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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부정· 비판봉쇄 권력 속성과 종말
2018년 03월 02일 (금) 10:02:50 한만수 교수 budjn2009@gmail.com


타락한 일부 승려들을 비판해온 두 언론사(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대해 소위 ‘해종언론’이라고 조계종단은 공식 의결했다. 참 익숙한 장면이다. 권력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대중적 동의에 의존할 수 없을 때 꽤 자주 동원했던 수법은 바로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고 ‘저들’을 ‘우리의 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저들’로 불렀고, 일제는 ‘조센징’이나 ‘비국민’을 그리 불렀다.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에일리언 등의 상상적 우주괴물이 ‘공공의 적’으로 호출되기도 했다.

유대인이나 조센징 등으로 불리는 순간 그 존재들은 ‘적’(어린아이의 언어로는 ‘나쁜 편’)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더구나 ‘해종언론’이라는 작명의 효과는 자못 탁월한 편이다. ‘나쁜 언론’이라 부르다보면 왜 나쁜 것인지를 굳이 설명조차 할 필요가 없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나쁜 언론’이라 규정짓는 일은 이미 실패했다. 조계종단이 ‘해종’의 프레임을 고집하면서 겪어야했던 곤혹스러움이 그를 곧바로 입증한다, 헌법적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고, 여론의 비난도 외면하며, 심지어는 법원 결정조차 무시할 수밖에 없었으니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이런 주장 때문에 오히려 조계종단이 상징자본의 심각한 추락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조계종단이 이 잘못된 결정을 고수하는 까닭은, 그만큼 강력한 권력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정당한 비판을 수용할 겨를이 없을 만큼 취약한 주체이고 스스로 불안에 떠는 권력임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도 헌법과 법원과 여론에 맞서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안간힘으로 버티는 자의 불안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시대의 유물’ 같은 조치가 하필 불교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매우 가슴 아프다. 포살, 자자, 대중공사 등 진리공동체 구성원의 민주적 결정을 중시하는 전통은 불교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다른 종교들에서 진리와 정의에 대한 해석권이 특정 개인이나 세력에 의해 독점되기 일쑤인 것과는 대조적이며, 이미 2천여 년 전에 집단지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제도화한 셈이 아닌가.

집단지성과 민주주의에는 자유로운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며, 종단이 방대해져서 구성원들 대다수가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라면 (교계)언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는 불교적 가르침과 전통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일 터인데, 불교종단이 언론탄압을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자기부정이란 말인가.

80년대 신군부의 검열을 받았고, 학자가 된 이후 20여 년간 검열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취재금지, 출입금지, 접속금지, 광고금지, 접촉금지’라는 소위 ‘5금’을 망라하는 ‘검열의 종합세트’는 처음 본다. 일제 총독부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권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취재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법원의 결정까지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니, 세계 검열연구 학계에 보고하여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종단권력이 ‘해종언론’이란 굴레로 두 언론사는 ‘대항권력’으로 인식됐고 경제적 권력을 잃었지만, 훨씬 더 힘이 세고 오래가게 마련인 상징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종교사회학자 뒤르껨에 따르면, 이 상징권력은 사실 종교 특히 성직자에게 고유하게 배당되는 것이었다. 즉 성직자는 성스러움을 독점하는 ‘성/속의 이분법’에 의존하여 존경과 권위를 획득하게 마련인데, 이 이분법은 속스러움이 성스러움에 접근하고 오염시키는 일을 차단하지 않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다.

중세말 교황청의 타락에 루터가 이를 비판하자 교황청은 파문으로 응대했다. 일부 승려들의 파계는 종교의 생명과도 같은 성스러움의 파괴이니, 두 언론사의 비판은 불교를 지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조계종단의 ‘해종’ 공식 선포는 비유컨대 루터 파문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해종’ 규정으로 두 언론사는 불교 지키려다 핍박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비유컨대 ‘언어의 갠지스 강’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근대적 언론자유의 선구자 존 밀턴은 영국 왕이 출판허가령을 내리자 “공원 문을 닫음으로써 까치가 날아드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야유했다. 빚대자면 5금조치란 갠지스 강을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불교전통 부정하고, 근대민주주의 기반을 무시하는 5금조치에 불자라면 오로지 법등명 자등명의 가르침에 따를 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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