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왕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왕이 되는 것이다.

촛불항쟁으로 정권을 교체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주권자로 인식한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내쫓았지만, 그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조직되지 못한 채 새로운 정권에 권력을 위임해버렸다.

오히려 광장은 촛불 이전보다 을씨년스러워졌다. 뜻있는 불자들이 모여 10차례나 촛불법회를 하고 불자결집대회를 열었지만, 조계종단의 변화는 전혀 없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불자들이 시민보살로 거듭나는 것이다. 시민보살이란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고 이에 동체대비심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자이자 시민주체로서 자기 앞의 실상을 직시하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로 그 모순을 비판하고 이에 맞서서 저항하는 자이다.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수행하는 등 보살의 면에 대해서는 불자 대중들이 잘 알 것이기에, 이 지면에서는 시민성에 초점을 두고 기술한다.

아직도 한국 불교는 중세적 봉건성과 주술성이 극복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근대는 신성과 교회에서 벗어나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공론을 형성하며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초시간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과 근대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리를 재해석하였다.

종교의 권위와 권력을 국가에 양도하고 교회를 시장 바깥에 자리매김하였으며,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을 끌어와 교회를 민주화하고 공공화하였으며, 공적 담론에서 신성보다 이성과 과학에 의한 검증과 논증을 중시하고,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저항하였다.

붓다의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가르침이나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뜻은 더 심오하지만, 이를 시민적 주체와 연관하여 해석하는 것도 그리 비약은 아니리라.

이제 불자들은 시민적 주체가 되어 절과 일터, 마을과 학교에서 공론장으로서 광장을 건설해야 한다. 그곳에서 “성찰이 없는 과거는 미래가 된다”라는 생각으로 종단의 차원에서 자기가 소속한 집단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된 전통과 적폐를 조사하고 이를 논의하고 청산하는 실천에 나서야 한다.

역사와 전통으로서, 소망실현으로서 기복 불교까지 부정할 것은 없다. 하지만, 혹세무민과 중세적 주술성은 극복해야 한다. 권력 및 자본과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과학 및 합리성, 중생의 현재 삶과 결합하지 못하는 불교 교리나 계율은 과감히 폐기하거나 수정하여야 하며, 절 안에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을 건설해야 한다. 누구든, 갑의 위상에 있을 때는 권력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을 섬기고 을의 위상에 있을 때에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실천하고 그럴 수 있도록 제도화한다.

곳곳에 사찰운영위원회 등 시민자치 조직을 구성하여 아래로부터 협치(governance)를 행한다. 총무원장이든 주지든 남성이든,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며, 모든 불자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가치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한 사람이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걸으며, 주지나 비구 독점체제를 깨고 4부대중이 모두 평등한 청정 승가 공동체를 구현하는 제도와 청규, 삶과 문화를 만드는 데 모두가 앞장서야 한다.

이에 승/재가 모두 내재적 초월과 입전수수(入廛垂手)의 화쟁이 필요하다. 스님들은 절 안에서 삼독을 지멸하는 수행을 통하여 내재적 초월, 깨달음, 열반을 지향해야 하며, 절 밖의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이에 공감하여 입전수수라는 말대로 다시 사회로 들어와 중생구제를 수행하여야 한다. 재가불자 또한 공공영역에서 시민주체로서 삶을 영위하되, 깨달음과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절이나 모이는 광장이나 마당을 시장과 신자유주의 체제가 포섭하지 못하는 의미와 지혜, 윤리와 덕성의 원천으로서 수행 공동체인 동시에 공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맑고 향기롭고 모두가 행복한 승가공동체 또한 자연스레 복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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