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김 씨 권력과 재력 겸비…원찰 송화방 건립
백석, 김유신 고구려로 유인 시도하지만 실패
 

나이 18세 되던 612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던 백석(白石)이란 자가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밤낮으로 깊이 모의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런 모의가 있음을 알아채고 유신랑에게 “공은 저와 함께 몰래 그 나라에 들어가 먼저 정탐을 한 연후에 일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청하였다. 유신랑이 기뻐하며 백석을 데리고 밤길을 떠났다.

잠시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유신랑을 따라 오는 것이 보였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다른 한 여자가 홀연히 나타나서 다가왔다. 유신랑이 세 여자와 즐겁게 이야기하며 맛있는 과일을 대접받았다. 유신랑이 마음이 편해져서 자신의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여인들이 “공의 말씀은 이미 잘 알고 있고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석을 놔두고 우리와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시면 그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으로 변하며, “우리들은 신라 산천제사 중 대사(大祀)의 제장인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호국신입니다. 지금 적국 사람이 공을 유인하여 데리고 가는 데도 알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어서 부득이 그것을 말리려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숲에서 나왔다. 골화관(骨火館)에 머물고는 백석에게 “지금 다른 나라에 가는데 필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자네도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오자.”라고 하였다. 마침내 집에 돌아오자마자 백석을 붙잡아 결박하고 사실을 물었다.

아무리 예쁜 여자라고 하더라도 적국에 가면서 마을을 털어놓고 떠드는 김유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백석을 따라 고구려에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삼신의 말을 듣고 깨침이 있었으니, 다행이다. 말을 들은 게 아니라 도를 전해 들었다고 보는 것이 어떨까?

백석이 “저는 본시 고구려 사람인데, 고구려〔고본(古本)에는 백제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의 신하들이 ‘신라의 유신은 바로 우리나라의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에 춘남(春南)이라 쓰기도 하나 잘못이다.〕의 환생’이라고 합니다. 나라의 변경지역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거나 간혹 숫컷과 암컷이 바뀌는 일이 자주 있어(또한 음양을 거스르는 것도 보장왕대의 일이다.) 왕이 점을 치게 하였습니다. 추남이 ‘왕의 부인께서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징조가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자 왕비도 몹시 화를 내며 이는 필시 요사한 여우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다른 일로써 그를 시험하여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에 담아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습니다. 추남이 ‘여덟 마리의 쥐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말이 틀렸다고 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 하니 추남이 맹세하며 ‘내가 죽은 후 적국의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리라’고 하였습니다. 추남의 목을 벤 후에, 쥐의 배가 커서 갈라 그 안을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어 그제야 그의 말이 적중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대왕께서 추남이 신라 서현공(舒玄公)의 부인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추남이 맹세를 하고 죽더니 정말 그러한가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저를 여기로 보내 유신공을 도모케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몸을 나타내어 흠향하였다.

김유신공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는 추남의 환생이라는 대박 드라마는 누가 썼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신라 큰제사의 호국신 세 명이 여성으로 변신해서 조연을 할 정도니 주인공 김유신공의 주가는 상한가를 모르고 치솟았을 것이다.

김씨 종가의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의 상곡(上谷)에 묻고 재매곡(財買谷)이라 하였다. 매년 봄철에는 그 종가의 남자와 여자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입구에 암자를 지었는데, 그런 까닭에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였다. 후에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호대왕(興虎大王) 즉, 흥무대왕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김유신의 본가 택호인 재매정댁(財買井宅). 재화를 매매한다는 뜻의 금입택을 가진 김씨 종가의 부인은 아마도 당대 최고의 복부인이었을 것이다. 부패한 정부의 영부인이나 할 수 있는 자리인데, 유명한 장영자 정도가 되어야 재매부인이라고 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김씨 종가의 며느리였으니, 신김 씨가 권력 뿐만 아니라 재력도 겸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김유신의 부인이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송화방이라는 신김 씨의 원찰까지 둔 김유신공은 결국 박 씨 왕인 경명왕대에 흥무대왕의 추봉되면서 죽어서라도 왕이 되어 소원을 푼다. 신라 김씨 때문에 기를 못 펴는 박 씨 왕들의 기사 중 사건사고가 매우 많은 것도 다 신라가 김 씨들의 나라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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