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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조사열전⑦ 경봉 정석 스님(1892~1982)
근현대 관통하며 용맹정진 한국불교 정통 수호
2018년 05월 17일 (목) 14:29:13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 경봉 스님.

“사바세계 무대로 연극 한 번 멋지게 해 보거라”

근·현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인 경봉정석(鏡峰靖錫)스님(1892~1982)은 1892년 4월 9일 경남 밀양군 부내면 계수동에서 출생하였고,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김영규(金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에 밀양군 죽하재(竹下齋) 강달수(姜達壽)선생 문하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명심보감(明心寶鑑)’등을 배웠다. 15세 되던 해인 1906년 8월, 모친상을 겪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16세인 1907년 6월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스님을 스승으로 출가의 연을 맺었다.

1908년 3월 통도사가 설립한 명신(明新)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 학밀(晴湖 學密)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1년 3월 명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4월 해담 치익(海曇 致益)율사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12년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고 1914년 대교과를 수료하고 만해 한용운스님에게 화엄을 수학했다. 이 인연을 바탕으로 경봉스님은 통도사에 화엄산림을 개설했다.

스님이 강원을 졸업 하자, 성해화상은 그에게 통도사 행정사무를 맡겼다.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통도사를 떠났다. 양산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당시 스님은 졸음과 망상을 쫓기 위해 머리를 기둥에 찧기도 하고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며 수행했으며, 한 겨울에 얼음 덩어리를 입속에 물고 용맹정진했다.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참된 주인공’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화두타파 일념의 용맹 정진에 몰두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2월 13일(음:11월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화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그 후 한암(漢岩), 제산(霽山), 전강(田岡), 용성(龍城)등과 서신교류를 통해 배움을 두터이 했다.

경봉 스님은 참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되 경전공부와 염불도 겸했다. 흔히 선승들이 기피하는 주지직과 포교사 역할까지 기꺼이 맡았던 대승보살(大乘菩薩)이었다.

그리고 왜색불교에 대항하여 불교개혁운동가로서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26년 차이 극복하고 위암 선생과 교유

1917년 8월 통도사 마산포교당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언론인이자 우국지사인 위암 장지연과 만났다. 위암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제와 매국노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26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보은의 탑 많은 사람 정성으로 이루어

천추만대 기념하는 그 뜻 감격하네.

관수의 구름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기차는 재촉한다만 나 홀로 어이 가리.

올 때는 봄바람이 좋더니

떠난 뒤 바다의 달처럼 서로 생각하네.

불법에 공덕 심으면 음덕 쌓이는 것.

서로 전하는 입 비석에 그 이름 영원하리.

보은일탑중인성(報恩一搭衆人誠)

기념천추감차정(記念千秋感此情)

관수유운동증별(關樹留雲同贈別)

기차최로독감행(琦車催路獨堪行)

내시초대춘풍호(來時初對春風好)

거후상사해월명(去後相思海月明)

불지수공다음덕(佛地樹功多蔭德)

상전구갈불후명(相傳口碣不朽名)

경봉 스님이 내원사 주지로 가면서 마산포교당을 떠날 때 위암 선생에게 보낸 시다. 이에 위암은 이런 전별송을 써서 답했다.

“경봉선사는 통도사의 큰스님이다. 그의 성품은 단아하고 학식은 해박하여 시를 잘 짓고 글씨도 잘 쓴다. 마산포교당에 와 머물면서 설법하고 계행을 지니니 모든 선남선녀 신도들이 신앙하고 귀의하여 계를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또한 스님의 오묘한 견해와 정진 그리고 원만하면서도 맑고 담박함을 좋아해서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스님께서 만기가 되어 장차 양산의 내원 암으로 옮기어 주석하게 되니 스님께서 몸소 시 한 편을 지어 내게 정의를 표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산승의 병과 발우는 뜬구름과 흐르는 물 같아서 머무름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오고가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데 어찌 서글픈 정이 없으랴.”

글에는 위암이 얼마나 경봉 스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는지 잘 드러나 있다.

선학원 4대 이사장 맡아 한국불교 정통 수호

경봉 스님은 1925년 통도사의 양로염불만일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이끌어 왔으며, 1930년 4월 건봉사 두마포교당 포교사를 지내고, 1932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에 취임하여 이후 50여 년간 후학을 지도했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39년 10월 양산 내원사 주지를 지냈다.

선학원과도 밀접한 인연을 갖고 있다.

스님은 1941년 3월 지금의 선학원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4대 이사장을 맡아 한국불교의 정통을 수호하는 데 기여했다. 1949년 다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고, 1953년 11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간 이곳에서 주석하면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 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67년 4월 서울 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건립했으며,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여 학인들의 공부를 돕기도 했다. 1973년부터는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 암자에서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는데, 1981년까지 계속했다.

한 시와 시조, 묵필에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 스님이 지은 것이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華消息)》, 일기집인 《삼소굴일지(三笑窟日誌)》 등이 있다.

그 중 18세부터 85세까지 67년간 세세하게 그날의 일을 기록한 《삼소굴일지》는 선지식으로는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한국 불교 최근세사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한암, 용성, 만공(滿空), 효봉(曉峰)등 당대 큰스님과의 서신과 선문답 등도 여기에 담겨 있다.

경봉 스님은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와 장엄석등 18좌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호국선원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 27일) 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느낀 시자 명정(明正) 스님은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뵙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스님은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말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였다.

스님은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다. 또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몸소 실천했으며, 오랫동안 승속(僧俗)을 아우르며, 마음 깊은 곳에 지혜의 등불을 밝혔던 선지식이었다. 경봉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청정수행과 교화행의 모범을 보인 큰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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