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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진종 스님
대각운동 전개, 사찰자립 실천 ‘선승의 거벽’ 추대
2018년 04월 12일 (목) 10:15:33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 용성 진종 선사 ‘각설법망경’ 수록 진영

용성 진종(龍城震鐘, 1864∼1940) 선사는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鐘),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잡은 물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모두 살려주는가 하면, 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고사리가 아프니 그만하자고 어머니에게 호소하는 등 남다른 감성을 지니셨다. 일곱 살 무렵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열네 살이던 어느 날, 꿈에서 부처님을 뵙고 정법 계승의 실천에 대한 계시를 받고 불연(佛緣)이 깊어졌으며, 스스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 홀로 산사를 찾았다.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은 꿈에 부처님을 뵌 바로 그 절로, 주지인 혜월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이 계시할 때 범종이 진동하였다 하여 진종을 법명으로, 덕밀암이 속했던 남원의 옛 지명인 용성을 법호로 받았다.

스님은 열네 살에(1877년) 덕밀암으로 출가하였지만 환속하였다. 열여섯 살에(1879) 합천 해인사로 재출가하여 극락암에서 정식으로 출가 득도한 후, 수개월간 기본 교육을 받았다.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환성(喚醒)스님의 법을 이었다.

몇 달 후 각처의 선지식을 찾아 배우기로 결심하고 찾은 곳이 고운사였다. 이곳에서 9개월 동안 수월스님에게 전수 받은 주력수행을 시작하였다. 3년여 동안 주력수행에 몰두하던 어느 날, 문득 우주의 근원에 대한 자문자답이 홀연히 일어나면서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이때가 열아홉 살(1882)이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선수행에 입문해 네 차례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철대오하셨다.

스님은 스물세 살(1886) 되던 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선산 모례정 근처에서 용맹결사 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셨다. 또한 한국불교의 계율파괴와 선의 몰락을 우려한 나머지 1925년 6월 62세의 노구를 이끌고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결성하신 점으로 보아, 선을 중요시 한 스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확철대오 이후 17여 년 동안 보림의 시기를 갖던 스님은 1903년 묘향산 상비로암에서 처음으로 수선회(修禪會)를 개설하는 등 선법을 펼치기도 하셨다. 스님의 뛰어난 선지(禪旨)는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범어일방임제종지’에서 “당시 선계(禪界)를 돌아보면 모두 용성을 거벽으로 추대한다”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철원 보개산의 관음전이 낡아 증축할 때 틈틈이 ‘선문요지’를 저술하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1909년 꿈속에서 다시 만난 부처님께 ‘어찌하여 너는 전날의 정녕한 부촉을 잊었는가’라는 질책을 받고 꿈에서 깬 후 그 부촉의 뜻이 역경(譯經)임을 깨닫게 되셨다. 당시 지리산 칠불선원에 계셨던 스님은 이때부터 역경 준비를 시작하셨고, 1910년 5월부터 7월까지 두 달에 걸쳐 기념비적인 저술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집필하셨다.

이후 스님은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셨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 사용을 제안한 분이 용성스님이셨다. 만해스님이 “흰 바탕에 푸른색의 대한 반도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고, 천도교와 기독교장로회측에서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용성스님은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서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고 역설하셨다.

3·1운동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사상이 담긴 경전을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경전으로 번역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결 과제임을 절감하였다. 용성스님이 굳건하게 원을 세우고 가장 먼저 번역한 경전이 『금강경(金剛經)』이다. 이 경전은 1922년 1월12일 순한글 번역으로 ‘신역대장경’을 발간한데 이어, 같은 해 1월28일에 국한문번역으로 ‘선한문신역대장경’을 내놓았다. 스님은 역경을 주도하시면서도 사업은 삼장역회(三藏譯會)에서 추진하도록 하셨다.

스님은 1913년 처음 펴냈던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재출간하셨다. 그리고 불교사상의 요체인 마음을 요약 정리한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은 대중들이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라는 것을 접하면서도 그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대중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한 저술이었다.

박한영(朴漢永)스님과 함께 불교잡지 <불일(佛日)>을 간행하는 한편 일요학교를 개설하는 등 문서포교와 어린이포교에도 앞장섰다.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선불교계 일부가 계율을 소홀히 하고 대처를 합리화하는 것에 반대하여 조선불교 혁신을 꾀하였다.

역경사업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마침내 1922년 5월 봉익동 2번지에 민가를 구입해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걸 수 있었다. 불교 혁신을 위한 대각교 표방이 공식화된 시점이기도 하였다.

이후 스님은 1925년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시작하기 전까지 『수능엄경선한연의』, 『수심정로』, 『각정심관음정사총지경』, 『금비라동자위덕경』, 『팔상록』, 『원각경』, 『선한문역선문촬요』를 역경하고 저술하여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양에 해당하는 2만 여권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1926년 대처식육을 행하는 부류들을 불가의 큰 적으로 전제하며 조선총독부에 이를 금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고, 이후 유처승려와 무처승려를 구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미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계율파괴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하던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양산 내원사 만일선원 조실로 있으시면서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옮기셨다. 조선의 독립은 교육과 교화(敎化)를 통해 민족이 깨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한글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왕생가’라는 한글 찬불가도 만드셨다.

스님께서는 1927년 대각교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시며, 해인사와 범어사에 승적탈퇴서를 보내 승적까지도 과감히 버리셨다. 경봉스님께는 편지를 보내 “선원의 종주 문제는 본 대각교의 일이 번다하여 부탁하신 청을 들어드리지 못하오니 양해하시옵소서. 교생은 승적을 제거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 승려는 축처(畜妻)를 하고 고기를 먹으며 사찰 재산을 없앰에 승수(僧數: 불교계)에 처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셨다.

스님의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행적 중 하나가 대각교운동이다. 당시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 및 중생구제와는 동떨어진 삶이 불교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하여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사찰의 경제적 자립, 교육체계의 개혁, 자주적인 불교의 건립, 한문불전의 국문 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스스로 실천 운동을 펼치셨다.

같은 시기 ‘자선자수(自禪自修) 자력자식(自力自食)’을 주장하던 백학명의 ‘반선반농운동’ 역시 불교계 혁신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께서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임시정부로 갈 것을 권유한 것은 물론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마련해 전달하시고, 1935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시면서 살신성인을 당부하셨다. 해방 후 대각사를 찾아 스님 진영에 예를 올린 김구 선생은 “큰스님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시어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셨으며,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1937년 삼장역회에서 발간한 『오도의 진리』에서 “사람들의 마음병을 다스리기 위해 십만 권의 경을 발간했으니, 이 경을 자세히 보고 수행하면 생사대사를 면하리라. 나는 지금 법문할 수도 없고 경을 다시 번역할 수도 없으니 이왕 번역한 경을 보아 생사를 면케 하시오”라며 대중들에게 책을 보고 내용을 익혀 수행과 생활의 힘으로 삼을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용성스님은 경남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드는 등 선농병행설(禪農竝行說)을 주창하셨다.

1940년 음력 1월21일 제자 동헌스님을 찾았다. “이제 절단 나버렸구나. 쇠에 녹이 슬어 쇠가 상하게 되었구나.” 스님은 같은 해 2월23일 동헌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내일 새벽 관음재일에 가련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구나. 더욱 더 수고해 다오.” 다음날 스님은 “수법제자여, 시자여, 대중이여, 그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미소를 보이며 원적에 드셨다. 1940년 2월 24일 서울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 77세, 법랍 62세이다. 





용성 진종 선사 ‘각설법망경’ 수록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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