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성가대 활동도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 남편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교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찾아간 것은 그 부인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죽어가는 사람은, 처음에는 벌벌 떨면서 굉장히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누워있는 방에 악마가 나타나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한다면서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이 사람이 자신의 한 손은 악마가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천사가 잡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과 교인들은 더욱 몰입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람은 얼굴이 편안해지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답니다. 그리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죽어갔다고, 매우 기독교적인 임종담을 얘기해주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천국과 지옥행 티켓을 가르는 근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반면에 불교는 자신의 선행에 따라 좋은 데 태어날 수도 있고 나쁜 곳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불교에서는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등 육도 중에 어느 한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고, 이승에 태어나더라도 좋은 운을 타고 태어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은 지옥에 바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이승에서 아주 안 좋은 상황에 태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죽음에서처럼 불교에서도 사람이 죽을 때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죽음의 안내서’라고 할 정도로 임종 후 환생할 때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한 책 《티베트 사자의 서(書)》에서도 죽은 이는 빛, 부처님, 무서운 형상의 귀신, 갖가지 소리 등을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나 악마, 천사, 천당 등의 모습이 보이고, 불교인에게는 부처님, 귀신, 빛 등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 좀 신기하기는 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치를 때는 마치 다른 종족인 것처럼 다른 임사체험을 한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성자 파드마삼바바가 쓴 책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부처가 나타나든, 극락이 나타나든 그것이 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 줄 알면 그대로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경험하는 것은 결국 자신 속에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본다면 기독교인은 천사니 악마니 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에 당연히 그와 연관된 형상이 떠오르는 것이고, 불자는 극락이니 부처님이니 하는 개념 속에서 살아왔으니 또 그와 관련한 모습의 환영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보이는 모습은 모두 미친 사람 눈에 보이는 환영처럼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보이는 모습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거품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하면서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경계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사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죽었을 때도 엄청난 환상이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 환상이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각을 못한 중생은 여전히 환상 속을 헤매게 되는데, 그것이 육도윤회입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죽음이든,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의 죽음이든 레몬 맛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로써는 절대로 레몬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냥 죽음에 대한 말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담론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함으로써 얻는 것은, 삶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이룩해낸 것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췌장암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이 이룩해낸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의 영광과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반비례하는데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이렇게 지나치게 세속에 치우쳐 있던 삶에 균형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신과 함께 - 죄와 벌>(김용화 감독)이라는 영화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착하게 살아야겠다, 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영화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서 사회에 바람직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한 에너지를 일으켰으니 어떤 영화보다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하고 누구나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죽음의 모습은 앞에서 보여준 두 가지 모습의 죽음과는 또 다릅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나라 민간신앙과 불교의 사후관이 혼재한 죽음을 연출했습니다. 영화 오프닝에서는 《불설수생경》이라는 경전에 나타난 죽음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받고, 그 재판을 모두 통과한 영혼은 환생을 하고, 그렇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7개의 재판장에는 염라대왕, 변성대왕 등의 시왕이 있고, 또 망자의 죄를 샅샅이 들춰내는 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에 변호사가 있는 것처럼 저승에는 차사가 있습니다. 차사는 시왕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망자의 잘못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고,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식으로 망자를 변호해서 벌을 면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서 왜 극락이나 천국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지옥에서 재판을 받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영화는 인간은 아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지옥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도 극소수였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옥 중생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지옥도를 CG를 동원해 정밀하게 보여주었습니다. 7개의 지옥은 살인, 폭력, 배신, 불의, 거짓, 천륜 등으로 그 풍경 또한 살벌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준 지옥도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살인지옥에서는 펄펄 끓는 용암에 몸을 담그고, 나태지옥에서는 시계바늘처럼 굴러가는 원기둥 사이를 끊임없이 달리는 벌을 받는데,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뒤에서 다가오는 기둥에 깔려 뭉개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지옥에서는 혀를 뽑거나, 검수림에서 영원히 헤매는 형벌을 받고, 불의지옥에서는 수조에 갇힌 채 얼음으로 얼려집니다. 배신지옥에서는 거울 안에 가두고 깨트리기를 합니다. 그리고 폭력지옥에서는 날아다니는 돌에 맞는 것을 반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염라대왕이 있는 천륜지옥은 사막에 위치하는데, 영화에서는 이곳의 형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지옥도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상기시켰습니다. 이렇게 대충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안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관객들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그 답은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통해 사람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과 함께 - 죄와 벌>이 죽음에 대한 공포만 보여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인간은 언제나 죄를 짓습니다. 망자에 대한 재판을 지옥에서 하는 것만 봐도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오직 신의 판단과 형벌만 존재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다른 기회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가 영화에서는 ‘참회’였습니다. 인간이 비록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형벌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의 판단에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영화 <신과 함께 - 죄와 벌> 관객 수가 13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역대 흥행 3위의 영화입니다. 주호민 작가의 인기 웹툰 <신과 함께>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잠시나마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환기시킴으로써 삶의 균형점을 찾아주었으며, 우리 사회에 선한 에너지를 일으켰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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