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증자’로 불린 백제 의자왕, 효심과 우애 깊어
신라 심리전에 ‘흔들’…유언비어 난무, 도둑질 극심 

왕이 태자였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왔다.

돌아가기 7년 전부터 술과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던 태종 대왕의 허우대는 무척 컸나 보다. 하지만 당나라 황제가 칭찬한 것이 반어법이라면 어떨까? 신성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면서도 사위로 삼는 것도 아니고, 시위 즉 경호원 같은 신하로 비서실에 채용하려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과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르니 무엇이 옳은지는 먼 훗날 유골 DNA 검사가 있어야 결판이 날지도 모르겠다.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백제 武王의 피휘)의 맏아들로서 영웅처럼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다.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증자는 중국 전국 시대 공자의 만년 제자로 공자 사후 유가 형성에 기여했다. 《논어》에도 등장하는 그가 《효경》을 지었다고 하니, 효도라는 측면에서 의자왕을 해동증자라고 했나 보다. 그때야 효자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아니 말년의 그의 행태를 봐서는 마마보이 또는 파파보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정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었다.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은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하니, 상류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침현이라고도 하는 백제의 요새지)을 넘지 말 것이며, 수군은 기벌포(곧 장암이니 손량이라고도 하고 지화포, 또는 백강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 4년 기미(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 또는 오합사)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결국 6년 후인 660년에 망한다는 뜻인가 보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중 한 마리는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좌평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여우가 둔갑한 것인가 보다. 아니면 성충을 모함한 것이거나.

4월에는 태자궁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태자비와 시위들의 음행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정말 전생의 부부였던 암탉과 참새의 로맨스였나?

5월에는 부여 사자수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언덕을 무슨 산으로 생각하면 안 될 듯하다. 강 가운데 있는 둔덕 같은 것이고, 홍수 등으로 쓸려 나왔다가 물이 말라 죽었다고 하면 쉽겠다. 썩은 고기를 잘못 먹어서 배탈 나 죽었나 보다. 하지만 사자수라면 물의 신이 나온 것인데 부여의 수호신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여하튼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신라 측 첩자가 퍼뜨린 소문이라면 어떨까?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660) 봄 2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결국,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방화와 도둑질을 하니 참으로 황망했을 듯싶다. 100여 명이나 죽이고 죽는 살상극이 있었다면 당시 치안은 참으로 불안했나 보다. 여하튼 이런 일들이 있어야 이러다 백제가 멸망하겠다고 국민들이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심리전, 요즘 말하면 댓글전에서 신라 측이 압도적인 승리를 한 듯싶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승려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가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이 역시 백제를 지키던 신수(神獸)들이 하나둘씩 나라를 떠나는 모습이다.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대신(大神)이 떠나니 지신(地神) 급인 작은 신수들도 하나둘씩 떠나간다는 의미인 듯싶다. 일본 지브리 영화사에서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께 히메>에 나오는 오오카미 늑대를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베꼈나?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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