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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라한, 초기불교의 최고 성인 ⑥
아라한을 보살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
2018년 02월 05일 (월) 11:37:17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후대 불교의 아라한 이해

초기경전에서는 아라한을 아홉 종류로 구분했다. 구무학(九無學) 또는 구종아라한(九種阿羅漢)이라 한다.

《중아함》 <복전경(福田經)>에서는 구무학을 사법(思法)·승진법(昇進法)·부동법(不動法)·퇴법(退法)·불퇴법(不退法)·호법(護法)·주법(住法)·혜해탈(慧解脫)·구해탈(俱解脫)이라 하였고, 후대 부파의 논서인 《구사론(俱舍論)》에서는 퇴법·사법·호법·안주법(安住法)·감달법(堪達法)·부동·불퇴·혜해탈·구해탈이라 했다. 또 다른 논서인 《성실론(成實論)》에서는 퇴상(退相)·수상(守相)·사상(死相)·주상(住相)·가진상(可進相)·불괴상(不壞相)·불퇴상·혜해탈 그리고 구해탈이라 했다.

여기서 혜해탈은 지혜의 힘으로 번뇌를 해탈한 아라한을 말하고, 구해탈은 다시 멸진정을 얻은 혜해탈인을 말한다. 구해탈이라고 일컫는 것은 멸진정을 얻은 것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이것은 마음과 지혜 양면에서 모두 해탈을 얻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혜해탈과 구해탈을 2종 나한이라 하고, 여기에 무의해탈(無疑解脫)을 더하여 3종 나한이라고 한다. 무의해탈은 구해탈중에서 일체의 문의(文義)에 통달하여 사무의해(四無礙解)를 얻은 자를 말한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는 《중아함》의 구무학에 대한 주석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초기불교에서 주로 심해탈과 혜해탈을 말하는데 아라한의 한 종류로 심해탈(心解脫)은 거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해탈은 수행 단계상 혜해탈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후대 불교에서는 혜해탈자와 구해탈자로 이분하여 전자는 멸진정을 얻지 못하고 오직 후자만이 얻은 것으로 본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는 아라한을 아홉 종류의 위계나 종류로 구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처님이 그렇게 구분해 말씀하셨을까는 의문이다. 사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도 특정한 경전에 한정되어 있다. 왜 완전한 경지가 이와 같이 여러 단계와 종류로 제시되어야 할까? 그렇다면 열반은 완전한 경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대승에서 열반은 단 하나의 경지이기에 한 종류의 열반만이 존재한다는 설명과 대비된다.

이와 관련해 초기불교 전통의 부파 가운데 아라한 이해에 관해 가장 파행적인 예는 대천오사(大天五事)다. 설일체유부 계통의 《대비바사론》이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등에 대천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천오사는 오사비법(五事非法) 또는 오사망언(五事妄言)이라고도 한다. 대천오사란 대천이라는 고승이 아라한의 경지에 관해 주장한 다섯 가지 설이다. 첫째, 아라한이라도 다른 것, 예컨대 천마(天魔) 등의 유혹에 빠지면 부정(不淨)이 흘러나옴을 면치 못한다〔餘所誘〕. 둘째, 아라한은 무지, 즉 염오무지(染汚無知)는 없으나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는 아직 존재한다〔無知〕, 셋째,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 있다〔猶豫〕. 넷째, 남으로 하여금 오입(悟入)하게 한다〔他令入〕. 다섯째, 도는 소리에 의해 생겨난다〔道因聲故起〕 등이다.

이는 전적으로 아라한의 경지를 낮게 보려는 후대의 아라한관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대비바사론》은 대천오사를 악견(惡見)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이라도 천마(天魔) 등의 유혹에 빠지면 부정(不淨)이 흘러나옴을 면치 못한다는 이야기는 일체 번뇌를 다한 아라한이 억압된 성적 욕구가 남아 있어 몽정(夢精)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 이미 아라한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본적인 의미의 아라한은 일체 번뇌를 다해 무의식적인 욕구 충족이나 욕구 표현인 꿈과 그리고 이것을 통한 몽정이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라한이 이미 오개(五蓋) 가운데 의개(疑蓋)가 제거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에 위배된다.

이와 같은 대천오사는 불교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하게 된 최초의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불교학에서는 근본 분열의 계기를 계율과 관련한 십사비법(十事非法)으로 본다. 대천오사와 관련한 분열은 근본분열 이후 대중부 내의 지말 분열로 보고 있다. 대천오사와 비슷한 내용은 상좌불교 전통의 주석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부파 간 상이한 교리 이해를 보고한 《논사(論事, Kathāvatthu)》 주석서에도 나타난다. 일부 부파에서는 아라한도 무의식적인 유혹에 휘말릴 수 있는 부정(不淨)이 남아 있으며, 아라한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법에 관한 의심이 있으며, 그리고 다른 이에 의해 깨달아질 수 있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좌불교 최고의 논서로 간주되는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서 아라한인 이유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 번뇌로부터 별리(別離)했기 때문(ārakā)이며, 둘째,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ari)이다. 셋째, 응공(應供)의 존재이기 때문(arahatta)이며, 넷째, 숨기는 악행이 없기 때문(araha)이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 주석서에서도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그친 자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아라한의 기본 정의에서 경장과 주석서 간에 주목할 만한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라한에 대한 이채로운 설명은 논서에 가까운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아라한들이 ‘열반의 성(城 : nibbānanagara)’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번뇌를 제거하고 정화된 존재이기에 열반이라고 하는 ‘최상의 성’에 모여 산다는 것이다. 각각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라한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 아라한 경지를 향해 있는 자도 거주한다고 한다.

또한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아라한도 죄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방사(房舍) 건립과 관련하거나, 여성에 대해, 탁발 시간을 잘못 알고 가는 것이나, 공양에 초대를 받고도 초대받은 줄 모르는 것이나, 남은 음식이 아닌데도 남은 음식으로 아는 것 등이 그것이다.

재가자와 관련한 아라한 이해도 특이하다. 예를 들어, 재가자가 아라한 경지에 이를 때에는 그 날로 출가하든가, 아니면 입멸(入滅)하든지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하지 않거나 반열반에 들지 않고는 그 날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말하는 공간적인 장소로서 ‘열반의 성(城)’이나 재가자의 열반 성취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른 시기의 초기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라한 경지를 성취한 재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논사(論事)》 주석서에서는 아라한은 네 가지 도의 지혜에 의한 존재이지만 붓다처럼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아니라고 한다.

초기불교 경장이나 율장에 보이는 대부분의 뛰어난 제자는 모두 아라한이었다. 후대 대승불교가 보살을 ‘자비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초기불교의 아라한 또한 대자대비의 실천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초기불교 전통의 부파는 아라한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승은 보살을 더 높이 평가하고 아라한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흔히 대승은 보살과 비교적인 입장에서 아라한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대승불교가 흥성했던 지역에서는 표면적으로 아라한보다 보살이 크게 숭배되었다. 나아가 대승은 이전의 불교가 아라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열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대승은 궁극의 경지는 아라한의 열반이 아니라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성취한 성불(成佛)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대승 경전에서 아라한의 성문승(聲聞乘)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근본적인 입장의 아라한관에 비추어 볼 때 아라한 격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아라한관에 대한 초기불교와 후대 불교 사이의 상반된 이해는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주제 중 하나이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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