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봄도 쉽게 오지 않는다. 봄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을 지닌 입춘(立春)은 늘 강추위나 눈보라와 함께 다가오고, 남쪽 금둔사 앞마당 자리했을 납월매(臘月梅)의 그윽한 향기는 얼어버린 눈송이 껴안아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쉽게 펼쳐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흔들거리며 매화꽃처럼 피어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익숙해지지 않는 요즈음, 그 추위를 막아보기 위해 켜는 전열기 등으로 인한 화재가 끊이지 않아 안타까움을 불러내고 있다. 아마도 좀 더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분들이 그런 화재 같은 사고에 취약할 것이고, 실제로도 병원이나 쪽방촌 같은 곳에서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이웃들에게서 벌어지는 일이고, 그들은 모두 붓다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행복하여라.”(전재성 역주,『숫타니파타』 「자애의 경」, 136쪽)라고 축복했던 중생들이다.

늘 뒷북을 치는 결과를 낳곤 하지만, 이런 재앙들에 대해서는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확실히 고쳐두어야 함에도 정말 그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일차적으로는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법과 제도를 바꾸는 방향으로 개선해야겠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들 일상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안전 불감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광복 70년의 현대사 속에서 압축성장과 빠른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들은 부정부패에의 눈감기와 비인간적인 경쟁의 추앙, 대충주의 등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성희롱과 성추행 같은 인격범죄에 온정적 자세를 취하고, 내부 조직의 부정의(不正義)를 용기 있게 고발한 사람을 배신자로 낙인찍는 문화를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다.

검찰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성희롱과 그 은폐 문제는 이제 언론계와 회사 등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제제기는 우리 사회가 정신적·문화적으로 한 차원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정의란 곧 강자의 이익이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고대 그리스의 젊은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의 슬픈 궤변에 맞서, 옳음은 인간으로서의 보다 온전한 삶에 대한 열망이라고 외치고 싶어 했던 소크라테스의 결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다.

붓다 또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사람이라는 가르침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말로 쉽게 표현될 수 없는 것, 즉 열반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 그의 마음이 충만하여 감각적 쾌락에 묶이지 않는 사람은 ‘흐름을 거슬러가는 자’라고 불린다.”(일아 옮김, 『담마빠다』, 110쪽)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삶을 꿈꾼다. 진제와 속제 사이의 불이성(不二性)을 기반으로 삼아 세상의 불의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 불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자비심을 잃지 않는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강자와 약자가 있고,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 중 어느 위치에 서있게 된다.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그 위치가 갖는 외적 힘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강조한 상징폭력, 즉 언어 등을 통한 정신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유념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힘에 눌려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보살의 삶은 그 각각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서 세상의 문제를 진리와 떼어서 생각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입춘 즈음이다.

박병기 | 한국교원대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