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탄 승려들 왕흥사에 들어온 것은 ‘전쟁 대비’
신라 태종무열왕, 김유신 보내 당과 백제 공격 

왕흥사(王興寺)는 왕이 흥하는 절인데 승려들이 탄 배가 큰 물결을 피하려고 했는지, 여하튼 절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전란이나 재해로부터 피신할 일’이 생긴다는 암시로 보인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호국불교도 후대에 나온 것을 보면, 승려들이 피신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왕흥사에 모여 전쟁을 대비하려고 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불자된 도리일 듯하니, 그냥 좋은 뜻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싸웠다면 최초의 해군 승병일 것이다. 다만 그런 기록이 없으니 무엇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귀신 하나가 궁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부르짖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가 석 자 가량 내려가서야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등에 “백제는 꽉찬 만월이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글이 쓰여 있어 왕이 물으니, 무당이 “만월이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찬 것은 곧 기울게 되고, 초승달과 같은 것은 아직 가득 차지를 못했으니 가득 차지 못한 것은 곧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왕이 노해서 무당을 죽이자 어떤 이가 “온달은 융성한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는 점점 더 성하여지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징조일 뿐입니다.” 말하자 왕이 기뻐하였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인가 보다. 충신들이 가산을 탕진해가면서 기획비를 내고 초호화판 SF에 동물배우까지 쓴 무대를 마련했다. 귀신이 망한다고 하고 거북이를 등장시키면서까지 무대를 꾸몄으면 이제 의자왕도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정신을 차려야 했을 것이다. 연기가 부족했는지 긴가민가했던 의자왕은 무당도 죽이고 혹자의 말에 의지해서 오히려 비극을 암시한 연극을 희극으로 받아들였다. 즐겁게 한 편의 혹세무민의 연극을 본 의자왕의 소문은 당과 신라를 충분히 안심시켰을 것이다.

태종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 경신에 김인문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 고종은 좌호(虎: 고려 2대 임금 혜종의 이름인 武의 피휘자)위대장군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 즉, 유인원과 좌호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함께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벌케 했다. 《향기(鄕記)》에는 “군사는 12만 2711명이며, 배는 1900척”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사(唐史)》에는 그것을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니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의자왕이 혹자의 말을 믿고 신과 자연, 그리고 승려와 무당의 조언도 무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은 덕물도에 모였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 있는 덕적도(德積島)에서 백제 땅은 사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아닌가 싶다. 이미 백제는 끝난 것이지만 의자왕은 참 긍정적인 마인드로 대처한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깊은 바다를 건너왔으나 물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의 군사는 큰 나라의 후원만 믿고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병사가 이롭지 못함을 안다면 필히 의구심이 생겨 감히 창끝을 내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빨리 결전을 하려고 할 것인즉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의 군사는 우리의 군사에게 여러 번 패한 바가 있으므로 오늘날 우리의 병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일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 예기를 꺾은 이후에 편의를 엿보아 합전을 하면 모든 군사를 지키면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현과 최명길의 한판과 같다. 둘 다 논리도 명분도 실상도 다 옳은 듯하니 인조는 참으로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당파 탓도 있어서 첨예하게 싸우는 이들 앞에서 왕은 권세만 남은 허울뿐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도 그랬는데, 하물며 마마보이로 혹세무민 당하고 있는 의자왕은 설 곳이 없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그래서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고 귀양 간 옛 신하에게 묻는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된다. 정말 한심하다. 근데 정말 그럴까? 정말 의자왕은 바보고 대신들도 우매했을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 역시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특히 태종무열왕의 입장에서만 글을 쓴 게 아닐까? 승리한 신라의 역사! 역시 정치는 모든 게 승자승의 원칙인가보다. 이긴 사람 손을 들어주는 것. 얼마 전까지 유명했던 권승 누군가의 법칙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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