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1680년(숙종 6) 5월 20일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가 죽었다. 사사(賜死)하라는 어명은 이미 닷새 전에 내려진 터였다. 사약이 내려지기 전에 모진 형신(刑訊)이 행해졌다. 선비를 고문하는 일은 조선에서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윤휴는 종1품 의정부 우찬성이 아니던가.

윤휴의 죽음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빠질 수 없다. 두 사람이 정적(政敵)으로 견원지간이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두 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신한 지 45일.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조선의 왕이 푸른 옷에 모든 의장을 제거한 백마를 타고 정문이 아닌 서문(西門)으로 내려갔다. 푸른 옷은 낮은 신분을, 의장을 제거한 백마는 백기투항을, 서문은 왕이 아닌 죄인임을 가리켰다. 죄인의 몸으로 백마의 등에 얹혀 나아간 한강변 삼전도에는 무장한 청군이 도열한 가운데 누런 휘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껏 위엄을 뽐내며 앉아 있는 청 태종을 향해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禮)를 올렸다. 세 번 큰 절을 올릴 때마다 각각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매서운 북풍이 더욱 더 차갑게 인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송시열 또한 치욕에 몸서리쳤다. 당시 송시열은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사부로 남한산성에 있었다.

▲ 우암 송시열(왼쪽)과 백호 윤휴.

병자호란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송시열은 보은 속리산으로 어머니 곽씨 부인을 찾아 갔다. 그리고 복천사(福泉寺) 앞에서 마침 이곳의 외가에 피난 와 있던 윤휴를 만났다. 윤휴는 송시열로부터 그간의 정황을 들으며 통곡하였다.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1)

송시열의 손을 꼭 잡고 윤휴는 이렇게 맹세했다. 이 때 윤휴는 21세, 송시열은 31세였다. 두 사람은 사흘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휴에게 매료된 송시열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삼산(三山, 보은의 옛 이름)에 가서 윤휴를 만나보고 3일 동안 그와 학문을 논하였는데, 우리들의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었소.2)

송시열을 만난 이듬해 윤휴는 어머니를 모시고 공주(公州) 유성현(儒城縣, 지금의 대전시 유성 일대) 유천(柳川)의 선산 아래로 이사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효경(孝經)》, 《소학(小學)》,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의례(儀禮)》와 《주례(周禮)》 등 예학에 공을 들였다. 이때 대전 회덕(懷德)에 본가가 있는 송시열과 더욱 많은 교감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이곳은 예학자(禮學者)들의 집결지였다. 회덕과 유성 일대를 중심으로 공주, 논산, 영동, 괴산 등을 아우르며, 송시열과 윤휴는 물론, 송준길,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1606〜1672),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등이 모였다. 이들은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시국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들의 의견은 국왕도 무시하지 못하였다. 의론의 중심엔 언제나 송시열이 있었다.

2. 결별

송시열과 윤휴가 언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1653년(효종 4)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으로 보면 그 전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해 논산시 강경의 황산(黃山)서원에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 담소하며 흥겨운 하루를 보냈다. 잠자리에서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은근히 윤휴를 칭찬한다. 하지만 송시열은 단호하였다.

나는 사실 윤휴의 정밀함과 깊이는 모르네. 그러나 주자(朱子)를 공격하는 한 가지 일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네.3)

여기에서 주자를 공격하는 일이란 윤휴가 주자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을 말한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에 의하면, 1652년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짓자 송시열이 “그는 바로 상산(象山)이고 이단(異端)이다.”라고 하며 비난하였다고 한다. 상산은 육구연(陸九淵)으로,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설을 반대하며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한 학자이다. 송시열에게 윤휴는 육구연의 아류에 불과하거나 양명학자로 비쳐졌다. 〈중용설〉은 윤휴가 주자학에서 벗어난 이단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윤휴의 연보에는 28세 때인 1644년(인조 22), 경기도 여주(驪州)의 백호(白湖)로 이주하여 〈중용설〉을 완성한 것으로 나온다. 이 책이 윤증이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52세 때인 1668년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를 짓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처음 《중용》을 읽고 나서 비망(備忘)의 목적에 겸하여 장래 토론을 위하여 내가 본 대로 대지(大指)와 서차(序次)와 장구(章句) 등에 관해 대략 적어 놓았었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을 두고 읽고 또 읽고 늘 마음에 잊어버리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보았으나 처음에 보았던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내 학문이 진보가 없음을 알고 매우 부끄러웠다.4)

