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꾸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음력 2월 15일 열반에 드셨다.

사라쌍수란 쌍으로 서 있는 사라수를 말한다. 사라수는 인도 지방에 자라는 쌍떡잎식물로 높이가 약 3m에 달한다고 한다. 부처님 생애의 중요 변곡점에는 세 가지 나무가 등장한다. 탄생하실 때는 룸비니원에 있는 아쇼카 나무, 곧 무우수(無憂樹) 아래였고, 정각을 이룰 때에는 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였다. 대열반에 드실 때에는 꾸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였다.

부처님이 하필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신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입적에 드실 무렵 부처님은 외도로부터 아(我)와 무아(無我)에 대하여 끈질긴 질문을 받았다. 외도는 나〔我〕의 존재를 방안의 등불과 같다고 했다. 백천 개의 등불을 켜면 제각기 밝게 비치어 서로 방해하지 않듯이 중생의 아(我)도 선을 닦고 악을 행하는 것이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방안의 등불은 인연 따라 불빛이 있게 되어 등이 많아지면 불빛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불빛은 등으로부터 나와서 방안을 비추지만 아는 몸으로부터 나와서 다른 곳에 머물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외도는 다시 “내가 없다면 과연 누가 선과 악을 짓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만일 내가 짓는다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곧 만일 내가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어떤 때는 선을 짓고 어떤 때는 악을 짓겠느냐는 뜻이었다. 외도는 결국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다는 부처님 주장에 논파당하여 출가하였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쌍으로 서 있는 사라수 아래에서 크게 사자후를 펴서 법을 펴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곧 사라쌍수는 동·서·남·북에 각각 쌍으로 2그루씩 있어서 부처님 열반적정의 세계인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대법문을 보여준다고 하셨다. 동방의 쌍수는 무상을 깨뜨리고 항상함을 얻는 것이요, 서방의 쌍수는 괴로움을 깨뜨리고 안락함을 얻은 것이며, 남방의 쌍수는 무아를 깨뜨리고 참된 나를 얻는 것이요, 북방의 쌍수는 부정을 깨뜨리고 청정함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중생이 이 사라수 숲을 보호하여 꽃과 열매가 무성하게 하는 것은 마치 제자가 부처님의 이러한 항상하고[常] 안락하고[樂] 나이고[我] 청정한[淨] 법을 수호하는 것과 같고, 네 개의 쌍수를 사천왕이 수호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한 사라쌍수가 꽃과 열매가 항상 무성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부처님이 항상 중생으로 하여금 성문과 연각의 이익을 얻게 함과 같고, 꽃은 나를 비유하고 열매는 안락을 비유하여 사라쌍수 나무 사이에서 고요히 대열반에 드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2월에 열반에 드십니까?”하고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은 2월의 시절인연을 통해 중생을 깨우쳐 주고자 대열반에 드신다는 취지로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선남자여. 2월은 봄이 되어 만물이 생장하고, 갖가지 꽃과 나무를 심으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강물이 충족하고 온갖 짐승이 새끼를 치는 때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흔히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기 쉬워 이를 깨뜨리고자 제법은 무상하고 여래만이 항상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고 설한다.”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초겨울은 낙엽이 지고 쓸쓸하지만 봄은 따뜻하고 화창하여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애착하므로 중생의 이러한 세간락을 파하기 위하여 인생고를 설하고 여래만이 항상하고 안락하다고 한다. 나머지 나이고 청정함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2월에 봄이 되면 즐겁다고 하는 것은 여래의 상·락·아·정을 비유한 것이고, 초목을 심는 것은 중생이 법을 듣고 환희하여 보리심으로 선근을 심음을 비유하고, 강물은 시방의 보살이 대열반의 법을 배움을 비유하며, 온갖 짐승이 새끼 치는 것은 불제자가 선근을 심는 것에 비유하고, 꽃은 칠각지, 열매는 사과(四果)에 비유한다. 결국 이런 뜻으로 2월에 열반에 드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15일인가.

부처님은 탄생하실 때, 성도하실 때, 전법륜(轉法輪)을 굴리실 때 모두 8일에 하셨다. 그런데 대열반만은 15일이다. 눈치 빠른 사자후보살이 그 까닭을 부처님께 여쭙자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선남자여, 15일은 달이 이지러지지도 않고 자라남도 없으니 대열반에 드느니라. 선남자여, 달이 둥글었을 때 열한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어둠을 깨뜨리고, 둘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길인지 아닌지 보게 하며, 셋째는 길이 굽었는지 똑바른지 보게 하고, 넷째는 한낮의 찌는 듯한 답답함을 덜고 서늘한 즐거움을 얻게 하며, 다섯째는 반딧불 같이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여섯째는 도둑질할 생각을 그치게 하며, 일곱째는 사나운 짐승에 대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여덟째는 우담바라 꽃을 피게 하며, 아홉째는 연꽃을 오므리게 하고, 열째는 집 떠나 길 가려는 이의 마음을 내게 하며, 열한째는 중생이 오욕락을 받아들여 쾌락케 한다.”

15일에 열반에 드신 것 또한 철저히 중생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둥근달이 어둠을 깨뜨리는 것은 여래가 무명의 어둠을 깨뜨림이고, 길과 길이 아님을 드러냄은 정도와 사도를 설함이며, 길이 굽고 굽지 않음을 봄은 생사가 험하고 열반이 평탄함을 보여주고, 달이 떠 서늘한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탐·진·치의 뜨거움을 여의게 함이며, 반딧불 같은 교만한 마음을 파함은 외도의 광명을 깨뜨림이고, 도둑질할 생각을 그침은 번뇌의 도둑을 파하는 것이며, 두려운 마음을 없앰은 오개(五蓋)의 번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고, 우담바라 꽃이 핌은 중생의 선근 심는 마음을 열어줌이며, 연꽃이 오므라듦은 중생의 오욕락의 마음을 덮어줌이고, 집 떠나려는 이의 마음은 중생이 대열반에 나가려는 마음을 일으킴이며, 오욕락으로 쾌락케 함은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즐기게 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래가 2월 보름에 열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하고 있다. 여래는 상·락·아·정에 있어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중생이 오욕락에 집착하여 세간락에 빠져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하도록 열반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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