽인다. 기록상 사사(賜死)를 명한 적은 없지만 최소한 광해군의 묵인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죽음이었다.

적자와 장자를 제거했다고 해서 광해군의 정통성 콤플렉스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의심은 다른 왕자들을 향했고, 왕의 비위를 맞추며 권력을 쥐려는 무리들의 음모 또한 기승을 부렸다. 결국 그 화가 정원군에게 미쳤다.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체격이 좋고 무예에 능했으며, 매우 호걸스러웠다. 친구들과 무리지어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는 기질이 결국 꼬투리가 되어 능창군은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한다. 1615년에 일어난 능창군추대사건(綾昌君推戴事件)이다.

광해군 때에 일어난 역모 사건 중에서도 이 능창군 사건이야말로 광해군의 강박적 정치를 잘 보여준다. 적자와 장자를 제거했으면 되었지, 동생의 셋째 아들을 역모로 몰아 죽일 이유까지는 없었다. 호시탐탐 절대 권력자의 빈틈을 노리며 비집고 들어오려는 간신배들을 탓하기 전에, 왕으로서 대범하지 못한 국량을 탓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3)

정원군이 늘 되뇌던 말이다. 하루하루를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는 말인데, 그 처절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아들의 비참한 죽음, 자신과 가족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아들이 죽은 지 4년 후에 한 많은 이승과 이별하였다. 40세의 나이에 울화와 통음이 만든 병사였다.

1619년 광해군 11년 때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623년 은인자중하던 첫째 아들 능양군이 마침내 반정(反正)에 성공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다. 바로 인조(仁祖)이다.

조는 아버지 정원군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친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인조로 하여금 반정을 도모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음에 분명하다. 그런 부친을 인조는 높이고 싶었다. 정원군을 광해군의 자리, 즉 선조와 인조 사이에 넣으려 하였다. 이것이 원종추숭(元宗追崇)이다. 원종(元宗)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며 내려진 시호이다.

즉위 초부터 진행된 원종추숭은 인조의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인조의 뜻에 부합하여 이 일을 추진했던 대신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조정 신하는 물론, 산림(山林)의 반대가 격렬하였다. 특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반대는 인조에겐 뼈아픈 것이었다.

종법상 인조는 선조를 이은 왕으로, 선조와 인조는 부자의 의리가 성립한다.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부자관계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이는 주자가 정리한 가례(家禮)의 원리에도 부합한다. 황제나 군주의 지위를 계승한 자는 전임자의 후사(後嗣), 즉 상속자로 부자의 의리가 성립한다는 논리이다.

그러자 친부인 정원군을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김장생은 친부는 숙부로 부르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인조 입장에서는 어떻게 친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냐? 인정에도 맞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김장생의 주장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었다. 원종추숭논란이 벌어지기 100여 년 전 명나라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제(嘉靖帝) 때의 일이었다.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가 후사가 없이 31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사촌 동생인 세종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종법상 직계가 아닌 방계에서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종법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 끝에, 세종이 무종의 아버지인 홍치제(弘治帝) 효종(孝宗)의 양자로 들어가 효종을 황고(皇考), 즉 아버지라 부르고, 친부인 흥헌왕(興獻王)은 황숙고(皇叔考), 즉 숙부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결정을 수용하며 황위에 오른 15세의 황제는, 막상 황제가 되고 나서 마음이 달라졌다. 친부인 흥헌왕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던 어린 황제에 편승하여 이른바 황제파들은 흥헌왕을 형님인 홍치제의 후계자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세종이 친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하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의 시도는 신료들과 특히 젊은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은 궐문 앞에서 농성하며 황제와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이 이렇게 나선 이유는 황제란 자리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즉 황제는 사인(私人)이 아니라 천하를 대표하는 공인(公人)으로, 사적인 부자관계를 공적 영역에 끌고 들어와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사 간에 예(禮)가 어떻게 적용되어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라 전체에 엄청난 논의가 일어났다. 이를 가정대례의(嘉靖大禮議), 즉 가정 연간에 일어난 대례의 논의라고 한다.

가정 원년부터 3년에 걸쳐 일어난 대논쟁은 양정화(楊廷和), 장면(蔣冕), 모기(毛紀) 등 대신들의 파직과, 190여명의 투옥 및 유배, 그리고 17명이 장살되는 폐해를 끼치며 막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손실까지 합치면 이 조금도 생산적이지 못한 논란으로 명나라 전체가 입은 손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어린 황제의 지극히 사적인 고집이 부른 참사였다. 가정제 세종 이후 명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은 명나라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출발부터 인조는 29세 장년의 나이에 직접 반정에 참여하여 왕위에 오른 왕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인조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정원군의 비극적인 삶까지 고려한다면 인조의 뜻을 받든다고 하여 크게 비난받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선조와 인조 사이에 친부가 들어가면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계승관계가 성립된다. 명나라 가정제보다는 훨씬 많은 추숭이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한다. 그리고 왕이 된지 10년이 지나서야 원종추숭을 단행한다. 바로 전 해에 김장생이 죽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장생이 살아 있는 동안엔 왕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대신도 아니고, 한직을 떠돌다가 시골에서 책이나 쓰고 제자나 가르치던 노학자에게 왕이 굴복한 것이었을까?

4. 주자학적 이념, 천하동례(天下同禮)의 평등한 세상

김장생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30세에 이조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천거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평시서(平市署) 봉사(奉事), 동몽교관(童蒙敎官),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 정산 현감, 안성 군수, 익산 군수를 지내내다가 60세가 넘어 회양 부사와 철원 부사를 역임했다. 대부분 정치적 실권과는 무관한 한가로운 자리이거나 외직이었다. 김장생은 임명장이 내려오면 대개는 사직하고, 그나마 부임한 곳에서도 오래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년엔 아예 논산시 연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어려서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스승으로 섬긴 이래 평생을 두고 예학을 탐구하였다. 〈전례문답(典禮問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조선 예학의 주요 저술과,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을 주석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는 스승인 송익필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그가 과거시험을 거부한 것도 어쩌면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조선의 비합리적인 신분질서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송익필은 서얼출신으로 진즉부터 출세할 길이 막혀 있었기에 일찍이 과거와는 담을 쌓았던 것이다. 명문가문 출신의 김장생이 스승을 생각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차별적 신분사회에 대한 도발은 아니었을까?

송시열은 김장생의 제자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에게 수학하고, 김장생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에게서 배웠다. 효종을 ‘체이부정’이라고 했던 도발(?)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다시 나와서 앞서 말한 자신들의 견해를 고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논하여 말한 바가 저처럼 명백한 데야 어쩌겠습니까.……어떻게 잡가(雜家)의 망령된 말을 가지고 정자와 주자의 정론(正論)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4)

분명히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예는 천하동례, 즉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래야만 주자가 말하는 리(理)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도발은 도발이 아니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신분제를 타파하고, 평등한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된다. 만약 진실로 그렇다면 예송 논쟁 등으로 표출된 권력투쟁은 보편적 가치실현을 위한 투쟁이 된다. 그리고 그 투쟁은 주자학적 이념 위에 세워진 확고한 믿음이다. 주자가 바꾸지 않는 한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신념이다. 주자는 그들의 보편세계를 향한 이상을 보장하는 기반이었다. 정말로? 나는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그랬다고 믿고 싶다.

주) -----
1)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중용》
2)《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 기사
3)《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 〈원종 대왕 정원군의 졸기〉
4)《사계전서》 〈전례문답, 장지국에게 답한 편지〉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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