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종고는 누가 방장실로 찾아오면 손에 죽비를 들고 늘 이렇게 말했다.

 “죽비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한다. 말을 해도 안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생각을 해도 안 되고, 헤아려 보아도 안 되고, 소매를 떨치고 곧장 가 버려도 안 되고, 어떻게 하든지 안 된다.”

방장실로 찾아가는 사람은 도(道)를 물으러 가는 것이고, 방장 스님의 말씀은 그에게 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대혜종고는 도를 보여 줌에 죽비를 손에 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죽비라고 부르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따라 분별한 것이니 도가 아니다.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말한 것이니 역시 분별이지 도가 아니다.

죽비라고 해도 안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니 침묵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나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침묵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고 생각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돌아갈 것이지만, 길을 전혀 찾지 못하고 꽉 막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전혀 소용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으니 함정에 빠질까봐 발버둥 치는 사람을 더욱더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고, 절벽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손을 떼어내는 것이다. 말할 수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내던져 버리고 여기에서 도망가는 것이다.

그런데 대혜종고는 이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외면하고 도망가면 도를 깨달을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 대혜의 죽비 이야기를 들은 당시 주봉이라는 장로는 “제가 스님의 죽비 말씀을 들으니 마치 죄인의 재산을 모조리 기록하여 몰수하고는 다시 그에게 재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여 그 답답한 심경을 표현하였다. 대혜종고는 이것을 일러 마치 생쥐가 덫에 걸린 것과 같아서 이제는 죽는 일만 남았다고 하였다. 무엇이 죽을까? 덫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므로 마음이 죽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마음의 덫을 일러 선에선 옛부터 금강권․율극봉이라 한다. 금강권이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으로 만든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결코 뚫고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고, 율극봉은 밤송이라는 뜻으로서 목구멍에 밤송이가 걸려서 고통스러운데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가리킨다.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고 도에 통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덫에 걸려야 한다. 어떤 판단도 용납되지 않고 어떤 행동도 허락되지 않는 이런 덫에 걸려 분별망상에 익숙한 중생의 마음이 스스로 항복해야 비로소 깨달음과 해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선사는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아야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죽은 뒤에 다시 소생한다면 그대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종고는 말하기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자기의 죽비 이야기에 알맞게 들어맞은 것이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 마음을 항복시키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금강권․율극봉의 상황이 바로 그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불교를 배우고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이러한 금강권․율극봉의 덫에 걸리는 길뿐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 사람이 선지식을 믿고 공부하다가 이러한 덫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죽을 줄 알고 덫으로 들어가는 생쥐는 없는 것처럼, 금강권․율극봉에도 스스로 알고서 일부러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서 일부러 가는 길은 분별의 길이지 분별이 죽는 길이 아니다.

선지식을 믿고 선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결국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 늘 처해 있을 것이다. 공부인을 그렇게 만드는 선지식이 참된 선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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