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탄헌에서 막으라는 성충·흥수 충언 외면
5천 결사대 황산에서 패전…계백 장군은 전사 

이때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입어 고마미지현(古馬旀知縣)에 유배가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묻자, 흥수는 “좌평 성충의 말대로 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들은 이를 신뢰하지 않고 “흥수는 유배되어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애국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을 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 곧 기벌포(伎伐浦)를 따라 내려오게 하면 배를 옆으로 나란히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의 군사도 탄현을 오르게 하여 좁은 길을 따르면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치게 되면 삼태기 속에 든 닭이며, 그물에 든 고기와 같을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허락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물쭈물 우유부단했던 의자왕은 성충의 인맥이었던 흥수에게 묻는 큰 실수를 범한다. 흥사가 어떤 말을 하든 대신들의 반대는 눈에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 의자왕 덕에 흥수와 성충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어쩌면 흥수 역시 왕과 대신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흥수가 거꾸로 성충에 반하는 이야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충신들은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이렇게 시대의 희생양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백제라는 나라의 멸망에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이바지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지휘하여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그는 4번 싸워서 4번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부족하고 힘이 다하여 패전하고 계백은 황산에서 전사하였다.

계백의 황산 전투는 결사전이다. 죽음을 각오한 것은 결국 이 싸움에 승산이 없었던 것을 안 것이다. 나당 연합군과 비교해서 백제의 군사가 태부족인데 아무리 용장이 가고 하늘에서 내린 장수가 간다고 해도 이미 때를 버린 것이다. 천시가 안 맞고 지리도 없는데 사람마저 외면했으니 누가 운명을 돌이킬 수 있었을까?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津口)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병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다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정방이 두려워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어찌 날짐승이 괴이하다고 하여 천시(天時)를 어길 수 있습니까? 하늘과 민심에 응하여 참으로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신검(神劍)을 뽑아 여전히 진영을 빙빙 날던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김유신의 발검술이 신기에 도달했나 보다. 검기만으로 동물을 해칠 수 있는 경계에 들어갔나 보다. 물론 뻥이다. 만약 그런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이기어검(以氣御劍)의 단계에 들어갔다면 공중에 신검 하나 띄우고 모두 죽일 때까지 기다렸으면 될 것이다.

먹을 게 없던 벌판에 중국 군인들이 왔으니 얼마나 먹을 게 없었을까? 새들은 병영을 빙빙 돌며 구경도 하고 먹을 것도 탐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당연한 일을 가지고 까마귀가 그랬는데 이를 두려워해서 군대를 물렸다면 소정방은 바보다. 그런데 대원수가 되어 온 소정방이 바보라는 게 말이 될까? 신라인들이나 후대가 소정방을 바보로 만들고 싶었을 따름이다. 김유신과 대비해서 폄훼를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아니면 소정방이 일부러 겁쟁이처럼 행동하며 신라군이 나서서 먼저 싸워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가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약체가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던 계략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걸 알아챈 김유신의 계책이 더 뛰어난 것이 아니었을까? 여하튼 김유신의 신검으로 소정방도 어쩔 수 없이 진격을 하게 되었다. 이미 끝난 싸움이니 코만 풀면 되는 그런 장난 같은 전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소정방은 강의 왼쪽으로 나와서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백제군과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조석간만의 차를 타고 배와 배가 꼬리를 물고 서로 잇달아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나아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주둔했다. 성중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막았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미 끝난 싸움에 북까지 치고 고함까지 지르니 백제군과 성중의 백성들은 참으로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최선을 다해 싸웠을 것이지만 만여 명이 죽어도 승산은 없었을 것이다. 김유신과 소정방은 그렇게 백제 왕성을 유린했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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