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한용운 진영. 만해기념관 소장.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 멸절에 맞섰던 불교계 개혁파 선사들은 선학원으로 독립과 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선학원 조사스님들은 임제종 운동의 선풍을 이으며 3·1독립운동을 승계하고 독립선언에 앞서 투옥된 만해 용운스님의 출옥에 대비 1921년 10월 4일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서울 안국동에 상량하고 선학원 건립을 시작했다. 불교개혁가들은 상량 두 달 후 출옥한 만해 한용운 스님과 선학원에 모인 남전 한규, 도봉 본연, 석두 보택 선사 등 설립조사들은 조직적이며 거침없이 항일운동과 불교개혁을 전개했고 마침내 민족의 독립과 한국불교 재건을 이룩했다.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설립조사 열전’은 선학원 설립에 기치를 든 선사들의 이야기이다. 모태를 만든 만해 선사를 필두로 남전 한규, 도봉 본연, 석두 보택 선사 등 설립조사들과 선학원으로 불교재산관리법으로 박정희 정권의 강제 종단등록 조치에 불응자 형사처벌하던 굴욕에 맞서 불교재산을 수호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역대 이사장들을 재조망한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 스님은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 27세인 1905년에 연곡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영제 스님에게 계를 받은 스님은 1905년 백담사에서 이학암(李鶴庵) 스님으로부터 《기신론(起信論)》, 《능엄경(楞嚴經)》, 《원각경(圓覺經)》을 배웠고, 1908년 금강산 유점사 서월화(徐月華) 스님에게 《화엄경(華嚴經)》을 수학하였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1911년 박한영·진진응·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부산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의 체결을 분쇄하였다. 범어사에 조선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3월 15일에 서무부장, 3월 16일에 관장서리에 취임하였다.

한편, 1912년에는 경전을 대중화하려는 방편으로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고, 양산 통도사의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스님은 임제종 운동을 전개해 전통불교를 지키려 노력하였으며, 중국과 시베리아 등을 유랑하며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 속 깊이 체험하기도 하였다.

1913년 귀국 후 스님은 항일운동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저술과 잇따른 강연회를 통해 종래의 무기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고, 통도사 불교 강사로도 활약하였다. 만주를 돌아본 후 다시 백담사에 머물게 된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불교대전》을 발간하였다. 1915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의 포교사로 취임하였다.

1917년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득 진리를 깨우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서울 계동에서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다양한 글을 발표하여 문자로써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대중의 의식을 계도하려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919년 용성 스님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 한 분으로 참가하였다. 스님은 <3.1 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작성하였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수감 중 유명한 <조선 독립의 서>를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서로 제출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일부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거나 고문이 두려워 울부짖는 등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분노하며 호통을 치기도 하였다.

스님은 조선독립이라는 민족의 당면 과제 앞에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선사다운 기개로 초지일관하였다. “옥중 생활을 하는 사이 정서(情緖)조차 ‘쪼각쪼각’ 부서질 때가 많았다”고 회고할 만큼 수감 생활은 지독한 고통 그 자체였으나 민족대표로서의 당당함과 나라 잃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1921년 출옥 후 한용운 스님을 중심으로 한 민족불교 선각자들은 친일 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理判系)의 수행 도량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15일에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스님이 정법선리(正法禪理)를 포교한다는 목표로 선학원(禪學院) 건립을 발기했다. 8월 10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4일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 김남전 스님 등을 중심으로 상량식(上梁式)을 거행하고, 11월 30일에 준공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용운 스님은 1922년 선우공제회 결성 후, 수도부(修道部) 이사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선학원에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모임을 자주 가졌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대한 예비검속을 당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곳도 바로 선학원이었다.

아울러 불교 경전의 국역(國譯)과 불교대중화를 위한 단체인 법보회를 발기하였고, 1923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창설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와 근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고, 이듬해 발간하였다.

1927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발기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편하고, 제자인 김상호, 김법린, 최범술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 불교 대중화에 진력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평생 못 잊을 상처>라는 글에서 “3·1운동 당시 어린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만세를 부르다 마침내 잡혀가는 광경을 보고,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 그 때 그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평생 잊지 못하는 상처”라고 고백하였다. 결국 그 상처가 치유되는 해방 전까지 지옥과 같은 처절한 고통도 감내해 나갔던 것이다.

이후 스님은 1933년에 《유마힐소설경》의 번역에 착수하였고, 같은 해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기거하였다. 1938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당원들이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44년 세수 66세, 법랍 40세로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원적에 들었다.

이처럼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삶은 한 인간이 살다 간 자취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삶의 무늬가 다채롭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숨 가쁘게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누구보다 호기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의인·걸사의 포부를 지녔던 한용운 스님에게 다양한 삶의 경험을 요청하였다. 무엇보다 스님은 1905년 27세에 정식으로 출가한 이래, 1944년 66세의 일기로 입적할 때까지 근 40여 년간 수행자로서 불교인, 항일 독립운동가, 문학가의 삶을 살았다. 1933년 심우장(尋牛莊)에 기거한 10여 년 동안에도 실천적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스님은 대승불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진정한 수행자이자 보살이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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