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가득하도록 지혜를 전한 붓다는 마지막으로 어떤 가르침을 남기셨을까. 붓다는 무여열반에 들기 직전에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 온갖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앞의 말씀은 불자라면 누구나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사성제와 연기를 깨달아 쉼없이 팔정도를 실천하여야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뒤의 문장은 쉽게 해석하기 어렵다. 방일하지 말라는 것과 무상이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가.

138억 년 전에 양자요동이 일어나 대폭발을 한 후에 별들이 만들어지고 그 별들은 나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태양도, 지구도, 그곳에 사는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38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되풀이하였다. 피를 흘리면 쇠가 녹스는 냄새가 난다. 피 안에 철이 있기 때문이다. 철은 30억 도에서 천문학적인 압력에 의해 양성자 26개가 결합되어야 만들어지며, 이는 별이 폭발할 때나 가능하다.

어디에선가 별이 폭발하면서 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성간물질로 떠돌다가 지구를 만드는 일부가 되었다가 생명이 탄생할 때 세포 안으로 들어왔고, 그 생명이 진화를 하면서 인간의 몸을 이루었고, 인간이 생주이멸을 되풀이하면서 내 몸에도 전해진 것이다. 그런 나도 언제인가 죽어 사대(四大)로 흩어질 것이고, 더 시간이 지나면 지구도 사라져선 또 어디선가 별로 탄생할 것이며, 우주도 대수축하여 무(無)로 되돌아갈 것이다.

끊임없는 영겁의 반복 속에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 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반복에 반하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군대만 가면 똑똑한 젊은이마저 ‘군발이’가 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과와 훈련이 사람들은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일 되풀이 되는 그 반복에 저항하여 연병장의 구석에 핀 꽃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피곤한 졸병을 대신하여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은 일이 차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이 형성되고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추구하고 보편 교육이 실행되는 20세기 이후에도 왜 집단학살이 끊이지 않는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 때문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도 맞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성 때문이라고 본다. 백인 아이에 대해서는 체벌도 꺼리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의 어린이는 별로 죄책감이 없이 죽였다. 제주 4.3항쟁 때 우익은 좌익을, 육지 사람은 섬사람을, 해안 사람은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여겼고 선량한 노인, 여성, 어린아이마저 학살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동일성은 ‘유색인, 이교도, 좌파, 여성’ 등으로 타자를 상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리차드 도킨스가 말한 대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기계’에 불과하며, 이 유전자의 목적은 자신을 늘리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숭고하게 보이든 혐오스럽게 보이든, 수 천 킬로 바다를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하여 헤엄쳐 와서 알을 낳고 죽는 연어나 교미하면서 수컷을 먹는 사마귀나 모두 이 목적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인간의 욕망과 탐심 또한 근본적으로 보면 이의 일환이다.

요즈음 미투의 대상에 오르내리는 이들은 성적 쾌락과 함께 권력이 작동하는 쾌감을 누리기 위하여 상대 여성이 죽음에 이르는 수치심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이다.

성폭력은 성적 욕망과 권력욕이 남성, 혹은 나라는 동일성 안에서 결합된 결과다. 태어나고 살다가 유전자를 남기려 섹스하고 죽는 그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명상을 통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과 나와의 연기, 그들의 고통을 깨닫고 그들의 고통을 덜고 즐겁게 하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차이’를 생성하는 데 동참할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백 억 년의 시간과 465억 광년에 달하는 우주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가장 의미 있고 불자다운 길이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