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 인물 용수·용춘, ‘화랑세기’에는 형제로 기록
쌀·술 6말, 꿩 10마리 대식가…통치 스트레스인 듯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 씨이다.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된 용수(龍樹) 또는 용춘(龍春) 각간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용수가 용춘의 오자로 알았는데, 《화랑세기》 등에는 형제로 나와 논쟁이 되기도 한다. 수와 춘은 하늘과 땅 차인데 왕위 계승에서 단순한 오탈자란 있을 수 없다. 두 명의 형제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큰아빠와 작은아빠 차이인지, 아니면 형사취수제로 인한 것인지 등은 살펴볼 여지가 있다.

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막내 누이이다. 언니 보희(寶姬)가 서악(西岳)에 올라 소변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도읍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꿈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 문희가 “내가 그 꿈을 살게.”라고 하였다. 언니가 “뭘 줄래?”라고 묻자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겠다.”고 하니 언니가 승낙하였다. 문희가 치마폭을 펼쳐 꿈을 받을 때 언니가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고 하였다. 문희는 꿈값으로 비단치마를 줬다.

열흘쯤 지나 정월 상오 기일(忌日 ; 앞의 ‘사금갑’ 조에 자세하다는 최치원의 견해가 있다)에 김유신이 춘추공을 데려와 집 앞에서 축국(蹴鞠), 즉 공을 찼다.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저고리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우리 집에 가서 옷고름을 달자,”고 하니 춘추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옷고름을 달아 드리라.”고 하니 아해(阿海 : 보희)는 “어찌 사소한 일로써 가벼이 귀공자와 가깝게 하겠습니까.”라며 사양하였다. 고본에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 : 문희)에게 명했다. 춘추공이 유신공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문희와 정을 통했다.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공은 아지가 임신한 것을 알고 “네가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이 무슨 변고냐?”고 책망하며 온 나라에 소문을 내어 아지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둥할 때를 기다렸다가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인가?”라고 묻자 좌우에서 “아마도 유신공이 누이를 불태우려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자 왕이 “누구 소행이냐?”고 물었다.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붉게 변하자, 왕이 “네 소행이면 얼른 가서 그녀를 구하라.”고 하였다. 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 떳떳이 혼례를 올렸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춘추공과 그의 왕위 계승에 간여해서 권력을 잡고 싶은 신김 씨 김유신의 책략이 보인다. 정략 결혼에 휘말린 듯 보이는 김춘추의 성공적인 연기를 통해 까탈스러운 선덕왕의 방해를 피해 김유신 집안과의 야합은 성공한 것 같다.

진덕왕(眞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654년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에 춘추공이 즉위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째인 661년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계책과 큰 힘으로 삼한을 통일하여 사직에 큰 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았으니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이와 같이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이고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들었다. 계산해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에서 50석 정도 했으며,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칭송했다.

남부럽지 않은 태종 춘추공이 먹어도 너무 심하게 많이 먹은 이유가 뭘까? 단순 비만이기 보다는 왕이 되고 나서 스트레스 때문에 많이 먹게 된 것은 아닐까? 여하튼 왕이 되어 8년 만에 죽었으니 스트레스성 소화장애 또는 위암에 걸려 죽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계략에 뛰어난 유신공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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