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월 일전 스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불교개혁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성월 일전(惺月 一全, 1866~1943) 스님은 주로 부산 범어사에서 활동하였지만, 1920년대 이후에는 선학원 건립과 발전에 공헌한 고승이기도 했다.

성월 스님은 1866년 7월 15일 경상남도 울산군 온산면 강양리에서 출생하였고 속명은 철근(哲根)이었다. 스님의 부친은 오사홍(吳士洪) 선생이고 모친은 김 씨였다. 7세 때 범어사에서 보암 정호(寶庵 定浩)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범어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강원 과정을 마친 후 금강산, 오대산, 설악산, 묘향산 등을 순례하며 참선수행을 했다. 이후 범어사로 돌아온 스님은 이곳에 주석하면서 사찰 중흥을 위해 힘썼다.

스님은 1900년대 초 범어사 내에 안양암, 내원암, 계명암, 원효암, 대성암, 원응정사 등 7개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무차선대회(無遮禪大會)를 열었으며, 《선문촬요(禪門撮要)》를 간행했다. 성월 스님의 이러한 노력으로 1900년대 선풍이 진작된 범어사는 선 수행 거점 도량이 되어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님은 1906년 범어사 전계화상(傳戒和尙)에, 1909년 섭리(攝理)에, 그리고 1911년과 1915년에 주지에 취임하였다.

1910년 임제종 운동과 성월 스님

성월 스님이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항일운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임제종(臨濟宗) 설립 운동 때부터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무력강압으로 일제에 병합되자 원종(圓宗) 종정 이회광은 독단으로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병합하려고 추진하였다. 이때 성월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이회광의 연합 책동에 반대하며 장성 백양사 한영, 구례 화엄사 진응 스님 등과 함께 원종을 부정하고 이회광의 매종 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911년 1월 호남과 영남 지역 스님을 중심으로 순천 송광사에서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하였다. 당시 만해 스님은 선암사 경운 스님을 대신하여 관장 직무를 대행했다. 이렇게 조·일(朝·日)불교 연합을 반대하고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한 임제종은 1911년 10월에 범어사에 종무원을 두고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본산으로 하여 그 세력을 키워갔다.

성월 스님은 1912년 5월 서울 인사동에 중앙포교당을 두고 그 책임자가 되어 임제종 운동을 이끌어갔다.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설립된 임제종은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공포에 이어 1912년 6월 통첩(通牒)을 받고 종무원 간판을 내리며 해산되었다. 그러나 성월 스님이 주지로 있던 범어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개한 임제종의 민족불교 수호운동은 이후 불교계의 독립운동과 자주성 확립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과 성월 스님

1919년 일제의 가혹한 무단 정치와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불교계의 3·1독립운동 참여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심이 된 사찰은 해인사와 함께 성월 스님이 주지로 있던 범어사였다.

만해 스님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2월 하순경에 범어사로 내려가 성월 스님을 만나 만세운동에 대한 밀담을 나눈 것으로 전한다. 당시 범어사에는 근대교육에 대한 성월 스님의 깊은 관심과 노력으로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었다. 범어사 강원 대표인 차상명, 김영규, 김봉한, 그리고 명정학교 대표인 김한기, 지방학림 대표인 김상기 등이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범어사 대표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범어사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해 스님의 지시로 범어사에 파견된 중앙학림의 김법린과 김상헌은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성월 스님과 담해, 경산 등에게 전하고 동래지역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김법린과 김상헌은 범어사 내에 있는 명정학교 학생들과 협의하여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선언서 5000장을 등사하여 동래에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했다. 마침내 3월 7일 밤 동래에서 차상명, 김봉한이 주도하여 선언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제창했다. 3월 18일 밤에도 이근우, 김해관 등이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고, 3월 19일에는 허영호, 이영우 등이 격문을 뿌리며 만세운동을 하였다.

부산 동래 지역의 3·1운동은 범어사 승려와 범어사 내에 있던 학교 재학생, 졸업생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일반 민중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당시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은 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으로 일제로부터 폐교 처분을 받았지만, 이후 명정학교는 광복 후 금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부산 금정중학교는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3·1운동 유공비’를 교내에 건립하였다.

서울에 이어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전개된 범어사의 3·1운동은 이후 경남지역 사찰의 만세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임제종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또 학교를 통해 근대교육에 힘쓴 성월 스님의 힘이 절대적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스님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접한 스님은 사재(寺財)를 출연하여 헌납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스님은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선학원과 성월 스님

일제의 사찰령에 대항하고 정법선리(正法禪理)를 포교하고자 남전, 도봉, 석두 스님이 발기하여 1921년 10월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건립하였다. 이때 성월 스님은 선학원 건립을 돕고자 서울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布敎堂)을 처분해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 포교당에서 나온 목재를 선학원 건축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스님은 이 일을 계기로 이후 선학원의 많은 일에 깊이 관여하며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선학원은 1922년 3월 수행승의 수행 환경을 조성해 선풍을 진작하고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창립하여다. 스님은 당시 선우공제회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남전, 도봉, 석두 스님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선우공제회는 1924년 경 회원이 300명 이상 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학원은 총독부의 과중한 세금 부과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여 한동안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침체기를 겪던 선학원은 1931년 1월 적음 스님에 의해 재건되어 1934년 12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개편되었다.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전환될 당시 성월 스님은 남전, 적음 스님과 함께 상무이사에 임명되었다. 스님은 재단의 재정을 돕기 위해 지가(地價) 1,000원에 상당하는 토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스님은 재단의 재정 자립을 위해 물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만공, 부이사장은 한암 스님이었다. 선리참구원은 왜색불교에 대항하여 1935년 3월 조선불교수좌대회(朝鮮佛敎首座大會)를 개최하고,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을 창종하면서 종무원 임원으로 종정에 혜월, 만공, 한암 스님을 선출하였고, 성월 스님을 종무원장(宗務院長)에 임명하였다.

1935년 9월 성월 스님은 선학원 초대 이사장 만공 스님을 이어 제2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1942년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43년 8월 9일 범어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78세, 법랍 71세였다. 현재 범어사 경내에는 ‘성월일전대선사비(惺月一全大禪師碑)’가 있다.

성월 스님은 출가사찰인 범어사에 주석하면서 사찰 중흥에 힘쓰고, 3·1운동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만년에 해당하는 1921년 이후에는 선학원 발전을 위해 분망한 삶을 보냈다. 선학원 건립의 산파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이사장과 이사 등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선학원의 초석을 쌓는데 공헌한 큰스님이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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