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산수유가 피어나고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은 성큼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움추렸던 몸과 마음을 한껏 펼치면서 그 봄의 기운에 걸맞는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함께 찾아들어 잠시 주춤하게 될 때가 있다. 하나는 꽃샘추위고 다른 하나는 미세먼지다.

꽃샘추위는 말 그대로 꽃을 시샘하는 추위여서 삼월 하순에 내리는 눈이나 우박 같은 것들과 함께한다. 화들짝 놀라기도 하지만, 이 역시 ‘봄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어느새 사라지곤 해서 아쉬움을 느낄 정도다. 문제는 미세먼지다. 저감대책이라고 자동차 통행을 제한하기도 하고, 대중교통 요금을 면제해주기도 했지만 그다지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다.

아침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런던의 스모그나 북경의 살인적인 대기오염이 떠오르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뾰족한 대책은 없는 것일까?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런던에서 일어난 스모그 사건은 주로 석탄으로 난방을 하면서 나오는 아황산가스가 안개와 만나 황산안개가 되면서 생긴 비극이었다. 폐질환과 호흡곤란 등으로 만 이천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하니, 가히 20세기 최대의 환경오염 사건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영국은 그 비극을 계기로 삼아 1956년 대기오염 청정법을 제정하여 강력히 시행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없지 않은 것이다. 모든 존재와 사건을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불교에서는 그 연기(緣起)를 볼 수 있으면 깨달음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라는 사태는 그것을 만들어낸 요인들을 제대로 찾아냄으로써 그 해소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미세먼지를 불러오는 원인들은 대체로 중국으로부터 오는 공해 섞인 먼지들과 우리 내부에서 여러 먼지 유발 장치들로 나뉜다. 중국과 우리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음을 체감하게 하는, 미세먼지와 황사 등의 오염물질은 중국과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 점차적으로 줄여가는 수밖에 없다. 내부의 먼지들은 자가용 이용을 줄일 수 있도록 대중교통망을 확충하고, 오염이 심한 공장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대체함으로써 줄여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는 강력한 법과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차원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점검하는 일이다. 편의성과 과소비, 극단화된 고립의 당연시 등으로 채워지고 있는 우리 일상은 늘 위태롭고 지속 불가능하다. 내 삶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는 가정과 학교에서 그러해야 하고, 나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러해야 한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가능해야 하고, 우리 불교계가 중점을 두어야 하는 일도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중국에 미세먼지가 저렇게 심각해진 이유는 바로 그들의 급속한 경제성장이고, 그것 자체를 시비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도 걷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한 풍요의 한계 또는 함정을 그들에게 말해주면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최근 들어 기술 이전보다도 우리의 그런 정신적인 대안들에 관심이 더 많다. 20여년 이상 이어오고 있는 한·중 윤리학회의 교류에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면서도 어떻게 ‘윤리(倫理)’를 놓지 않을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음을 잘 알지만, 그들에게도 이렇게 충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와 과소비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그러니 맹목적인 성장 추구는 이제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박병기 |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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