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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전·도봉·석두 스님, 선불교 중흥
일제 대항 선우공제회 설립, 선풍진작 민족불교 수호 초석 마련
2018년 02월 08일 (목) 10:23:19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남전(南泉 翰圭)·도봉(道峯 本然)·석두(石頭 寶澤) 세 분의 선지식은 1921년 당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이판계의 수장인 만해 용운스님을 중심으로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을 준비, 민족불교의 수호를 위한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朝鮮佛敎 禪學院 本部)’를 설립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래, 지속적인 친일계의 민족불교 침탈에 항거했던 선지식들은 1911년 임제종 운동을 일으켰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포고하였고 이로 인해 임제종 활동이 저지되자, 민족불교선각자들은 임제종 운동을 계승하는 동시에, 3·1 운동으로 당시 옥고를 치르던 만해스님의 출옥에 대비하여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朝鮮佛敎 禪學院 本部)’ 상량식(서울 안국동)을 1921년 10월 4일에 봉행하고 같은 해 11월 30일에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준공하였다.

남전 한규(南泉 翰圭, 1868∼1936) 스님

   
▲ 남전 한규 스님.
남전 한규 스님은 서울 선학원(禪學院)을 창건할 때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1917) 및 범어사 경성포교당 포교사(1918)을 역임하였다. 스님의 호는 남전(南泉), 휘는 한규(翰圭), 자호는 우두산인(牛頭山人) 혹은 백악(白岳)산인이다. 1868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고종 22년) 18세, 해인사 백련암에서 신해 스님을 은사로 득도, 사미계 수지했다. 가야산의 신해스님에게 출가하여 해인사의 백련암에 머물며 정진했으며, 완허 장섭 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 김천의 청암사, 동화사 내원(內院) 등에서 불교 경론과 선어록을 깊게 수학하였다. 승풍을 바로잡고 사찰의 정비, 선종의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해인사에서 참선에 열중했으며, 동래 범어사와 오대산 상원(上院)선원 등에서 안거를 했다. 1908년(융희 2년) 해인사의 금강 계단에서 제산 스님에게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고, 1911년 동래 포교소의 포교사, 이듬해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의 포교사에 취임하였다.

정재(淨財)를 가지고 1921년 석왕사의 도봉 스님, 범어사의 석두 스님 등의 여러 도반들과 함께 선학원을 창건하고 기틀을 잡는데 매진했다. 이듬해 해인사의 주지를 맡으라는 청을 사양하고 2년여를 정진하다가 직지사의 조실을 거쳐 통도사 보광전에 주석, 참선 수도에 전념했다. 1936년 선학원에서 열반에 드셨다.

도봉 본연 (道峯 本然, 1873∼1949) 스님

   
▲ 도봉 본연 스님.
설립조사 가운데 석왕사 도봉 본연 스님 역시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1922년) 건의 및 적극적인 포교를 위해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비록 스님에 대한 현존하는 행장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지 않더라도, 문헌의 간헐적인 기록에 의하여 스님의 행장 일부분을 더듬을 수 있는 있는 바, <선학원 창건 상량문>과 <선우공제회 취지서> 등을 살펴보면 민족불교의 선양과 불조정맥 계승의식 그리고 일제의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스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21년 친일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남전 한규 스님과 석두 보택 스님 등 민족불교의 선각자들은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이판계(理判系)의 지도자 만해 스님의 출옥에 앞서,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임제종 운동의 계승과 전통 선풍을 진작하고자 노력하였다. 도봉 본연 스님께서는 1915년 석왕사 선실의 좌주를 거쳐 1918년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를 역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1922년)를 건의하였다. 아울러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1923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1924년) 등을 역임하여 근대 민족불교의 성지인 선학원의 탄생과 기틀 마련에 기여를 하였다. 1949년 선학원에서 열반에 드셨다.

석두 보택 (石頭 寶澤, 1882∼1954) 스님

   
▲ 석두 보택 스님.
석두 보택 스님의 자호는 무화자(無化子)이다. 석두(石頭)는 호이다. 스님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 태어났다. 1898년(광무 2년) 석왕사의 청호스님에게 출가했다. 안변 석왕사 백하스님은 보택(寶澤)을 법명으로 내리고 출가를 허락했다.

그 뒤 10여 년 동안 명천 쌍계사・오대산 상원사・양산 통도사・합천 해인사 등에서 수행했으며, 1909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영봉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유점사에 머물면서 역시 20여 년 동안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헌납(1919년) 등 항일운동에 관여했다.

석두 보택 스님은 선학원 선우공제회 재무부 이사(1922년),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1924년) 등을 역임하며 선학원 탄생과 기틀 마련하여 한국 선불교의 중흥에 기여했다. 1940년 초 순천 송광사로 옮겨가 1952년까지 머물면서 후학들을 양성,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하며 부도암에 선원을 개설했다. 순창 순평암에 머물다 해방을 맞이했다. 71세 되던 해에 미륵도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기고 1954년 열반에 드셨다.

민족불교 지도자들은 선학원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한국전통불교 수호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려는 수좌스님들의 희망과 노력에 의해 1922년 3월 30일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가 설립하였다. ‘선우공제회’는 선풍진작과 민족불교의 자주·자립적 기치를 사명감으로 삼았다. 민족불교 수호를 위한 임제종 운동의 숭고한 의지를 계승하는 한편, 수좌스님들의 안정된 수행도량을 마련하고 대중포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자립자애와 중생구제의 기반을 세운 한국 불교계의 희망이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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