여기에 나오는 《중용》은 주자의 《중용장구》로 윤휴는 20대에 이미 주자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연보에 나오는 〈중용설〉은 젊어서 가졌던 의문을 정리한 노트이고, 윤증이 말하는 1652년의 〈중용설〉은 이를 정리한 책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여튼 《중용장구》에 대한 견해 차이가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하였다면, 보은에서의 만남 이후 몇 년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틀어지기 시작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1653년이 오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멀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진실로 공자를 낸 마음에서 낸 것이네. 주자가 나온 이후에는 한 가지 이치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도 분명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이 의심스러워서 그가 감히 개돼지 같은 창자로 의논을 가한단 말인가. 그리고 혹 주자의 글을 지적하여 헤아려 보면서 ‘이 부분이 의심스럽다.’고 말한 정도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가 어떻게 감히 주자의 《중용》을 쓸어 없애 버리고서 자기의 설로 대신한단 말인가.5)

말은 과격하지만, 실상 윤휴가 한 일은 중용의 차례를 조금 바꾸고 해석을 주자와 달리 한 것밖에는 없다. 해석상의 문제이고 학자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윤휴에게 사문난적이란 죄목이 더해지며 사약이 내려졌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이런 정황에 대해 “윤휴를 사사하는 전지(傳旨) 가운데, ‘경전을 배척하여 장구를 옮겨 바꿨다.’는 말이 있는데, 《중용》의 주를 고친 것을 가리킨 것이다. ”6)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신년(1680), 조정은 이미 서인들로 채워졌고 남인들은 쫓겨났다. 경신환국(庚申換局)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진즉에 남인 윤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고문을 받은 윤휴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윤휴는 유서를 쓸 지필묵을 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무엇이 그리도 미웠을까.

3. 주자학이 만들어지다

윤휴의 죽음엔, 물론 정치적이며 직접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주자학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또한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조선이 아무리 교조적인 나라였다고 해도 학문적 해석이나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학자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동양에는 본래부터 서양 기독교의 종교재판이니 이단 심판이니 하는 말 자체가 없을 정도로, 이단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었다.

윤휴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권력 투쟁이었고, 그 와중에서 불거진 명분론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이 가졌던 절대적인 권위와 지배력을 확인하는 사례인 것 또한 분명하다. 도대체 주자는 누구인가?

주자의 본명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ㆍ회옹(晦翁)이다. 시호가 문(文)이어서 흔히 주문공(朱文公)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 주송(朱松, 1097〜1143)의 부임지였던 복건성(福建省) 우계현(尤溪縣)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휘주(徽州) 무원(婺源)의 호족이어서 주희는 무원의 옛 이름인 신안(新安)을 관향으로 썼다.

▲ 주희.
주송은 성리학자로서 남송의 대금 화친정책에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마침내 은퇴하여 우계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학문에 정진하며 아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아들은 대단히 영민하였다. 하지만 주희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그의 나이 14살에 부친이 죽으면서 멈춘다. 이후 주희는 부친의 유명에 따라 적계(籍溪) 호헌(胡憲),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 등에게 사사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자로 불교나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매우 개방적이어서, 승려나 도사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다. 주희도 선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대혜 종고(大慧 宗杲)의 제자 겸개선(謙開善)이 복건(福建)에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 주희는 선종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렇게 폭넓은 학문세계를 섭렵하며 1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유면지의 딸과 결혼한다.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일은 연평(延平) 이동(李侗, 1093〜1163)과의 만남이다. 이동은 복건성 남평(南平) 사람으로, 주희의 아버지 주송과 동문이었다. 1153년, 주희는 복건성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부임할 때 이동을 찾아간다. 당시 이동의 나이는 61세, 주희는 24세였다.

이들의 만남이 철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될 줄은 두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첫 만남에서 이동은 주희의 불교적 사유나 요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동의 불교비판이 처음부터 주희를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다. 첫 만남이 있고 7년이 흐른 1160년 겨울, 주희는 이동을 찾아뵙고 정식으로 제자가 된다. 수개월을 머물며 가르침을 받는데, 이 가르침이 주자학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불교와 도교로부터 완전히 멀어졌고, 주자학은 반불교ㆍ비도교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이동이 주희에게 전수한 학문은 이른바 낙학(洛學)이다. 낙학이란 북송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의 학문을 말한다. 흔히 이정자(二程子)로 불리는 이들 형제가 살던 낙양(洛陽)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북송오자(北宋五子) 중에서도 탁월하였던 이들의 학문이 구산(龜山) 양시(楊時, 1053〜1135)에게 전해지고, 양시는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1072〜1135)에게, 나종언은 이동에게, 그리고 마침내 주희에게 전수되기에 이른 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의 학문은 실상 매우 달랐다. 정호가 따뜻한 봄바람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 같았다면, 정이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정호가 불교와 도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면, 정이는 상당히 비판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다.

