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연식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1)

첫째, 서지적 입장이다.

1) 개원사본이 《수심결》-《진심직설》의 체제가 아니라 《진심직설》-《수심결》의 체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 최연식의 주요한 논지 중의 하나인데, 이 문제는 오히려 반대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왜 이 두 책을 같이 묶어 놓았을까? 지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같은 곳에 앞뒤로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연식의 주장대로라면 금대(金代)의 승려로 정언 선사(政言 禪師)가 유력한 인물인데, 그도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2) 《수심결》-《고덕선사진심직설》-《계초심학인문》으로 편재되어 있는 경우, 중간의 책에 대해서 저자를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심직설》의 저자가 지눌이 아니라고 최연식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동일인의 저작물인 경우 중간에 있는 저작물에 대하여 그 인물을 명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이 가능성이 최연식의 주장보다 확률이 더 높은 건 아닌가?

3) 왜 명장의 편집 상태가 《수심결》-《진심직설》로 되어 있을까? 왜 지욱이 《진심직설》을 지눌의 저작으로 간주했을까? 또 지욱은 과연 명장에 수록된 《진심직설》만을 참고하였을까?

필자는 지욱이 단지 당시 유통되던 명장을 그냥 답습했을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그때 유통되던, 《진심직설》이 지눌의 저작임을 보여주는, 다른 본이나 그 당시의 견해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연식의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의문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견해, 즉 《진심직설》의 저자가 지눌이라는 주장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하나 확실한 것은 기왕의 견해보다 최연식의 견해가 더 많은 정황 증거와 추론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확실한 증거가 나타낼 때까지는 우리가 기왕의 견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최연식이 개원사본 《진심직설》을 발견한 것이나 그 서지학적 검토는 높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사상적 입장이다.

1) 《진심직설》과 삼문과의 관계

(1) 필자는 최연식이 지눌의 사상체계를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의 삼문체계로 이해하는 점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분명히 한다. (물론 최연식의 이러한 견해는 개인의 해석학적인 입장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지눌 사상 체계가 삼문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분명해야 한다.

지눌의 사상체계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체계이다. 그리고 지눌 돈오점수 체계를 일관하는 핵심어는 ‘자성(自性)의 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즉 불성(佛性)으로서의 자성(自性)과, 그 자성을 둘러싼 심성(心城)인 자심(自心)에 대한 탐구가 지눌 선사상의 특징이다. 그가 평생을 통하여 설파한 것은 공적영지한 자성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함으로써 모든 난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통현의 화엄을 통하여 추구한 것도 근본 보광명지로서의 자성이고, 혜능과 신회를 공부하는 것도 이 자성의 공적영지를 어떻게 증득하느냐는 것과 연관된다. 그가 말년에 대혜를 통하여 체득한 것도, 자성의 공적영지를 보다 빠르게 실천적으로 얻기 위한 방법론적인 자각으로서의 간화경절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의 모든 사유체계는 자성의 공적영지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눌에게 있어서 돈오는 공부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자심이 곧 참된 부처임을 바로 믿는 데에 있다. 자심과 자성 두 당사자간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내적인 교류의 순간, 즉 자성의 본래적인 특징인 공적영지를 자성의 부름에 의지하여 자심이 회광반조에 의해 깨닫는 그 찰나의 순간, 그때가 곧 자심이 자성이고 자심이 바로 참 부처가 되는 돈오(頓悟)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미 돈오하였는데 왜 점수해야 하느냐 하면 비록 불성을 보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의 습기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성불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실천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근본처를 깨닫고 점수해가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선오후수가 생기게 된다. 즉 지눌의 돈오점수는 선오후수로서 시간적 전후관계에 따라서 먼저 오(悟)한 이후에 차차로 수(修)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직설》이 삼문체계에 벗어나기 때문에 지눌의 저작이 아니다 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지눌의 사상체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혜능의 돈오와 정혜쌍수 사상, 이통현의 중생의 본래성불(부동지불) 사상, 대혜의 간화선 사상, 종밀의 돈오점수 사상의 영향이 《진심직설》에는 부분적으로라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진심직설》에는 이러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필자는 최연식과 견해를 같이한다.

(2) 최연식은 “《진심직설》에서 얘기하는 깨달음 이후의 수행은 수상정혜의 내용에는 해당하지만 자성정혜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를 약간 피력하고자 한다.

지눌은 오후수의 정혜등지문에 대하여 두 가지 수행법으로 나누어서 상근기의 자성정혜문과 열등한 근기의 수상정혜문으로 설명한다. 자성정혜문은 상근기가 무공의 공으로 정혜를 쌍으로 닦아 성불하는 문이다. 즉 성에 칭합하여 정혜를 등지하는 것이다. 수상정혜문은 중․하근기가 번뇌 망상을 끊어서 고요함에 들어가는 정혜의 문이다. 즉 상을 따라서 정혜를 등지하는 것이다. 결국 자성정혜는 최상근기를 위한 돈오적인 입장이고, 수상정혜는 열등한 근기를 위한 점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혜에 대한 지눌의 시각은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지눌은 자성정혜를 가장 바람직한 수행법으로 보고 있다. 둘째, 돈오 이후의 수상정혜의 수행법도 자성정혜의 수행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셋째, 그렇지만 닦음을 먼저 하는 자성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점문의 방법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눌은 논리적으로는 수상정혜문이 자성정혜문보다도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오후수로서의 점수의 내용으로서의 정혜쌍수에 애정을 보이고, 돈오점수를 천성의 궤철이라고 천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문제는 결국 지눌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자성정혜문과 수상정혜문을 피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연식의 “《진심직설》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 이후의 수행은 수상정혜의 내용에는 해당하지만 자성정혜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표현은 필자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연식은 지금 지눌을 이야기하면서 균여를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필요에 따라 논의를 전개하면 되는 것이다. 《진심직설》은 지눌 사상의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예를 들어 《간화결의론》에서는 간화선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꼭 지눌의 주요사상이 다 나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진심직설》에서 십종식망(진심식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조행(助行)을 설하는 것(진심정조), 목우(牧牛)를 이야기 하는 것(진심험공) 모두가 수상정혜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예들은 오히려 지눌의 저작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주)------
1) 최연식 교수는 이하 최연식으로 칭한다.

이덕진 | 한국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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