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 한규(南泉 翰圭, 1868∼1936)·도봉 본연(道峯 本然, 1873∼1949)·석두 보택(石頭 寶澤, 1882∼1954) 세 선지식은 1921년 당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이판계의 수장 만해 용운 스님을 중심으로 민족불교를 수호를 수호하기 위해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설립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래, 친일계의 지속적인 민족불교 침탈에 항거했던 선지식들은 1911년 임제종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가 1911년 사찰령을 포고하자 임제종 활동은 저지되었다. 민족불교 선각자들은 임제종 운동을 계승하는 동시에 만해 스님이 출옥하는 것을 대비해 1921년 10월 4일 서울 안국동에서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식을 봉행하고, 같은 해 11월 30일 준공하였다.

민족불교 지도자들은 선학원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한국 전통불교 수호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려는 수좌 스님들의 희망과 노력으로 1922년 3월 30일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가 설립되었다.

‘선우공제회’는 선풍 진작과 민족불교의 자주·자립을 사명으로 삼았다. 민족불교를 수호하려는 임제종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수좌 스님들이 안정되게 수행할 수 있는 도량과 대중포교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자립자애와 중생구제의 기반을 세운 한국 불교계의 희망이었다.

남전 한규

▲ 남전 한규 스님.
남전 한규(南泉 翰圭) 스님의 호는 남전(南泉), 휘는 한규(翰圭), 자호는 우두산인(牛頭山人) 혹은 백악(白岳山人)이다. 1868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 18세 때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신해 스님을 은사로 득도, 사미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며 정진했으며, 완허 장섭 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 김천 청암사, 대구 동화사 내원(內院) 등에서 불교 경론과 선어록을 깊게 수학하였다. 승풍을 바로잡고 사찰 정비, 선종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해인사에서 참선에 열중했으며, 부산 범어사와 평창 상원사 선원 등에서 안거했다. 1908년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제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고, 1911년 동래포교소 포교사, 이듬해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포교사에 취임하였다.

정재(淨財)를 가지고 1921년 안변 석왕사 도봉 스님, 범어사 석두 스님 등 여러 도반과 함께 선학원을 창건하고 기틀을 잡는데 매진하였다. 이듬해 해인사 주지를 맡으라는 청을 사양하고 2년여를 정진하다가 김천 직지사 조실을 거쳐 양산 통도사 보광전에 주석, 참선 수도에 전념했다. 1936년 선학원에서 열반에 들었다.

도봉 본연

▲ 도봉 본연 스님.
도봉 본연(道峯 本然) 스님은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로 활동한 분이다. 스님의 행장은 빈약하다. 여러 문헌에 간헐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으로 스님의 행장을 일부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선학원 창건 상량문>과 <선우공제회 취지서> 등을 살펴보면 민족불교 선양과 불조정맥 계승, 그리고 일제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스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도봉 스님은 23세 때인 1896년 석왕사에서 득도하고, 1908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15년 석왕사 선실 좌주를 거쳐 1918년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를 역임했다. 남전 스님, 석두 스님과 각별했던 도봉 스님은 조선불교 수호와 선학 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두 스님과 함께 선학원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도봉 스님은 1922년 평의원, 1923년 수도부 이사, 1924년 서무부 이사 등 선학원 선우공제회 주요 소임을 역임하며 선학원의 탄생과 기틀 마련에 기여했다.

도봉 스님은 조선불교유신회가 1922년 사찰령 철폐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때 참여하기도 했다.

도봉 스님은 만해 스님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두 스님은 일제에 항거해 조선불교 수호운동을 전개한 것은 물론, 지속적으로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1927년 경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요시찰 명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선학원 상벌위원을 지낸 도봉 스님은 1949년 선학원에서 열반했다.

석두 보택

▲ 석두 보택 스님.
석두 보택(石頭 寶澤) 스님의 자호는 무화자(無化子)이다. 석두(石頭)는 호이다. 스님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 태어났다. 1898년 석왕사 청호 스님에게 출가했다. 석왕사 백하 스님은 보택(寶澤)을 법명으로 내리고 출가를 허락했다.

그 뒤 10여 년 동안 명천 쌍계사, 상원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수행했으며, 1909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영봉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석두 스님은 유점사에 머물면서 20여 년 간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는 등 항일운동에 관여했다.

석두 스님은 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재무부 이사와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를, 1924년 선우공제회 평의원을 역임하며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1940년 초 순천 송광사로 주석처를 옮겨 1952년까지 머물면서 부도암 선원을 개설하는 등 후학을 양성했다. 71세 되던 1952년 통영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1954년 입적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