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태자, 대신, 백성 등 1만 2807명 당 압송
의자왕 당에서 병사…금자광록대부위위경 추존
 

당나라 군사가 이긴 기세를 몰아서 성에 들어가니 왕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태자 융〔혹은 효(孝)라고 하나 오류이다〕과 함께 북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도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이 된 태에게 “왕이 태자와 같이 성을 나가셨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가 군사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좌우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뒤를 따르니, 태는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에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자, 태는 매우 급하게 된 것을 알고 이에 성문을 열고 항복을 청했다. 이어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 와중에도 왕을 꼭 한 번 하고 싶었는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다. 그래도 왕을 한 번 해봤으니 둘째 태는 참으로 행복했을 거라고 할 수 있나? 이런 가족이 왕족이라니 백제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데, ‘정말 그랬을까?’라는 의혹도 저버릴 수 없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인데 신라가 나중에 왜곡시킨 것은 아닐지….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 2807인을 당의 수도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등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설치하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郎將 劉仁願)에게 도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또 좌위랑장 왕문도(左衛郞將 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끌고 알현하니 황제가 (의자왕을) 꾸짖기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병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문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교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도록 하고 비도 세우게 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오(吳)의 마지막 황제로서 손권의 손자(242~284)인 손호와 중국 남조 진의 마지막 황제로 수(隋)에 멸망당한 진숙보 옆에 묻힌 것 자체가 예우를 다한 것일까? 엄청나게 불명예스러운 모욕을 당한 게 아닌가 싶다. 당 황제가 좀 너무한 것 같지만 어차피 망한 나라의 왕의 이야기이니 부끄럽기만 하다.

7년 임술년에 당나라 황제는 명을 내려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가 바로 평양도로 고쳤다. (소정방은)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탈취하여 군영으로 삼고, 이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안집대사로 삼아 토번(吐蕃)을 평정하였다. 건봉 2년인 667년에 (소정방이) 죽자 당 황제는 매우 애도하며 좌효기대장군유주도독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다 이상은 당사(唐史)의 내용이다.

이렇게 당사에서 자세하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겁 많은 소정방이 참으로 대단하긴 대단했나보다. 다만 김유신보다 못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나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문무왕 즉위 5년 을축 가을 8월 경자일에 왕은 친히 대병을 이끌고 웅진성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융(扶餘隆)과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을 하였다.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연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글을 지어 “옛날에 백제의 선왕이 반역과 순응에 어두워서 함부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지 않고 인친과 화목치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또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다. 신라를 침략하여 살상하고 읍락을 파괴하고 도성을 무너뜨려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는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 입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누차 명을 내려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는데도 험함을 구실로 삼고 멀리 있음을 믿어 매번 하늘의 도리를 거슬렀다. 황제가 크게 노해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서 한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다. 마땅히 궁택을 무너뜨려 연못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삼고 폐해의 근원을 뽑아 버려 후손에게 교훈을 남길 것이나, 복종하는 자는 회유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하는 것이 선왕의 법도이며, 망한 것은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은 잇게 함이 옛날 성인들의 일반적 규범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이전의 여러 책에 전해오니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산천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동반국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제거하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여야 한다.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영원토록 번복(藩服)이 되어야 한다.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右威衛將軍 魯城縣公 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와서 권유하여 황제의 결의를 자세히 선포한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