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공월면 스님.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서 1871년(고종 8년)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탄생하였다. 속성은 송 씨로 휘(諱)는 도암(道岩),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스님은 덕숭산과 선학원에 머물며,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스님은 만해 스님과 독립에 대한 의기가 투합하여 친밀하게 지냈다.

스님은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 스님의 법맥(法脈)을 계승한 사법 제자로서, 수덕사를 중심으로 40여 년간 선법을 펼치며 현대 한국불교의 선 체계를 확립한 대선사이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비구 보월(寶月)·용음(龍吟)·고봉(高峰)·금봉(錦峰)·서경(西耕)·혜암(惠庵)·전강(田岡)·금오(金烏)·춘성(春城)·벽초(碧超)·원담(圓潭) 스님과 비구니 법희(法喜)·만성(萬性)·일엽(一葉) 스님 등이 있다.

스님은 13세에 김제 금산사, 전주 봉서사, 논산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 진암(眞巖) 스님 문하에서 행자로 생활했다. 1883년에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여, 이듬해인 1884년 10월 경허 스님의 권유로 서산 천장암의 태허(泰虛)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1895년 여름 아산 봉곡사에서 새벽 범종을 치며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게송을 읊다가 깨달음을 맛보았다. 그 뒤 경허 스님의 경책을 받고 공주 마곡사,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에서 정진했다. 1901년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또 다시 새벽 범종소리에 크게 깨달았다.

1904년 입전수수(入廛垂手)하기 위해 북녘으로 향하던 경허 스님을 서산 천장암에서 만나 전법게와 법호 만공(滿空)을 받았다. 1905년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행하며 수좌들을 맞이하였다.

만공 스님은 “마음이란 모든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의 할아비이며, 모든 법의 근원이므로, 전불(前佛), 후불(後佛)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文字)를 세우지 아니 하셨다. 부처님이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자리를 나누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 곽(槨) 속에서 두 발을 보이셨다. 이 세 곳에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교외별전 법을 전하시고, 가섭이 아난(阿難)에게 전하여 삼십삼 대에 걸쳐 전함이 덕숭산에 이르러, 경술년으로부터 이제까지 삼십 회에 달한 바, 무슨 법으로 사람을 위하였는가?”라고 표방하였다. 스님은 자신이 깨침의 경지를 증득하였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와 ‘무자(無字)’ 화두를 학인들에게 주로 권하면서, 참선 공부에 필요한 외적 조건을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이라고 말했다.

1920년대에 선학원 설립 운동에 참여했고, 1930년대 중반 ‘조선불교선학원종무원’ 종정을 지내는 등 일본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전월사에 머물며 선풍을 일으켰다. 1922년에 선학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 1934~36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초대 이사장를 역임했다. 1933년부터 유점사 금강선원과 마하연 선원의 조실을 지냈으며, 1935년 5월 마곡사 주지로 추대됐다. 1935년 조선불교선종 대표 종정을 역임했다.

스님은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내·외적 조건을 제시한 후, 그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학인들에게 ‘참선을 생활화할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은 촌음도 허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 이 공부 밖에 할 일이 없다는 굳건한 신심부터 세워야 한다고 했다. 정진 중에 털끝만한 어른거림도 섞여서는 안 되며, 오직 꿈과 생시가 일여하게 공부를 해나가 꿈속에서도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하여 선생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도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을 버리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공부하는 사람은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 세간법과 불법이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불이법을 증득해야 참 인간이 된다”고 가르쳤다.

특히 만공 스님은 승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참선 공부할 것을 강조하며, “선 공부가 다만 출가 승려만의 일이고, 세속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면 불법은 정법이 아니”라고 했다. 장맛이 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참선을 공부할 수 있고, 공부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승속의 차이는 불법을 알고 모르는데 있지 머리를 깎고 기르는 데 있지 않다고 했다.

만공 스님이 보기에 8만 4천의 법문이 부처의 말씀이지만, 모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 오직 있는 것은 마음을 가르쳐 견성성불 하는 참선법뿐이다. 선법을 여의고, 만법을 닦을지라도 부처의 참된 법이 나타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 지눌과 휴정 스님이 보였던 선교 일원(禪敎 一元)의 전통은 만공 스님에 이르면 철저히 선 일원의 공부법이 된다.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을 중창 또는 복원했다. 특히 만공 스님은 간월암 복원 불사로 독립을 염원했다. 조선 개국도량이라는 상징성에 착안해 독립을 발원하고, 피폐해진 조선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찰은 무학 대사와 인연 있는 도량으로 워낙 풍수가 좋은 자리로 알려져 지방호족 세력이 절을 없애고 조상의 묘를 썼던 자리이다. 당시 일제 총독부를 설득하여 이장 비용을 만공 스님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복원했다. 이곳에서 스님은 벽초 스님과 원담 스님에게 조국 광복을 위한 1000일 기도를 거행하도록 했고, 기도가 끝나는 날 광복을 찾았다.

스님은 세수 75세, 법랍 62세 되던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고 한 뒤 잠들 듯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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