정호가 살아 있는 동안, 정이는 형 정호의 학문 세계에 가려져 있었다. 본인도 애써 전면에 나서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호가 53세에 죽자 한 살 아래 동생 정이가 낙학을 주도하며, 논리는 분석적이고 사상은 이원론적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이른바 이단에 대한 비난도 맹렬해졌다.

주희가 이동으로부터 전수 받은 낙학은 실상 정이의 학문이다. 주자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주자학이 정이의 학문에 바탕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주희는 정이를 알고 난 뒤로 오매불망 사숙(私淑)하였다. 정이의 학문은 주희를 매료시켰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그에 대한 존경심은 커져만 갔다.

주희는 정호와 정이의 학문을 구분하지 않았다. 애당초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두 사람을 한 데 모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하였는데, 이는 실상 정이의 틀에 정호를 맞추는 것이었다. 주자를 평가하며 흔히 북송의 성리학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고 한다. 집대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주희는 거의 모든 학문에 손을 대고, 자신의 체계 속으로 가져갔다. 그러다보니 논리적 모순도 나타나고, 그런 모순과 오류를 수정해 가는 과정이 되풀이되며 지리하고 번잡해기도 하였다.

주희가 편찬한 책만도 80여 종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란 책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어록 모음집인데, 무려 140권이다. 방대한 양도 양이거니와, 논리의 번잡함은 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4. 주희와 주자 사이

젊은이는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少年易老學難成
한 시각인들 가볍게 여길 수 없다 一寸光陰不可輕
연못가 봄풀은 아직 꿈에서 깨지도 못했는데 未覺池塘春草夢
뜰 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을 알린다 階前梧葉己秋聲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이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하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 어렸을 때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듯하다.

주희는 정말로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였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병이 심할 때도 앞장서서 늘 일하려 한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었다. 주희는 평생을 연구와 저술과 강학에 매진하였다. 곳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사(精舍)를 지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제자들을 길렀다. 그는 당대에 이미 대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원대(元代)에 주자학은 국학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자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차마 주자를 비판하지는 못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자(子), 즉 선생님(master)이란 호칭을 붙여 불렀다. 주자학은 그렇게 동양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인류 역사상 학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주자보다도 더 큰 사람이 있을까? 주자학만큼이나 오랜 세월, 광대한 땅에,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 학문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종교가 아닌 철학이 이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정호와 정이가 매우 중시했던 책이 《중용》이다. 《중용》과 《대학》은 본래 《예기》의 한 편명이다. 《예기》는 모두 49편으로 되어 있는데, 《중용》은 그 중 제31편이고, 《대학》은 제42편이다. 북송에 와서 이 둘을 《예기》로부터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함께 이른바 사서(四書)로 부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흔히 사서삼경이라고 할 때의 사서는 송나라 이전에는 없던 말이다. 북송 이래 유학자들은 사서를 매우 중시하였고, 주희는 주요 주석들을 모아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편찬하였다.

주희는 《중용》과 《대학》에 대하여 각각 장구(章句)와 혹문(或問)을 썼다. 오늘날 시중에 나와 있는 《중용》과 《대학》의 번역서는 대개 이 《중용장구》와 《대학장구》를 번역한 것이다. 혹문은 문답 형식으로 이들 책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지은 것이다.

《예기》 〈중용편〉은 본래 33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정이가 37장으로 나누어 《중용해(中庸解)》를 지었다. 이것을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편집하여 《중용장구》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주희를 불경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희가 죽고 500여 년이 흘러 윤휴는 《중용장구》와 다르게 편집하고 다르게 해석했다는 이유가 첨가되며 죽임을 당하였다.

주희가 언제 자신과 다르게 편집하고 해석하면 죽이라고 했던가? 혹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은근히 죽이라고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그런 적은 결코 없다. 하지만 주희는 그런 말을 안 했어도, 주자를 신봉하는 사람들 중엔 사람을 죽이는 자가 나왔다. 주자의 가르침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주희와 주자 사이에는 죽음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이 숨어 있었다.

주) -----
1) 《백호전서》, 〈행장〉
2) 《백호전서》, 〈연보〉
3) 《송자대전》 〈서(書)〉
4) 《백호전서》 〈독서기 중용〉
5) 《송자대전》 〈서(書)〉
6) 《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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